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올 것이 왔구나 (2)
콰아앙-!
굉음과 함께 풍호와 월아성이 동시에 나가떨어졌다.
“크윽!”
“컥!”
비틀거리며 자세를 잡는 둘의 얼굴엔 놀라움의 기색이 역력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그것은 마치 거대한 벽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무당파의 정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검을 내리깔았다.
“그따위 실력으로 어찌 내 사제와 사질들을 죽일 수 있었는가.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냐?”
이곳에서 실종된 무당파의 도사가 열 명이었다. 게다가 일대제자가 셋이나 포함되어있지 않았던가.
비록 그들 중 자신에게 비교될 만한 고수는 없었지만, 결코 산적들 따위에게 당할 전력이 아니었다.
흑산도의 채주 풍호가 핏물 섞인 침을 내뱉고는 씩 웃어 보였다.
“수작은 무슨 수작? 내가 목을 땄다니까.”
“어서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
명색이 산적들이었다. 말싸움에서만큼은 질 수가 없었다.
비호채의 채주인 월아성이 그를 다시 도발했다.
“지랄하고 있네. 네놈도 곧 곁으로 보내줄 테니 직접 만나서 물어봐. 어떻게 뒈졌는지.”
정현의 전신에서 숨 막히는 살기(殺氣)가 불타올랐다.
산적들 따위가 자신에게 맞서고 있다는 것조차 자존심이 상한다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에도 벌레처럼 입을 계속 놀릴 수 있는지 지켜보지. 쉽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말거라.”
고통스럽게 죽이겠다는 의미가 담긴 협박이었다.
기세에서 눌리면 끝장이었다. 월아성이 지지 않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대성일갈(大聲一喝)했다.
“산벌레는 밟아도 안 죽어, 이 새끼야!”
내키지는 않았지만, 선공만이 조금이라도 승률을 높이는 방법이었다. 수세에 몰리면 답이 없었다.
풍호와 월아성이 동시에 달려들자 정현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 순간 그가 움켜쥔 검날에 유백색의 기(氣)가 발현되며 아지랑이 쳤다.
검기(劍氣). 그것도 온전한 형태로 놀라운 수준이었다.
풍호와 월아성의 검날에서도 희미한 기류가 발현되었지만, 검기라 부르기에는 매우 불안정해 보였다.
카앙-!
서로가 검을 한 번씩 부딪칠 때마다 풍호와 월아성의 입에서 신음이 토해져 나왔다.
묵직한 내공의 차이에 손목이 부러질 것 같았으며, 내상이 중첩되어 갔다.
“크윽.”
“윽!”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 너무도 분명했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무당파의 도사가 마음만 먹었다면 이미 자신들은 바닥에 뒹굴고 있었을 것을.
그는 흡사 농락이라도 하듯 치명상을 입히지 않고 서서히 압박해오고 있었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절체절명의 순간. 돌연 정현의 등 뒤에서 한 가닥의 살기가 꿈틀댔다.
서걱-!
무언인가가 잘려나간 소리와 함께 정현의 신형이 일순간 휘청거렸다.
동시에 그의 미간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뒤에서 기습해온 자가 자신의 사질이었기 때문이다.
“네가 감히!”
현희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호기롭게 암습을 가했지만, 잘라낸 것은 오직 그가 입은 도복뿐이었다.
결코, 공격이 짧았던 것이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 그가 회피해낸 것이었다.
그녀는 두 명의 채주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단도를 움켜쥐었다.
“아쉽네요. 성공할 줄 알았는데.”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게 된 정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 지금 무어라 했느냐?”
“들었잖아요?”
그때 근처를 둘러싸고 있던 산적 중 한 명이 그녀를 불렀다.
“총관님, 검 받으세요!”
휘리리릭-!
허공에서 검을 낚아챈 현희는 망설임 없이 정현을 향해 겨누었다.
“……뭐, 뭐? 총관?”
황당함이 끝이 없었다. 무당의 이대제자가 산적패의 간부가 되어 있다니. 무당파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는 망신이었다.
“무당에 있는 것보단 좋던데요? 지금처럼 사숙의 눈치를 볼 일도 없고 말이죠.”
