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올 것이 왔구나 (1)
기우이기를 바랐지만, 기어코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단신으로 왔다면 보통내기가 아닐 터. 지금의 체력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허나 이곳을 이렇게 떠난다면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최소한 환골탈태를 거쳐 무위를 되찾기 전까지는 양주산에 머무를 계획이었다.
무턱대고 떠돌이 생활을 하며 도망 다닌다는 것은 한창 성장할 손녀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무당파의 고수를 쓰러트릴 수만 있다면 다시 시간을 벌게 될 테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답이 없었다.
“어르신…….”
도움을 청하러 온 흑산도의 산적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유진산의 고민은 점차 깊어져 갔다.
청랑이 공격해왔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젊었을 때였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부딪쳤을 것이다. 그러나 손녀를 양육해야 하는 지금은 목숨을 함부로 던질 수가 없는 처지였다.
‘승산이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겠지.’
그래도 지금의 상황이 답답한 것은 변함이 없었다.
“이 미련한 놈들아, 그러게 내가 진작에 도망치라고 하지 않았더냐?”
산적은 그의 꾸짖음에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
일개 부하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흑산도가 양주산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풍호에게 따로 들은 바가 있었다. 그들이 선택한 길을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일단 산채로 가보자꾸나.”
“고맙습니다, 어르신!”
유진산은 보자기로 손녀를 등 뒤에 묶으며 말했다.
“아직 도와준다고는 안 했다. 노부 하나 죽는 건 상관없다만, 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리 손녀는 돌봐줄 사람이 없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르신께서 돌아가시면 제가…….”
유진산은 가보인 화룡신창을 움켜쥐고 자루로 그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뻐억-!
“아악!”
“이런 싹수없는 녀석. 아주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라.”
울상을 지은 산적은 엉덩이를 움켜쥐고 유진산을 뒤따랐다.
* * *
양주산 정상 부근 흑산도의 산채.
채주의 전각에는 지금 깊은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무당파의 도사를 죽이게 되었다? 정녕 제정신이란 말이오?”
항의하고 있는 인물은 비호채의 채주 월아성이었다.
흑산도의 채주인 풍호와는 경쟁자로서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단지 사고가 좀 있었을 뿐이오.”
“그 사고 때문에 애꿎은 내 부하들이 개죽음을 당했소.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짓을.”
풍호도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급한 불부터 끄고 봅시다. 곧 있으면 그가 이곳에 당도할 것이니.”
이곳에 찾아든 고수는 비산채고 흑산도고 할 것 없이 근방의 산적들을 모두 도륙하고 있었다.
오십 명을 웃돌았던 비산채는 고작 십수 명만이 남았으며, 흑산도 또한 순찰하던 자들부터 하나둘씩 죽어 나가는 상황이었다.
좋든 싫든 이제는 한배를 탄 운명이었다.
월아성은 분하다는 듯 이를 뿌드득 갈았다.
“내 오늘 죽는 한이 있어도 부하들의 복수를 해야겠소.”
“놈이 산채로 들어오면 모두 동시에 덮쳐봅시다.”
적의 적은 친구가 될 수도 있다고 했던가. 서로를 견제해오던 풍호와 월아성이 처음으로 의기투합했다.
그때 전각의 문이 열리며 호피를 걸친 여인이 나타났다.
정찰을 마치고 온 흑산도의 총관 현희였다.
“협성검이라는 별호를 가진 무당사검(武當四劍) 중 한 명입니다. 일대제자 중에서도 한 손에 드는 실력자이니, 우리 같은 자들은 떼로 덤벼도 못 당해요.”
웬 낯선 여인이 주저리주저리 잔소리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일까? 월아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풍호를 바라보았다.
“이 여인은 도대체 누구요? 채주의 전각을 허락도 없이 드나들다니, 흑산도의 간부는 아무나 할 수 있는가 보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희의 허리춤에서 검날이 벼락처럼 뽑혀 나왔다.
이어서 하늘로 치솟은 검끝이 서서히 내려서며 월아성의 목젖으로 향했다.
한눈에 보아도 산적 따위는 낼 수 없는 기품 있는 동작과 빠름이었다.
