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0화 (20/238)

20화 명색이 정파라는 것들이 (2)

푸우욱-!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살가죽을 파고드는 소리였다.

“큭!”

암습을 날린 현희는 재빨리 뒷걸음질 치며 물러섰다.

금강진인의 눈가에 핏대가 곤두섰다.

“네가 감히!”

평상시 같았으면 일초지적도 되지 않는 제자였지만, 지금은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이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급소를 피해냈다는 것 정도였다.

설상가상 뒤에서도 둔탁한 소음이 들려왔다.

투콱-!

유진산이 휘두른 창날이 독고성의 수급을 자르는 소리였다.

이어서 그는 손에 쥐고 있는 창을 어딘가로 있는 힘껏 내던졌다.

쐐에에엑-!

그곳에는 무방비 상태에 놓인 청성파의 장로가 주저앉아 있었다.

푸우욱-!

무림의 절대고수 두 명이 너무나도 허망하게 가버렸다. 검후에게 당한 극심한 부상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금강진인의 얼굴에는 허탈함만이 가득했다.

“……곧 있으면 맹주께서 오실 것이다. 너희들이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그가 현희의 정체를 알아챈 순간부터는 멈출 수가 없었다.

시체의 몸에서 창을 뽑아든 유진산은 죽립을 벗으며 그를 향해 터벅터벅 다가갔다.

“나를 알아보겠는가.”

상처를 움켜쥔 금강진인은 유진산을 바라보다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섬서제일창?”

“오랜만에 들어보는 별호로군. 무당파의 일대제자 창명. 아니 지금은 장로의 신분인가?”

지금으로부터 사십여 년 전. 둘은 무림맹의 마교 토벌대에서 함께 활동했던 사이였다.

강호를 은퇴하고 세월과 함께 늙어간 유진산과는 달리, 그는 꾸준한 연마를 통해 절대고수의 반열에 오른 차이가 있었다.

“……도대체 왜 우리를 공격한 것이오?”

유진산의 두 눈에 살기가 어렸다. 이유를 생각하자 감정이 복받쳐 오른 것이다.

“그럼 무림맹은 왜 유가장을 공격했는가? 무슨 연유로 나의 식솔들을 살해했는가!”

“그, 그 무슨 헛소리를.”

한번 떠보았을 뿐이었다. 아주 찰나였지만, 유진산은 금강진인의 눈빛이 흔들린 것을 보았다.

그 순간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그날의 참사와 무림맹이 무엇인가의 연결고리가 있음을.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여유롭게 추궁할 시간이 없었다. 무림맹주가 당도하면 모든 게 끝장이었으니.

“대답은 지옥에서 듣지.”

그가 내력을 끌어올리자 화룡신창의 끝부분이 화르르 타올랐다. 그것은 곧이어 금강진인의 가슴을 향해 맹렬히 쇄도했다.

부상만 아니었다면 손쉽게 막아낼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지켜보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푸우욱-!

“끅. 이렇게 어이없게…….”

유진산은 금강진인을 발로 걷어차며 창을 회수했다.

콰직-!

일을 마쳤으니 어서 이곳을 떠나야 했지만 자꾸 검후가 시야에 밟혔다.

이곳에 이대로 놔두고 간다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을 터. 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심을 굳힌 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일면식은 없지만, 이것도 인연이니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주겠소. 내키지 않으신다면 고개를 한번 끄덕여 주시오.”

가부좌를 튼 검후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을 모두 느끼고 있을 게 분명했다.

등 뒤에서 현희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운기행공 중이신 것 같은데, 건드려도 괜찮은 거예요?”

“문제없을 걸세. 경지에 오른 자들은 혈맥의 흐름이 자유로워, 어떤 자세에서도 운공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더군.”

어쩌면 검후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운공을 풀 수 있는 상태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왜 이러고 있는지 연유는 알 수 없었지만,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유진산은 조심스럽게 검후를 들어 어깨 위에 올렸다. 반대편 어깨에는 보따리가 매어져 있었으며, 등 뒤에는 손녀까지 업은 상태였다.

그때였다.

“……엄마.”

어느새 깨어난 유설이 고사리 같은 손을 내뻗어 검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엄, 엄마 아니다, 얘야. 함부로 손대지 마라.”

말려보아도 요지부동이었다. 유설은 마치 재밌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듯 배시시 웃으며 검후를 매만졌다.

