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흑산도의 여왕벌 (3)
“어서 오십시오!”
입구에서 깍듯이 인사하는 소호객잔의 점소이였다.
오늘따라 무림인이 많아서 그런지 몹시 긴장하고, 경직된 모습이었다.
유진산은 주변을 쓱 둘러보고는 나직이 답했다.
“이 층에서 가장 구석진 자리로 안내해 주게.”
“예, 그럼 바로 모시겠습니다, 어르신!”
그가 이 층을 택한 이유는 혹시 모를 시비를 피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시야 확보 때문이었다.
이 층은 중앙이 뻥 뚫려 있어 일 층의 상황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였으며, 여차하면 빠져나갈 수 있는 창가까지 보였다.
점소이를 따라 올라가는 길에는 수많은 무림인을 볼 수가 있었다.
서로를 경계하며 식사를 즐기는 각양각색의 인물들.
언제라도 시비가 걸릴 듯 긴장이 가득했지만, 서로가 조심하는 눈치였다. 검후의 은퇴식이 끝날 때까지 개인 간의 다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무림맹의 공표 때문이리라.
“자, 이쪽입니다. 음식은 무엇으로 준비해드릴까요?”
유진산은 자리에 앉으며 현희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녀가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하라는 의미였다.
현희는 유설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환한 미소로 물었다.
“이곳에는 무슨 음식이 유명해요?”
“저희 소호객잔은 여덟 가지 야채에 오리를 볶아 만든 소호팔압채가 가장 인기입니다. 고기국수도 굉장히 유명하지요.”
“그럼 그것들로 준비를 해주시고, 닭죽도 한 그릇 추가요.”
“예, 손님. 술은 괜찮으신지요?”
평소 술을 마셔본 일이 없던 현희는 유진산을 바라보았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억지로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한잔 마시고는 싶지만, 참아야겠지. 주문한 음식만 가져다주시게.”
그에게 있어서 술을 가까이한다는 것은 수명을 깎아내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환골탈태를 이루기 전까진 참을 생각이었다.
“예, 그럼 금방 내오겠습니다.”
손님이 많아서인지 주문한 음식은 일식경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유진산은 먹을 생각도 않고 손녀의 입에 고기부터 넣어주기 바빴다.
“허허. 잘 먹는 걸 보니 입맛에 맞는가 보구나.”
음식이 맛있는지 유설은 아기새처럼 입을 계속해서 벌렸다.
현희가 흐뭇한 미소로 그를 대신해 닭죽을 뜨며 말했다.
“제가 할 테니, 아버님부터 어서 드세요.”
“허허허. 고맙구만.”
이들 셋은 화목한 가족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유진산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지만, 실상 그의 온 신경은 무림인들의 대화에 집중해 있었다. 현희를 따라 이곳까지 온 이유에는 강호의 정세를 알아보기 위한 목적도 포함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거 알아? 여기 소호객잔의 진짜 주인이 검후라는 소문이 있어.”
“웃기는 소리. 검후가 뭐가 아쉬워서?”
“나도 모르지. 객잔을 확장하면서 들어간 돈이 검후의 자금이라더라.”
“이깟 객잔이 뭐라고? 헛소리 말고 먹기나 해.”
모든 곳이 검후에 대한 얘기로만 왁자지껄했다.
혹시라도 가문을 몰살시킨 흉수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를 원했지만,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정보 획득을 체념한 유진산은 국수를 먹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렇게 반각이 흘렀을 때였다.
“검, 검후다!”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 동시에 이 층에 자리한 수십 명의 무림인이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그들은 난간에 매달려 아래층을 응시했다. 반면 일 층에 있던 무림인들은 온몸이 얼어붙었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공교롭게도 유진산이 앉은 자리는 일 층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다.
유설의 입에 숟가락을 가져가던 현희는 입이 떡 벌어지며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세상에.”
봉황이 수놓아진 화사한 적의(赤衣). 그리고 허리춤에 퉁소와 소검(小劍) 한 자루를 둘러맨 여인이었다.
검후(劍后) 소소. 그녀의 모습은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유약해 보이면서도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아름다움. 게다가 얼굴은 아직도 앳된 모습이 남아있을 정도로 어려 보였다.
왁자지껄했던 객잔이 폭풍전야처럼 조용해졌다. 빈 탁상으로 걸어가는 검후의 발걸음 소리를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객잔의 점소이가 냉큼 달려가 공손한 자세로 물었다.
“매번 드시던 그것으로 준비해드릴지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객잔 안에는 무려 백 명에 가까운 무림인이 있었지만, 아무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잠시 후 점소이가 가져나온 음식은 고기국수 한 그릇이 전부였다.
