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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9화 (9/238)

9화 몰라뵈었습니다, 어르신 (3)

유진산은 다급히 불빛을 향해 따라붙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야만 했다.

산속을 헤집고 정신없이 내달리기를 반각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푸르스름한 불빛이 멈춰 서며, 점차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호랑이처럼 거대한 체구와 날이 선 송곳니. 게다가 곤두선 푸른 털은 물결처럼 아지랑이 치고 있었다.

유진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청랑?”

청랑(靑狼). 악명이 섬서 전체에 퍼져 있을 만큼 유명한 식인늑대였다.

삼십여 년간 놈에게 잡아먹힌 사람이 천 명을 넘는다.

지금껏 놈을 잡기 위해 전설적인 사냥꾼들이나 무림인들이 숱하게 나서보았지만, 살아서 돌아온 자가 없었다.

청랑이 양주산까지 흘러들어왔을 줄 어찌 예상했겠는가.

깊게 가라앉은 심연 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을 마주한 유진산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했다. 일평생 상대에게 이 정도로 압박감을 느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단 한 가지였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손녀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잡아야 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무기로 사용할 만한 것들을 찾아보았다. 창을 들고나오지 않은 것이 한이었다.

조심스럽게 하체를 낮춘 그는 바닥에서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청랑은 한 걸음씩 옆으로 이동하며 틈을 노리고 있는 듯했다.

유진산도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돌멩이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크르릉-!

그 순간 청랑이 지면을 박차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가히 전광석화 같은 속도였다.

유진산은 다급히 놈의 이마를 향해 돌멩이를 쏘아 보냈다.

파앙-!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전부였다. 실패한 것이다.

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청랑이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등골이 서늘해진 유진산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앞에서 돌진해오던 청랑이 등 뒤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뭐 이런!’

유진산은 당황할 틈도 없이 반사적으로 양손을 내뻗었다.

유가건곤장(劉家乾坤掌) 이초식 맹룡회안타(猛龍回顔打).

사나운 용의 안면을 때리는 초식이다.

해일처럼 움직이는 두 손이 다가오는 청랑의 아가리를 정확히 가격했다.

콰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청랑이 삼 장을 튕겨나갔다.

유가건곤장은 유(流)와 중(重)의 성질을 담아낸 부드럽고 무거운 장법이다. 반면 파괴력은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었다.

역시나 청랑은 충격을 받지 않은 듯 다시 공격할 틈을 노리고 있었다.

‘맨손으로 상대하기는 버거운 놈이로구나.’

마치 바위를 때린 듯 손목이 뻐근했다. 그러나 맹수 앞에서 아픈 기색을 내비칠 수 없었다.

둘은 서로 지지 않으려는 듯 눈싸움을 계속했다.

그러길 잠시 후. 돌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청랑이 등을 돌려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청랑은 한번 목표로 정한 사냥감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무엇인가 이상하다.’

지능이 높은 영물이었다. 왠지 느낌이 서늘해진 유진산은 거처를 향해 달렸다.

저 멀리 작게 보이던 거처가 순식간에 다가오며 시야를 가득 채워갔다.

거리가 십여 장에 이르는 순간 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아니나 다를까. 청랑이 자신의 거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이놈!!”

눈이 뒤집힌 유진산은 죽을 힘을 다해 내달렸다.

파아앙-!

낙엽을 밟고 내달리는 그의 속도는 벼락처럼 빨랐다.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린 경공 때문에 전신의 관절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관계가 없었다.

삼 장 이내로 좁혀진 순간 그의 신형이 붕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분노의 발길질.

콰직-!

집 안으로 달려들던 청랑은 반대편으로 튕겨 나갔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놈이 자세를 다시 다잡고 있을 때, 유진산은 허리를 붙잡고 재빨리 거처 안으로 들어갔다.

“끄윽.”

무리해서 발차기를 날리다가 허리를 삐끗한 것이다.

그가 다시 집 밖으로 나올 땐 손아귀에 창 한 자루가 움켜쥐어져 있었다.

창끝을 사선으로 내뻗는 순간 그의 기세가 달라졌다.

“감히 내 새끼를 잡아먹으려 했겠다. 어디 한번 다시 와보거라.”

청랑을 향해 겨누어진 창끝에서 찬란한 빛무리가 화르륵 타올랐다.

본디 기(氣)는 반투명한 무형의 성질을 지니지만, 화룡신창을 통해 내뿜어진 창기(槍氣)는 붉은빛을 띤다.

크르르릉-!

청랑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송곳니를 날카롭게 세웠다.

예사롭지 않은 유진산의 기세를 느꼈던 것일까? 조금 전처럼 쉽게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들어와 봐.”

유진산 또한 선공을 개시할 수가 없었다. 입구에서 비켜선 순간, 영악한 놈이 다시 아이를 노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일다경이 흐른 뒤에서야 청랑이 꼬리를 내리며 걸음을 돌렸다.

긴장이 풀린 유진산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휴. 참으로 악마 같은 놈이로구나.”

“하배!”

어느새 일어난 유설이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무슨 일이 있어도 할아버지가 지켜주마.”

청랑이 살아 있는 한, 한시도 손녀에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보인 화룡신창도 항상 곁에 두어야 했다.

며칠이 지나도록 청랑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어디선가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봐야 했다. 한번 정한 목표는 어디든 끝까지 쫓아가 잡아먹는다는 지독한 식인늑대가 아니던가.