유진산은 혹시라도 그녀의 심기가 불편해질까 봐 노심초사했지만, 일단 이곳부터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제가 앞장설게요, 할아버지!”

“그리하거라.”

검후와 손녀를 업은 유진산은 현희를 따라 정신없이 달렸다.

“어디로 가요?”

“양주산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것 같구나.”

“집으로 데려가시게요?”

“그럼 여기에 버려두고 갈까? 우린 선택을 했고,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어.”

유진산의 판단으로 검후는 위험한 인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집까지 가는 길에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만날 수도 있을 터. 그때는 기댈 곳이 없었기에 함께 이동하는 것이 더욱 안전한 상황이었다.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유진산과 현희는 저무는 노을의 위치를 방향 삼아 거친 산속을 헤집고 미친 듯이 나아갔다.

일식경이 지난 후에서야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이고, 죽겠구나.”

무리해서 경공을 펼친 터라 체력이 완전히 소진되어버렸다.

근육과 관절은 내공으로 보호하고 있었지만, 밀려드는 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조금만 힘내세요, 할아버지! 거의 다 왔어요!”

“대신 업어준다는 얘기는 죽어도 안 하는구나.”

이제야 현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경공을 멈추었다.

“앗! 죄송해요. 제가 업을게요!”

이미 목적지인 양주산이 코앞이었다. 일각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되었으니 너는 이만 산채로 돌아가거라.”

“할아버지네 집에서 좀 쉬다가 가면 안 돼요?”

검후를 좀 더 관찰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피곤이 극에 달한 유진산은 일거에 거절했다.

“이분께서 회복하시는 데 방해만 되니까 어서 돌아가! 그리고 나도 좀 쉬어야겠으니.”

“휴. 네, 할아버지. 그럼 내일 잠시 찾아뵐게요!”

그 말을 끝으로 현희는 산채가 있는 방향으로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거처에 도착한 유진산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선 검후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방 안에 눕혀주었다. 그러고는 마루로 나와 털썩 주저앉았다.

“휴. 두 번은 못 할 짓이로구나.”

그때 검후를 눕혀놓은 방에서 유설이 아장아장 걸어왔다.

“설이 맘마!”

벌써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육아에 쉴 틈이 어디 있겠는가.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며 반사적으로 보따리를 뒤졌다.

‘우리 며늘아기들이 이렇게 고생을 했었구나.’

잠시 후 손에 잡힌 주전부리 하나를 꺼내어 내밀어 보았다. 가늘게 자란 오이였다.

“시더.”

“오이 맛있어. 어서 먹어봐.”

“오이 시더!”

양팔까지 휘젓는 것을 보니 먹지 않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럼 어디 한번 굶어보아라. 배가 고파봐야 오이가 얼마나 맛있는 줄 알지.”

유설의 눈망울에 금세 물기가 차올랐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유진산은 허리를 움켜쥐고 일어났다.

“할아버지가 농담한 게다. 금방 고기죽을 끓여주마.”

고기라는 말을 알아들은 손녀는 손뼉을 부딪치며 좋아했다.

그렇게 몇 걸음을 걸었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크윽!”

갑자기 밀려드는 고통. 한동안 잠잠했던 뇌공환의 발작이 기어코 다시 찾아온 것이다.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고통에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유진산은 바닥에 쓰러진 채로 사지를 부들부들 떨었다.

“끄으악!”

할아버지가 아픈 것을 눈치챘기 때문일까? 유설이 다가와서 옷깃을 붙잡고 울음을 토해냈다.

“흐이잉.”

한참을 울어대던 유설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가느다란 오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오이를 할아버지의 입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하배 먹어!”

오이를 먹는다고 사라질 고통이 아니었다.

먹지 않으려고 했지만, 뿌리칠 힘이 없었다. 이미 입안에 오이가 한가득이었다.

“끄…….”

“하배 아파?”

쪼그려 앉은 유설이 할아버지의 이마에 손바닥을 올렸다. 평소 그가 자신에게 하던 행동을 흉내 내는 것이리라.

아픈 와중에도 손녀의 모습이 몹시 웃겼지만 미소 지을 힘조차 없었다. 그는 아이를 바라보며 오이를 악물고 버티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하~. 오랜만에 잘 잤다.”

방안에서 검후가 기지개를 켜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실제로 잠이 든 시간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지만, 실컷 자고 일어난 모습이었다. 그뿐 아니라 어느새 혈색까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상을 입었던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다가와 유설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귀여운 아가, 또 만났네?”