검을 움켜쥔 정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노가 극에 달한 것이리라.
“무당산으로 끌고 가겠다는 말은 없었던 것으로 하지.”
무당의 이대제자였던 현희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이겠다는 의미였다.
그녀를 포함한 세 명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정현과 마주 섰다.
상황은 조금도 희망적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손발조차 맞춰보지 않은 사이지 않은가. 협공이 제 위력을 발휘할지도 의문이었다.
이번엔 정현의 공격이 먼저 개시되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검 끝이 태극을 그리며 세 명의 전신을 동시에 휩쓸어갔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맹공에 세 명도 있는 힘을 다해 초식을 펼쳐냈다.
콰앙-!
“크윽!”
“컥!”
단 일 합에 세 명의 신형이 동시에 튕겨 나갔다.
그 순간 정현의 발이 보법을 밟으며, 가장 가까이 있던 월아성을 향해 쏜살같이 다가갔다. 연달아 이어진 맹격은 그가 홀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캉-!
단 한 번의 격돌에 그의 검이 튕겨 올라갔다.
그리고 훤히 드러난 그의 복부에 정현의 검날이 틀어박혔다.
푸욱-!
“끄헉!”
그가 쓰러지기도 전에 검을 회수한 정현은 다시 한번 보법을 밟았다. 다음 목표는 흑산도의 채주였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움직임이었다. 그의 신형이 십여 개의 잔상을 만들어내며 풍호를 향해 섬전처럼 다가섰다.
이어서 예기를 머금은 서늘한 검기가 그의 앞가슴을 향해 거침없이 쇄도했다.
자세조차 바로잡지 못한 풍호는 최후를 직감하고 이를 악다물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어디선가 한 줄기 돌풍이 빛살처럼 둘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쏴아아앙-!
눈 깜짝할 사이 모습을 드러낸 창날은 붉은빛을 머금고 있었다.
곧이어 검기(劍氣)와 창기(槍氣)가 격돌하며 거센 굉음을 토해냈다.
쩌엉-!
뒷걸음질 치는 정현. 그리고 그의 앞에서 한 노인이 창을 사선으로 꼬나쥐고 있었다.
“너희들의 상대가 아니니 모두 물러서거라.”
유진산의 등장에 주변을 둘러싼 산적들이 몹시 감격했다.
그의 존재는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 찾아온 광명과도 같았다.
“어, 어르신?”
“저, 저희를 도와주러 오신 겁니까?”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유진산은 눈물을 글썽거리는 산적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이놈의 정이 문제로구나…….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너무들 좋아하지 말거라.”
그러거나 말거나 산적들은 유진산을 이심전심으로 응원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정현이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 등 뒤에 아이를 업은 노인이 나타나 방해를 했으니 달가울 리가 없었다.
“사제와 사질들의 죽음에는 당신이 있었군.”
유진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마주 섰다.
“노부의 이름은 유진산이네. 요즘의 강호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싸우기 전에 이렇게 통성명을 하곤 했지.”
정현은 묵묵히 그를 탐색하고 있었다.
현역으로 활동하기에는 나이가 좀 많아 보였지만, 결코 산적에게서 볼 수 있는 풍채가 아니었다.
단정된 백발과 멋들어지게 기른 수염은 마치 신선과 같은 비범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등 뒤에는 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어깨 위로 얼굴을 삐죽 내밀고 웃고 있었다.
“협성검 정현. 지금 당신의 목을 거둬갈 이름이니 기억하시오.”
산적들을 대할 때와는 다소 다른 태도였다. 상대가 자격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협성검이라……. 멋진 별호로군.”
통성명을 마친 둘은 서로를 마주한 채 기수식을 취했다.
풍호의 지시에 둘러싸고 있던 산적들이 거리를 벌렸다. 도와준답시고 나섰다가 오히려 방해만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힘내십시오, 어르신!”
“반드시 이기실 겁니다!”
산적들의 응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유진산의 모든 신경은 한 자루의 창과 상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천천히 창을 잡아당기며 자세를 낮추는 그의 모습은 고요해 보였지만, 내심 놀라고 있는 상태였다. 느껴지는 정현의 무위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상대한 무당파의 도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반드시 삼 합 내에 승부를 봐야 한다.’
