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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1화 (21/238)

21화 나와 무공을 교환하자 (1)

검후(劍后) 소소의 가슴 앞으로 유설이 붕 떠올랐다.

“내공이 상당한데? 게다가 벌써 환골탈태까지……. 무슨 일이 있었니?”

유설이 그것을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단지 허공에서 까르륵대며 좋아할 뿐이었다.

검후가 황금빛으로 물든 양손을 천천히 내밀자 기막(氣膜)이 형성되며 유설의 전신을 감쌌다.

지켜보던 유진산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 무엇을 하시려는 것이오?”

그녀가 아이를 해하려는 것이 아님은 알고 있었으나,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우주(宇宙)를 보여주려고 해요.”

그 순간 유설을 감싼 기의 장막이 암흑에 휩싸였다. 그 속에는 마치 별똥별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장관이 연출되고 있었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우주라니…….”

“만물의 근본이 되는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면,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소소가 말한 깨달음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한계를 초월하여 더 높은 존재가 되기 위한 요건이었다.

“하지만 두 살배기 아기가 무슨 깨달음을 얻는단 말이오.”

일평생 자신도 얻지 못한 우주의 깨달음을 두 살짜리 손녀가 얻게 된다니. 이 무슨 황당한 말인가. 유진산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려야 할지 고민했다.

우선은 검후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해 보였기에 조금만 더 지켜보기로 했다.

“태초의 순수함을 간직한 아기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느낄 수가 있답니다. 세상에 때가 묻기 시작할수록 그 길은 더욱 멀어지는 법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될 리가…….”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이 아이가 저와 같은 선음지체라는 걸.”

그때였다. 돌연 장막 속에 갇힌 유설의 머리 주변으로 화광(火光)이 드러났다.

그것은 마치 부처가 깨달음을 얻을 때 나타나는 광명(光明)의 웅장함과도 같았다.

“설마……?”

“성공했어요! 제 말이 맞죠?”

해맑게 웃는 그녀의 미소를 보고 그 누가 무림 제일고수라 생각하겠는가.

흔히들 검후를 상상하면 위엄이 가득한 모습을 떠올리지만, 실제로 본 그녀의 행동에는 조금의 권위조차 비치지 않았다.

유진산도 가식 없는 검후의 모습이 조금씩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성공이라 하셨소? 그럼 우리 손녀가…….”

“네. 할아버지는 처음 보죠? 화경에 접어드는 현상이에요.”

유진산은 입을 떡하고 벌렸다. 자신이 환청을 들은 것인지 착각마저 들었다.

화경(化境)이 무엇인가. 이 경지에 접어들면 한서가 불침하며, 진기의 흐름이 자유로워져 신체 능력과 감각이 초인의 수준에 접어들게 된다.

그야말로 무림의 십대고수나 그에 필적할 만한 절대자들 정도가 도달하는 경지였다.

“화, 화경이라니.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소?”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스스로 만들어낸 틀을 벗어내야 할아버지도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어요.”

유진산은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검후의 겉모습이 어려 보였지만, 내면은 화경 그 이상을 초월한 지고한 깨달음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기연과도 다름이 없었다.

유진산은 황금빛에 휩싸인 유설을 응시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의 현상을 설명해 주실 수 있겠소?”

“내공 한 점 없는 사람도 도를 깨우쳐 각성한다면 우화등선(羽化登仙)할 수가 있습니다. 하물며 태초의 순수함이 우주에서 깨달음을 얻어 화경(化境)에 이르는 것이 어찌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나는 일일까요?”

그녀의 말대로 화경의 단계를 무공의 경지로만 접근할 부분이 아니었다.

금수(禽獸)가 신수(神獸)가 되고, 번데기가 성충이 되어 날개를 펴듯, 유설도 뭔가를 느끼고 각성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간 것일 뿐이었다.

선음지체라는 특이체질과 검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어쨌거나 두 살배기 아이가 화경이라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다면 우리 손녀가 정말 큰 선물을 받았구려. 이걸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유설을 조심스럽게 안아든 소소는 다시 유진산에게 건네주며 방긋 웃어 보였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서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에 두지 마세요.”

“그럼……. 변변치는 않겠지만 음식이라도 좀 대접하게 해주시구려.”

소소는 옅은 미소로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오늘이 가기 전에 금분세수식을 마쳐야 하거든요.”

검후를 어찌 붙잡을 수 있겠는가. 유진산은 그녀가 떠나기 전에 가장 궁금했던 한 가지를 물어보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무림을 떠나려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소?”