“……엄마.”

검후는 아기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가 아니고 언니라고 해야지. 언니 이름은 소소야. 너는 이름이 뭐니?”

“설이.”

“그래 설아. 너 근데 나랑 똑같구나?”

소소는 아이가 자신과 같은 체질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선음지체(仙音之體). 무예를 포함한 모든 분야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근골이었다.

강호에서 선음지체를 최고로 쳐주는 이유. 그것은 태생적으로 신선의 오감을 보유하여 깨달음을 얻기가 수월하다는 것에 있다. 이 말은 곧 높은 경지에 더욱 빠르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자질을 소유한 자는 하나같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으로 유명했다.

먼 옛날 무림을 공포에 떨게 한 전설적인 대마두 은화파파, 그리고 마교의 교주였던 옥화신녀 연설화가 대표적이었다.

어쨌거나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유설은 두 눈을 끔뻑이며 옹알거렸다.

“설이 똑같아.”

소소는 방긋 웃으며 아이를 한 번 안아주었다.

“너 정말 귀엽구나. 우리 일단은 할아버지부터 먼저 살펴볼까?”

유진산은 지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상태였다.

손녀 앞이라 기를 쓰고 신음을 참고 있을 뿐, 마치 전신의 뼈가 분쇄되는 것 같은 고통이 그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때 힘겨워하던 유진산의 동공이 갑자기 부릅떠졌다. 마치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듯 고통이 단번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

자신의 가슴 위에 백옥처럼 고운 손이 올려져 있었다.

“할아버지, 뭘 잘못 드신 거예요? 온몸에 독이 퍼져있네요.”

단번에 그의 상태를 파악한 소소였다.

잠시 후 그녀의 손등으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몸속에 퍼진 뇌공환의 독소가 빠져나오는 현상이었다.

유진산이 다급히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안돼…….’

이독제독(以毒制毒). 뇌공환을 복용한 이유는 머릿속에 자라나는 종양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검후의 내공에 의해 뇌공환의 독소는 순식간에 증발해 버리고야 말았다.

유진산이 낭패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머릿속에 이건 뭐에요? 이것 때문에 일부러 독을 복용하신 거예요?”

단번에 상황을 눈치챈 검후는 다시 유진산의 이마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 순간 찬란한 황금빛 휘광이 발현되며 곱게 펴진 손바닥을 휘감았다.

“무, 무엇을……?”

“가만히 있어 보세요. 움직이면 죽을지도 몰라요.”

곧이어 중후한 내공이 유진산의 머릿속으로 스며들며 종양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것을 눈치챈 그는 입을 다문 채 차분히 기다렸다. 머리 위에 잔뜩 올려진 돌무더기가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드는 내공의 물결. 그 앞에 유진산은 전율했다.

‘천하제일이란 말이 허언이 아니로구나. 세상에 어찌 이런 치료법을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검후가 아니라면 감히 시도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공은 둘째 치더라도 심력의 소모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천하제일이라는 그녀조차도 두 눈을 감고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각이 지난 후. 드디어 앵두처럼 가냘픈 입술에서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휴. 끝났다! 기분이 어때요?”

말해서 무엇하랴. 마치 이십 년은 젊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동안 지을 수 없었던 미소가 유진산의 얼굴에 활짝 피어올랐다.

“허허……. 이것 참. 이걸 어떻게 보답해드려야 할지.”

“할아버지도 저를 구하려고 했잖아요. 그리고 정말 놀라운 게 뭔지 알아요?”

유진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

“여기는 저와 인연이 있는 장소예요. 하나도 안 변했네.”

검후가 이곳을 알고 있다는 얘기는 정말 뜻밖이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은 이 집에 무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상태였고, 소유자가 무서운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짐을 싸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럼 이곳은…….”

“저랑 가까운 분이 주인이지만,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테니 편히 쓰세요.”

“고, 고맙소. 갈 곳이 없는 처지인지라.”

그녀는 집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유설을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이렇게 만난 건 운명이겠지? 언니가 설이한테도 선물을 하나 줘야겠구나.”

검후가 양손을 살며시 벌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알 수 없는 힘에 허공으로 붕 떠오른 유설은 재밌다는 듯 양팔을 팔딱거렸다.

“까르륵!”

옆에서는 유진산이 긴장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전혀 짐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