그녀는 최대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또박또박 물었다.
“여자라서 만만해 보여요? 한번 시험해 볼래요?”
객잔에서 보았던 검후의 모습을 흉내 낸 것이다.
표정이 굳어진 월아성은 한동안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풍호가 중재하고 나섰다.
“힘을 합쳐도 부족할 판에 우리가 검을 맞대면 어찌 강적과 맞설 수 있겠소? 총관도 어서 검을 거두어주시오.”
“흥!”
현희가 검을 내리자 풍호가 양쪽을 간략히 소개해주었다.
그녀의 정체를 듣게 된 월아성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좀 더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사소한 부분에 시간을 허비할 틈이 없었다.
“놈이 얼마나 강하오? 우리 셋이 협공하면 승산이 있겠소?”
“우리만으론 어림도 없어요. 그는 절정을 이룬 고수입니다.”
강호 초출부터 보유 내공이 십 년 수위를 밑도는 자들은 삼류로 분류되며, 산적들 대부분이 이에 속한다.
이후 반갑자의 내공을 기준으로 이류와 일류가 나뉘는데, 지금 이곳에서 머리를 맞대고 있는 세 명은 그 경계선에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일류의 수준을 넘어 절정으로 불리는 자들은 최소한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닌 노련한 고수임을 의미한다.
절정이야말로 일반적인 무인들이 이룰 수 있는 최종 경지나 마찬가지였다. 다음 단계인 화경(化境)은 오직 깨달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절대자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절정고수라니…….”
풍호와 월아성의 표정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산적들 따위가 당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장내가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러나 고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잠시 후 풍호가 정적을 깨고 현희를 바라보았다.
“좋은 수가 없겠습니까?”
“이런 경우에는 보통 진법으로 대응하는 것이 정석이에요. 그것도 안 된다면…….”
산적들이 무슨 진법이라는 말인가. 풍호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대했다.
“……?”
“우리한테는 할아버지가 있잖아요.”
확실히 유진산도 절정의 수준이었다. 전성기 시절에는 말이다.
단지 지금은 그러한 위력을 낼 수 있는 시간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 상황에서 그보다 더한 지원군은 없을 터였다.
“어르신께서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굳이 우리를 위해 싸워주실 리가…….”
“그래도 이웃 어른이잖아요. 이미 도움을 청했으니 기다려 봐요.”
일말의 기대는 있었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비호채의 월아성은 풍호를 재촉했다.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더는 여기서 무의미한 대화를 할 시간이 없소. 어서 놈을 맞을 준비나 합시다.”
“알겠습니다. 모든 망루에 궁수를 배치해 두었으니 시간은 좀 벌 수 있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콰아앙-!!
나무가 우지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메아리쳤다.
아무래도 가장 먼저 망루가 박살나고 있는 듯했다.
곧이어 침입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산채 곳곳에서 다급히 들려왔다.
풍호가 자신의 검을 챙겨 들며 전의를 다졌다.
“기세가 대단하군요. 놈이 도착했으니, 우리도 어서 나가봅시다.”
그때 머뭇거리던 현희가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어요.”
그녀가 겉에 걸치고 있던 호피를 벗어내자 풍호가 놀라 물었다.
“무엇을 하시려는 것이오?”
“제가 흑산도가 되었다는 사실은 모를 겁니다. 인질이 되어 방심을 유도해볼게요.”
“하지만…… 위험하지 않겠소?”
그녀는 이미 비장한 표정으로 내의에 단도를 숨기고 있었다.
풍호가 머뭇거리자 월아성이 그녀의 목에 검날을 들이대며 말했다.
“채주께서 내키지 않으면 내가 하겠소. 보아하니 연기도 어설프실 것 같고.”
“…….”
“머뭇거릴 시간 없으니 어서 앞장이나 서시오.”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콰앙-!
전각의 문이 열리며 풍호가 가장 먼저 튀어 나갔다.
그리고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하고야 말았다.
“이럴 수가…….”
온몸에 피칠을 한 무당파의 도사가 산채의 중심부에서 검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널브러진 부하들의 수가 이미 열 명이 넘었다.
사지가 멀쩡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하나같이 고통스럽게 죽어간 것이다.