절대자의 나이를 외모로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아무리 봐도 혈기가 왕성해 보이는 그녀가 벌써 은퇴를 한다는 게 의아하기만 했다.

“부모님을 찾아 서역으로 떠날 거예요. 몇 년 전 그곳으로 가신 두 분께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

검후를 키워낸 그들 또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인사들로 유진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그냥 조용히 떠나면 되지 않소? 굳이 왜 금분세수식을…….?”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전에 모든 은원관계를 정리하고 싶었어요. 그것이 강호의 도의(道義)니까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현 무림의 제일 고수가 말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무척 궁금했지만, 더는 그녀의 발길을 묶어둘 수가 없었다.

“……그럼 무운을 빌겠소이다.”

“네, 할아버지. 우리 살아서 또 봬요!”

소소는 유설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한 줄기 빛이 되어 멀어지는 경공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보기 드문 호협이로다.’

그녀가 이곳을 떠난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했다.

검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품속에 안긴 손녀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곤히 잠든 유설은 새근새근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나저나 우리 설이가 화경이라니.’

체외의 기(氣)가 갈무리된 반박귀진(返樸歸眞)의 상태를 이룬 것으로 보아 확실했다.

무림의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니, 누구도 지금의 상황을 믿지 않을 것이리라.

“우선 고기죽부터 끓여놔야겠구나.”

그는 유설을 방 안에 눕혀놓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죽을 끓이면서 검후와의 대화를 되새겨보았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또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새로운 경지에 도달할 정도의 소득은 아니었지만, 넘을 듯 말 듯한 무엇인가가 머릿속에 계속 아른거렸다.

그러나 급할 것은 없었다. 그동안 앓고 있던 지병이 사라져 버렸으니, 갑자기 요절할 걱정은 없어진 것이다.

유진산은 정성스럽게 국자를 휘저으며 각오를 다졌다.

‘계획대로 갈 것이다.’

첫 번째 목표가 환골탈태임은 변함이 없었다.

뼈와 살이 재구성된다면 어느 정도는 젊어질 수 있고, 전성기 때의 무공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가문의 복수를 위해 나아갈 계획이었다.

잠시 후 완성된 죽을 그릇에 담아 부엌 밖으로 가지고 나갔다.

“자, 고기죽 먹자! 우리 손녀, 어서 일어…….”

유진산은 말을 하다 말고 화들짝 놀라고야 말았다.

지붕 위에서 낯익은 아기가 뛰어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미떠.”

일 장이 넘는 높이가 아니던가. 손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경악했다.

“거, 거기 어떻게 올라갔어?”

“히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니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유설이 지면을 박차고 떠올랐다.

개구리처럼 엄청난 도약력 앞에 그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헙!?”

양팔을 벌린 것을 보니 자신이 마치 새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당황한 유진산은 밑에서 거리를 조절하며 가슴으로 손녀를 받아냈다.

쿵-!

“어이쿠, 큰일 날 뻔했구나. 위험하니 다신 올라가지 말거라.”

“시더~”

가슴팍에 안긴 유설은 어딘가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왼손에 들려 있는 뜨거운 죽그릇이었다.

일반적인 아기였다면 화상을 입을 정도의 온도였지만, 손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죽을 흡입했다.

“그렇게 먹으면 못써.”

다급히 아이를 떼어놓고는 입가에 묻은 죽을 소매로 닦아주었다.

유진산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후. 이거 앞으로가 걱정이로구나.’

손녀가 화경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마냥 좋아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점차 아이의 힘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날 터. 잘 키워낼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는 유설을 마루 맡에 앉혀놓고 평소처럼 죽을 떠먹여 주었다.

“천천히 먹거라.”

죽 그릇이 반 정도 비었을 때였다.

갑자기 손녀가 손을 내뻗으며 휘저었다. 아마도 숟가락을 달라는 몸짓인 듯했다.

“설이 꺼.”

“허허. 그래 네가 벌써 철이 들었구나.”

자기가 떠먹는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유진산은 망설임 없이 재빨리 건네줬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왔다.

어설픈 동작으로 죽을 뜬 유설은 숟가락을 위로 쭉 내밀었다.

“하배도 먹어.”

명백하게 떠먹여 주겠다는 의미였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숟가락을 내미는 모습이 기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헛. 허허허.”

오늘 하루의 고생이 모두 사라진 듯했다.

한 입을 물자 유설이 큰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마이쩌?”

어찌 맛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유진산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그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죽이구나.”

그렇게 세 번을 얻어먹었을 때였다.

“언니 와떠.”

“응? 언니라니?”

주변에는 아무도 없거늘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그때 유설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에 와떠.”