삼 합(三合). 지금의 체력으로 그가 절정의 움직임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이상으로 싸움이 길어진다면 승산이 없었다.
그때 한 줄기 바람이 둘 사이에 휘몰아치며 숨 막히는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휘이잉-!
유진산의 백발이 흩날리는 순간 그의 발끝이 지면을 박찼다.
상대도 지지 않겠다는 듯 마주 달려오며 검 끝으로 태극을 만들어냈다.
찰나의 순간 송곳처럼 변한 창끝이 태극의 중심을 강타했다.
쩌엉-!
정면충돌이었기에 양쪽 모두 충격이 작지 않았다.
서로 한 걸음씩을 밀려났지만, 호흡을 고를 틈이 없었다.
유진산은 이를 악물며 왼쪽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동시에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는 창날이 상대를 향해 맹렬히 쇄도했다.
쏴아아아앙-!
붉은 기류를 머금은 창날이 정현의 허리를 두 동강 낼 기세였지만, 그는 생각처럼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수십여 개의 잔상을 동반하며 다가오는 검은 가히 벼락같은 속도였다.
쩌엉-!!!
“윽.”
“크윽!”
서로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결투에서는 매 합을 겨룰 때마다 호흡을 고르며 다음 초식을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지금의 유진산에게는 숨을 들이켤 여유조차 없었다.
‘마지막이다!’
이번 일격에 모든 것을 걸어야만 했다.
가보인 화룡신창에 맺힌 붉은 창기(槍氣)가 화르르 타올랐다.
상대의 의도를 눈치챈 정현도 검을 어깨 위로 잡아당겼다.
정현의 검날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목격한 현희가 움찔거렸다. 일대제자에게만 전수되는 필살의 검법임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선 할아버지에게 경고를 해주고 싶었으나, 그럴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안 돼.’
그녀의 우려를 뒤로한 채 두 명의 신형이 전광석화처럼 맞물렸다.
콰앙-!
자석처럼 붙었다가 떨어진 둘은 동시에 비틀거렸다.
정현의 한쪽 어깨가 붉게 물들었다. 창기(槍氣)에 관통상을 입은 것이다.
그리고 유진산 또한 무사하지는 못했다. 길게 늘어트린 왼팔에는 쉼 없이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검기(劍氣)가 왼팔을 짓이기고 지나간 상처 때문이었다.
동수를 이룬 것이지만, 유진산의 얼굴은 결코 밝지 못했다. 왼팔을 다친 이상 한 손으로는 긴 장창을 휘두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설상가상 지금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정현이 쏜살같이 다가왔다.
쐐에에엑-!
바람을 가르며 다가오는 검기는 적중당하는 순간 즉사할 터였다.
유진산은 다급히 우측으로 상체를 비틀었다.
한 치 차이로 가슴 앞을 지나치는 검기(劍氣)에 가슴이 철렁해졌다.
파앙-!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피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대로는 답이 없었다. 무엇인가 방도를 떠올려야만 했다.
‘그 방법뿐이란 말인가.’
왼쪽으로 작은 빈틈을 보여주자 기다렸다는 듯이 살검(殺劍)이 파고 들어왔다.
육참골단(肉斬骨斷). 그가 택한 수법으로 상대에게 살을 내어주는 대신, 뼈를 끊는 방법이었다.
솟구쳐오른 검날이 그의 어깻죽지를 향해 맹렬히 다가왔다.
비록 왼쪽 어깨는 절단되겠지만, 그것을 대가로 마지막 기회를 노려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결과는 둘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꾸욱-!
벼락처럼 움직이던 정현의 검이 돌연 허공에서 정지했다.
이어서 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유진산의 어깨 위로 올라온 아이의 왼손. 그리고 고사리 같은 손가락이 자신의 검날을 움켜쥐고 있었다.
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자신의 검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현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뭐, 뭐야, 이거 왜 안 움직여?’
그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검을 회수하려 했지만, 흡사 검날이 만근의 바위틈에 끼기라도 한 듯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노인의 등 뒤에 업혀 있던 아이가 앙증맞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우리 하배 때찌해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