팔십여 명에 이르는 산적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아무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협성검(俠性劍) 정현. 그는 몹시 분개하고 있었다.
“도대체…… 도대체 산적들 따위가 어찌 감히 무당의 검술을 익힌 것이더냐!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
그는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한 듯했다.
극대노한 정현의 모습에 산적들은 한 발자국씩 뒷걸음질 쳤다.
산채에 공포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순간, 어디선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년한테 배웠다.”
모두의 시선이 산채의 안쪽으로 향했다.
그곳에선 월아성이 현희의 목에 칼을 대고 다가오고 있었다.
내의차림의 그녀를 바라보는 정현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너는 이대제자 현희가 아니더냐.”
“정현 사숙…….”
“너 혼자만 살아남은 것이냐?”
“예…….”
정현은 말문을 닫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현희를 붙잡은 월아성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이년 뒈지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무기를 버려라.”
정현의 고개가 우측으로 살며시 기울어졌다. 무엇인가 각을 재는 듯 보였다.
잠시 후 그가 손에서 무기를 놓았다.
이대로 포기하려는 것일까? 예상외로 순순히 말을 따르는 모습에 월아성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맥없이 떨어져 내리는 검이 바닥에 닿는 순간. 지켜보던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움찔거렸다. 정현의 발등이 전광석화처럼 나아가며 손잡이 끝을 밀어 찼기 때문이다.
퍼억-!
방심을 유도한 기습이었다.
허공을 가르며 쇄도하는 검은 정확히 월아성의 미간을 향했다.
쐐에에엑-!
위협적인 공격이었지만, 월아성 또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현희를 겨눈 검날이 방향을 틀며 날아오는 검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카앙-!
성공적으로 방어한 기쁨도 잠시. 안도하던 월아성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정현이 앞발을 내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벼락같은 몸놀림이었다.
콰직-!
“크윽!”
무려 삼 장을 날아 나가떨어진 그를 풍호가 다가와 부축해주었다.
정현은 자신의 검을 회수하며 현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이 벌레 같은 것들에게 무공을 알려주었느냐?”
“죄송해요, 사숙. 너무 무서워서…….”
그녀가 말을 마치기 전에 정현의 손바닥이 먼저 움직였다.
쫘악-!
다짜고짜 따귀를 날린 그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살기 어린 눈빛으로 현희를 노려보았다.
“어찌 그런 미친 짓을 했단 말이더냐? 무당산으로 돌아가면 장문인과 사부의 앞에서 네 죄를 추궁할 것이다!”
“…….”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현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등 뒤로 이동했다.
그리고 흥분한 정현을 풍호와 월아성이 마주했다.
주변으로 산적들이 빽빽이 둘러쌌지만, 자신들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더욱 잘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 감히 무당의 무공을 넘본 죄를 묻겠다. 편히 죽을 생각들 마라.”
정현의 눈빛이 짙은 살기(殺氣)를 머금었다.
산적들 또한 물러설 곳이 없었다.
한데 뒤섞인 흑산도와 비산채의 무리들이 그를 겹겹이 포위하며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쥐 떼가 아무리 많다고 한들, 맹수를 당해낼 수는 없는 법. 모두의 눈빛에는 감출 수 없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너희들까지 개죽음당할 필요는 없으니 모두 물러나라.”
어깨로 검을 잡아당기는 풍호.
채주의 비장한 모습을 지켜보는 부하들은 속이 타들어갔다.
“채주님…….”
“만약 우리가 패한다면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살길을 찾아라. 저자의 경공이 아무리 빠르다고 한들 우리 모두를 어찌할 수는 없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풍호와 월아성은 어깨를 마주한 채 격돌을 준비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정현의 얼굴에는 가소롭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그는 왼손을 뒷짐 쥔 채 검을 앞으로 내뻗으며 중얼거렸다.
“지금부터 너희들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들인지 느끼게 해주마.”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풍호와 월아성이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타앗-!
그들이 격돌을 시작할 찰나.
그곳에서 이십여 장이 떨어진 나무 뒤에서 아이를 업은 한 노인이 눈빛을 빛내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사냥감을 지켜보며 기회를 노리는 맹수의 모습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