흑산도의 산채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그곳을 넋 놓고 바라보던 유진산은 흠칫했다. 먼 곳에서 현희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먼저 기척을 느꼈단 말인가?’

말도 안 될 정도로 발달한 유설의 기감(氣感) 능력에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할아버지!”

한달음에 다급히 달려왔는지 현희는 숨을 헉헉거리고 있었다.

“내일 온다더니 어쩐 일이야? 진정하고 얘기하거라. 숨넘어가겠구나.”

“검후 님은 어디 계세요?”

“떠났어.”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현희는 한 걸음을 휘청거렸다.

“하아…….”

“검후가 뭐가 그리 좋더냐. 너랑은 일면식도 없거늘.”

“저도 나중에 꼭 그분처럼 될 거거든요.”

유진산은 손녀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껄껄 웃었다.

“네가 검후가 되면, 나는 신선이 되겠구나. 산채 애들은 무공 성과가 좀 있더냐.”

“대부분 소청검법까지는 모두 익힌 상태예요.”

소청검법은 무당파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검법으로 기본기가 탄탄하고 익히기가 쉽다는 장점이 있다.

어설픈 무예만 익혔던 산적들이 명문 정파의 무공을 접했으니 눈이 뒤집혀 수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이구나. 너희들은 잠시도 수련을 게을리하면 안 돼.”

“왜요?”

“금분세수식도 끝났으니, 무당파에서 다시 이곳을 조사하러 올 수 있어. 네 사문이니까 더 잘 알 거 아닌가.”

“저는 이제 무당파의 도사가 아니에요, 할아버지.”

유진산은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됐군.”

“뭐가요?”

“나와 네 무공을 서로 한 가지씩 교환하는 것이 어떤가.”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에 현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무당파의 경신술을 알려준다면, 내 너에게 유가건곤장을 전수해주마.”

무당파의 무공은 검법에 특화되어있으며, 내공을 중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태극권과 같은 내가권법이 몇 가지 있긴 했지만, 장법에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었다.

이미 무당파의 무공 중 상당수를 산적들에게 전수하고 있는 마당에 거리낄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의 의도가 이해되지를 않았다.

“무당파의 경신법을요?”

유진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원하는 무공을 얘기했다.

“내 소문을 듣기로 무당파의 이대제자부터는 제운종을 수련한다더군.”

제운종(梯雲從). 구름을 타고 넘듯 허공에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무당파의 대표적인 경신법이다.

다만 내공의 소모가 크고 숙련도에 따라 그 위력이 천차만별이라, 실전에서 사용하려면 오랜 기간 연마가 필요하다.

이대제자 중 최고였던 현희도 아직은 흉내만 내는 정도에 불과했다.

“제운종을 왜요?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새로운 무공을 배우기엔 유진산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더군다나 경신법만큼 체력의 소모가 큰 기술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유진산이 직접 익힐 목적이 아니었기에 관계는 없었다.

그가 제운종을 원한 것은 단지 손녀가 지붕 위를 뛰어다니는 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아이가 배울 수 있도록 좀 도와줘.”

“생각처럼 쉬운 문제가 아니에요. 무당파의 내공심법을 먼저 익히지 않으면 제운종을 펼칠 수가 없어요.”

“내공심법은 걱정할 것 없어. 그런 따위에 얽매이는 경지는 이미 넘어섰으니.”

현희는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있었다.

“그런데 두 살짜리가 어떻게 경신법을 배워요?”

“검후와 같은 자질을 타고난 아이야.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어.”

“……설이가요?”

고개를 끄덕인 유진산은 손녀를 마루에 내려놓은 채 곧게 자란 나무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양손을 휘저으며 태극을 그리자 주변으로 시원한 바람이 회오리쳤다.

“그 대가로 네게 전수해줄 유가건곤장이다.”

잠시 후 붉은 기(氣)에 휩싸인 그의 손바닥이 나무의 정중앙을 강타했다.

쩌어어엉-!!!

나무가 부러질 듯 흔들리며 거세게 진동했다.

주변으로 작은 돌풍이 발생하며 근처의 나뭇잎을 비산시켰다.

굉장히 요란스러웠으나 정작 나무에는 작은 상처조차도 남지 않았다.

분명 겉으로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현희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굉장해요. 내부를 뒤흔들어 놓으니, 제대로 맞으면 금강불괴도 한 방에 무너지겠는걸요?”

“제대로 보았다. 우리 유가장의 장법은 부드러움으로 강맹함을 제압하는 데 있지. 자, 어떻게 하겠는가?”

현희의 입장에서도 손해 볼 게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해맑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내일부터 아침마다 올게요,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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