국수의 육수부터 한 모금 들이킨 검후는 스스럼없는 미소를 지었다.
“히히. 역시 맛있어!”
그것은 마치 천진난만한 개구쟁이의 웃음과도 같았다.
갑자기 이 층에서 지켜보던 무림인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가까이 있었던 유진산은 그들의 소곤거림을 들을 수가 있었다.
“검후 아닌 거 같은데?”
“뭐, 뭐야. 저게 무슨 검후야……?”
다들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모두가 만인을 압도할 검후의 기세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에서는 조금의 위압감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일반인처럼 어떠한 기(氣)도 느껴지지 않는다니.
시간이 지날수록 지켜보는 자들의 긴장이 풀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별거 아닌 거 같은데? 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그러게? 도대체 검후라는 호칭은 어떻게 딴 거야?”
“강호가 뭐 그렇지. 괜히 여기까지 헛걸음했네.”
험담하는 자들의 목소리는 점차 커졌고, 근처에 있던 유진산은 점점 불길해졌다.
그가 보는 시선은 다른 무림인들과는 조금 달랐다.
젓가락을 움직이는 동작에서조차 느껴지는 기개. 그리고 주변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여유로움이라니.
누구보다 경험이 많은 유진산은 본능적인 위화감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시야에서 검후를 놓쳤기 때문이다.
“헙…….”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수십 년간 강호를 종횡했을 당시에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때 등 뒤로 삼 장 거리에서 청아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요? 무림고수는 다 근엄하고 무뚝뚝해야 해요?”
다급히 고개를 돌려본 유진산은 입을 떡하니 벌리고야 말았다. 아래층에서 국수를 먹고 있던 검후가 눈 깜짝할 사이 이 층에서 뒷짐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 앞에는 조금 전 험담을 했던 두 명의 무림인이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 그게…….”
“검후 아닌 거 같아요? 한번 시험해 볼래요?”
검후 앞에 선 무림인들은 사시나무처럼 떨며 동시에 답했다.
“아, 아니요…….”
그들의 얼굴을 잠시 올려다보던 그녀는 재밌다는 듯 웃어 보였다.
“히히. 농담이에요.”
검후를 험담했던 무림인들은 긴장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순간 그녀는 어느새 다시 일 층으로 돌아와 국수를 먹고 있었다.
객잔의 무림인들은 그녀가 국수를 마저 먹고 떠날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객잔 안에서 신난 인물은 오직 맛있는 고기를 실컷 먹게 된 유설뿐이었다.
“마이떠~”
유진산은 아이의 입가에 묻은 기름을 닦아주며 중얼거렸다.
“자네의 소원인 검후를 눈앞에서 봤으니, 이제 우린 산채로 돌아가세.”
“하지만…… 조금 있으면 금분세수식이 시작된단 말이에요. 멀리서 그것만 보고 가면 안 돼요?”
검후의 모습까지 확인한 이상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가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창가 쪽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다급히 소리쳤다.
“무, 무림맹주다!”
“도존도 함께 있어!”
“왼쪽에 계신 분은 곤륜파의 유광진인 아니야?”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가사를 걸친 어느 여승의 주위를 위엄 가득한 자들이 날개처럼 보필하며 걷고 있었다.
하나같이 정파의 기둥이라 불리는 거물급이었다. 맹주를 필두로 무림맹의 원로고수들이 몰려온 모양이었다.
무림인들은 흥분하며 죄다 창밖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객잔 밖으로 심상치 않은 기(氣)를 느끼고 있었던 유진산은 표정이 다소 경직되어 있었다. 조금 전 검후를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무림맹주가 직접 왔다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겠구만. 대신 멀리서만 보는 조건이네.”
자신에게 살인누명을 씌우고 수배령을 내렸던 맹의 원로가 저들 중에 포함되어있을 터. 그들의 모습을 확인할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유진산의 제안에 침울해 있던 현희의 표정은 금세 해바라기가 되었다.
“정말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그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전에 창틀로 스쳐보니 무림맹주가 아미파의 비구니로 바뀐 것 같더군. 정녕 내가 본 것이 틀림없는가?”
“모르셨어요? 아미파의 장문인이 구파일방의 최고수잖아요. 최연소의 나이에 무림맹주가 되어서 강호가 떠들썩했는데요.”
다소 의아한 일이었다.
아미파는 여승들로만 이루어진 문파였다.
비록 구파일방에는 포함되어있지만, 세가 강하지 못했기에 유진산이 활동했던 시대에는 꿈도 못 꿀만 한 일이었다.