다른 산으로 이동한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을 터. 불편한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다.

* * *

“자, 어서 먹거라. 많이 먹어야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단다.”

유진산은 집 안에서 손녀에게 버섯죽을 떠먹여 주고 있었다.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으니 예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흐뭇한 미소로 숟가락을 움직이던 중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흑산도 아이들이 괜찮을지 모르겠군.’

괘씸한 녀석들이었지만, 그래도 같은 산에 사는 유일한 이웃이었다.

선물을 받았으니 답례로 조심하라는 말 정도는 해주는 것이 도리란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친 유진산은 보자기를 꺼내 손녀를 감싸 등에 업었다. 창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길은 이미 외우고 있었기에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번 방문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산채에 도착할 때까지 경계를 서는 녀석들이 한 명도 없다니.

입구 근처에 도착해서야 십여 명의 산적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깍듯이 인사하는 모습에 유진산은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그사이 교육을 잘 받았나 보군. 채주를 만나러 왔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산적 중 한 명이 어딘가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다른 한 명이 유진산을 안내하여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산채 안으로 진입하는 순간 기분 나쁜 피 냄새가 진동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혼란의 흔적들을 찾아냈다.

‘한발 늦었단 말인가?’

작은 통나무집 몇 개와 내려앉은 망루 두 개. 게다가 곳곳에 새겨진 발톱 자국까지. 청랑의 흔적이 분명했다.

그때 가장 안쪽의 전각에서 낯익은 누군가가 뛰쳐 나왔다. 채주가 직접 마중을 나온 것이다.

“한 번은 오실 줄 알았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경고를 해주러 왔거늘 내가 늦은 모양이네.”

“어르신도 마주치신 모양이군요. 놈이 이곳에 터를 잡은 모양입니다. 점점 움직임이 대담해지고 있습니다.”

“대놓고 산채에 침입해 살육을 일삼다니. 거 참 놀랄 일이로군.”

“처음엔 배를 채운다고 생각했지만, 지켜보니 재미로 죽이는 듯싶습니다. 늑대는 결코 이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짐승이 아니라 악마입니다.”

유진산은 놈의 영악함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흑산도가 막아낼 수 있는 영물이 아니었다. 무당파의 보복이 시작되기 전에 청랑에게 먼저 전멸할 처지였다.

그러나 자신이 이들과 엮일 이유는 없었다.

“아무튼, 조심하시게. 단지 경고해주러 왔을 뿐, 할 말 다 했으니 이만 가보겠네.”

유진산이 바로 떠나려 하자 채주가 다급히 만류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어찌 그냥 보내겠습니까? 손님을 그냥 보내는 것은 흑산도의 도리가 아닙니다. 누추하지만 차라도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하지.”

둘은 전각 안으로 들어가 마주하고 앉았다.

채주가 양손을 모아 먼저 포권을 건네었다.

“정식으로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흑산도의 채주 풍호입니다.”

“나는 그저 볼품없는 일개 노인일 뿐일세.”

추격을 받는 상황이었으니 이름을 말해서 좋을 것은 없었다.

풍호는 상관없다는 듯 찻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유가장의 유일한 생존자인 가주 어르신이지요.”

유진산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설마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어찌 알았는가?”

“비록 양주산에 둥지를 틀고 있지만, 세상 돌아가는 사정은 알고 있습니다. 무림맹에서 어르신을 쫓고 있다는 것을요.”

“무림맹의 수배전단을 본 모양이로군. 헌데 왜 밀고하지 않았는가. 현상금이 꽤 될 터인데?”

풍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와는 별로 친하지 않은 세력입니다. 현상금도 좋지만, 정파 놈들이 좋아하는 건 별로 보고 싶지 않더군요.”

“솔직해서 좋군. 자네들을 토벌하려는 세력이 아니던가.”

이번엔 풍호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찻잔을 움켜쥔 유진산은 목을 한 번 축이고 나직이 말했다.

“우연히 산적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네. 의로운 일은 하지 않더라도 죄는 짓지 말고 사시게. 결국엔 모두 돌아오는 법이니.”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흑산도에도 규칙이 있습니다. 강호에 속하지 않은 양민들은 절대 공격하지 않습니다. 영역을 침범하는 자들을 제외하고 말이지요.”

“최소한의 양심은 있다는 것인가?”

“강호란 뺏고 빼앗기고, 강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무림맹의 전단을 보니, 멀쩡한 어르신이 주화입마에 빠져 광인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음지에 숨어서 쓰레기 짓을 하는 놈들이나, 가식 없는 우리 흑산도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 어쩌면 우리가 같은 적들을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만.”

풍호는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저희를 좀 도와주십시오, 어르신.”

“흑산도의 사정은 잘 알지만, 나는 지금 불필요한 싸움에 참여할 수가 없는 처지일세. 등 뒤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무조건 살아남아야 하네.”

“토벌대와의 싸움은 저희가 알아서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청랑은…….”

손녀의 안전을 위해 유진산 또한 놈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것에 대해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청랑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그 부분이라면 힘을 보태겠네.”

“고맙습니다. 명예롭게 죽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짐승에게 물어뜯겨 죽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렇겠지. 놈을 잡기 위해 어떤 방법을 생각해두었나?”

풍호에게 방법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랬다면 진즉에 사용했거나, 유진산에게 도움을 요청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유진산은 다시 한번 목을 축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산채 안에 함정을 파고 유인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함정이라면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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