“강호에 관심을 끊은 지 삼십 년이 넘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얼마나 되었는가?”
“최근이에요. 한 이 년쯤 되었을걸요”
순간적으로 유진산의 눈빛에 미세한 살기가 어렸다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이 년이라……. 그렇군.”
이 년 전이면 유가장이 습격을 받은 시기와 맞아떨어졌다.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엇인가 연결고리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왜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맹주가 한쪽 눈이 없던 거 같던데?”
“소문에 의하면 소싯적 검후한테 당한 상처래요. 어디까지나 소문이지만요. 아무튼, 어서 먹고 나가요, 아버님.”
“그러지.”
셋은 남은 음식을 먹어치우는 데 집중했다.
일다경이 지난 후 계산을 마치고 나온 이들은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장소는 굳이 수소문할 필요는 없었다. 거리마다 보이는 모든 무림인들이 한곳으로 향하고 있었으니.
“저쪽인가 봐요!”
“그런 것 같군.”
마을 뒷산의 입구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그곳에 장소가 마련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먼 곳에서만 구경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금세 물거품이 되고야 말았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점차 소란스러움이 거세졌다. 언성이 높아지는 것으로 보아 험악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듯했다.
“저, 저게 도대체 무슨 일이죠?”
유진산도 이미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여 명이 넘는 인파가 무엇인가에 가로막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금 더 다가가서 보자 무림맹 소속의 무사들이 길목을 틀어막고 있었다.
백의를 입고 장검을 움켜쥔 무사들. 비록 이십 명에 불과했지만 하나 같이 범상치 않은 기세가 느껴졌다.
“금분세수식은 취소되었으니 모두 돌아가시오.”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각지에서 몰려든 무림인들이 격분하는 것이 당연했다.
“열흘 동안 걸어왔는데 돌아가라고?”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개인이 모여 군중이 되면 없던 용기도 생기는 법.
평소에는 눈도 마주치지 못할 무림맹의 무사들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은 달랐다.
그때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내뻗으며 소리쳤다.
“그럼 저자들은 왜 들어가는데!?”
죽립을 깊게 눌러쓴 흑의인들이 끊임없이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사들은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는 모습이었다.
“뭐야, 지금 차별하는 거야?”
“너희들이 그러고도 정파의 대표를 자칭한단 말이더냐!”
항의가 거세지자 무림맹 측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다른 자들과는 달리 그가 입은 백의에는 황용 한 마리가 휘감고 있었다.
그의 등장과 함께 거셌던 목소리가 단번에 증발했다.
“자룡검 왕휼?”
“저, 저자가 왜 이곳에…….”
먼 곳에서 지켜보던 현희가 유진산에게 작게 속삭였다.
“사천성의 삼대 검객 중 한 명이에요. 자신과 검을 맞댄 자를 살려둔 적이 없었다고 하네요.”
“요즘의 정파는 내 시대와 많이 다른 것 같군. 협의가 없어진 것 같아 씁쓸하구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왕휼의 검 끝이 바닥을 향해 세차게 그어졌다.
촤아아악-!
검기가 지나간 바닥은 골목의 끝에서 끝까지 일(一) 자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지금부터 이 선을 넘어오는 자는 누구든 벨 것이니, 살고 싶지 않은 자들만 들어오시오.”
강인한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바로 강호였다.
몰려든 무림인의 숫자가 어마어마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도전을 건네는 자가 없었다.
금분세수식을 보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온 자들은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때 뒤에서 나직한 음성이 모두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 오라버니들, 잠시 좀 지나갈게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그 음성을 듣지 못한 무림인은 없었다.
전설상의 전음으로 알려진 광역전성(廣域傳聲). 특정 지역에 있는 다수에게 동시에 소리를 전달하는 기술로, 이것에 대해 아는 자는 없었다.
찻집에서 여유를 즐기다가 온 듯 검후의 손은 찻잔을 움켜쥐고 있었다.
“검, 검후?”
“검후께서 나타났다!”
검후를 처음 본 무림인들은 감격에 차오른 모습이었다.
그녀가 지나가는 자리로 무림인들이 파도처럼 갈라지며 길을 터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바닥에 그어진 선을 넘어버렸다.
동시에 앵두 같은 입술이 왕휼의 귓가에 달콤한 한마디를 불어넣었다.
“어머, 넘어버렸네?”
“…….”
검후가 고개를 슬쩍 올리자 왕휼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것은 흡사 늑대가 맹호(猛虎)를 마주쳤을 때의 본능적인 몸부림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