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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5화 (25/238)

25화 올 것이 왔구나 (3)

두 번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였다.

손녀가 정현의 검날을 붙잡고 있는 사이, 유진산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창을 놓았다.

당황한 정현은 검을 회수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아이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극도의 혼란에 빠진 그는 머릿속이 창백해졌다.

그사이 유진산의 손바닥이 반 바퀴를 회전하며 푸른빛을 머금었다.

유가건곤장(劉家乾坤掌) 사초식 일후섬타(一後閃打).

물살을 가르듯 나아간 손바닥이 그의 왼쪽 가슴을 후려쳤다.

쩌엉-!

“크헉!”

정현은 검을 놓치며 후방으로 튕겨 날아갔다.

무려 삼 장을 날아간 그는 넘어질 듯 휘청거리며 피를 토했다.

이 갑자가 훌쩍 넘는 유진산의 내공이 가득 담긴 일격이었다. 정통으로 맞았으니 중상을 당할 수밖에.

한숨을 돌린 유진산은 주변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구경만 할 거야? 젊은 놈들이 언제까지 노인을 부려먹으려고?”

그에게는 지금 일대일로 낭만적인 결투를 벌일 여유 따위는 없었다.

정신이 번쩍 든 흑산도의 채주 풍호가 궁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발사하라!”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이십여 명의 궁수가 동시에 활의 시위를 놓았다.

팟-! 파파팟-!

근거리에서 직사로 쏘아진 화살은 무시할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정현은 다급해졌다. 평상시 같았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손에는 무기조차 없었고, 극심한 부상에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다.

급기야 그는 무림인들이 가장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나려타곤(懶驢打滾)의 기술까지 사용하며 피해냈다.

데굴데굴 구르는 그의 주변으로 쉼 없이 화살 세례가 쏟아져 내렸다.

푹-! 푸푸푹-!

땅속에 틀어박힌 화살들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그의 몸에 적중한 화살은 단 한 대도 없었지만, 아무래도 관계는 없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한 공격이었으니.

검을 움켜쥔 풍호가 하체를 낮추며 소리쳤다.

“모두 동시에 공격하라!!”

그의 신호에 맞춰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산적들이 벌떼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수는 칠십 명을 훌쩍 넘어서 있었다.

“우와아아!!”

“와아아아아!!!”

다가오는 산적들을 바라보는 정현의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그것은 마치 지금의 상황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어이없이…….’

손에는 무기조차 없었고, 호흡조차 힘겨웠다.

그 순간 이곳에서 멀어져가는 유진산의 뒷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그때 등 뒤에 업혀 있던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크고 볼살이 통통한 귀여운 얼굴의 여자아이였다. 두 살이 조금 넘어 보이는 그 아이는 자신을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설마 반로환동한 무림의 절대고수였다는 말인가?’

반로환동(返老還童). 깨달음을 얻은 절대자가 아이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기이한 현상을 뜻한다.

그것 말고는 지금의 상황을 해석할 수가 없었다.

마음에 확신이 서자 억울함이 가득했던 그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 그렇게 수치스러운 죽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의 신형은 산적 떼로 이루어진 파도에 묻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 * *

한편 목적을 달성한 유진산은 바로 산채를 빠져 나왔다.

굳이 결과를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아이고, 죽겠구나. 고얀 녀석들, 노인을 이리도 부려먹다니.”

기다렸다는 듯이 등 뒤에서 유설의 옹알거림이 들려왔다.

“아고, 설이도 죽게떠.”

손녀가 아니었다면 오히려 자신이 당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이가 기특하여 등 뒤로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오른손은 창을 움켜쥐고 있었고, 왼팔은 상처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고했다, 우리 아가. 네가 할아버지를 살렸구나.”

“나 자해떠?”

“그럼! 아주 잘했지. 상으로 저녁에 고기죽을 끓여줘야겠구나.”

“히이~”

유설이 등 뒤에서 짧은 팔을 내뻗어 할아버지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고기를 먹는다는 말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잠시 후 거처에 도착한 유진산은 아이를 묶은 보자기를 풀고 마루 맡에 털썩 앉았다.

왼팔의 상처를 살펴보던 그는 표정이 몹시 어두워졌다.

‘이거 큰일이로구나.’

한눈에 보기에도 쉽게 치유될 만한 검상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잠시간의 고통이나 생활의 불편함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한 손으로 창을 어떻게 휘두를 수 있다는 말인가. 앞으로의 길이 막막하기만 했다.

“잠시 씻고 올 테니, 여기 가만히 있거라.”

유설은 이미 마루에 벌러덩 드러누워 있었다. 모처럼 힘도 쓰고, 바람도 선선하니 잠이 오는 모양이었다.

부엌에 들어온 유진산은 우선 손녀에게 먹일 죽부터 끓여놓았다.

이후 옷을 벗어내고 상처를 물로 씻어내자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신음이 나올 법도 하건만, 표정조차도 변하지 않았다. 이전에 겪어왔던 뇌공환의 발작에 비교한다면 이 정도는 우스울 정도였기 때문이다.

목욕을 마칠 때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할아버지!”

“어르신, 계십니까?”

이제는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흑산도의 산적들이리라. 상황이 정리되고 내려온 모양이었다.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오자, 풍호와 현희를 포함한 산적 다섯이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뭐하러 왔어? 바쁠 텐데.”

풍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고맙다는 인사도 올리지 못했는데, 먼저 떠나셔서요. 그리고 아까 다치신 것 같은데 걱정도 되고…….”

“신경 쓸 것 없어. 좀 쉬어야겠으니, 볼일 끝났으면 돌아들 가.”

그때 현희가 방긋 웃으며 챙겨온 보따리를 풀었다.

“약재들을 가져왔어요. 그러지 말고 잠시 좀 앉아보세요, 할아버지.”

금창약과 소독 효과가 뛰어난 약재들이 보였다.

치료라면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마루에서 아이가 자고 있으니, 깨지 않게 저쪽 원두막으로 가지.”

원두막에 걸터앉은 유진산은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 보였다.

한 치 이상이나 이어진 깊숙한 검상. 게다가 지혈을 했음에도 핏물이 마르지 않았다.

현희가 놀란 눈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프지 않으세요?”

“그동안 받았던 고통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때 뒤쪽에서 흰 두건을 둘러맨 산적 한 명이 약재를 들고 다가왔다.

풍호가 뒤에서 그를 소개해주었다.

“저희 산채에서 의술을 전담하고 있는 녀석입니다. 의가(醫家) 출신이라 솜씨가 꽤 괜찮아요.”

유진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왼팔을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팔을 살펴보던 의원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혹시……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없으신지요?”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힘들겠지?”

유진산은 이미 자신의 상태를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것일 뿐이었다.

“힘줄이 손상되었습니다.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앞으로는 창을…….”

심경이 착잡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걱정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약재를 바라보았다.

“신경 쓸 필요 없으니, 소독이나 빨리해주고 돌아들 가.”

“……예, 어르신.”

의원은 그의 상처를 정성스레 소독하고 봉합한 이후 금창약을 발라주었다. 그리고 깨끗한 천으로 팔을 묶어주고 나서야 치료를 끝마쳤다.

“수고했네. 솜씨가 꽤 그럴듯하군.”

“별거 아닙니다. 불편하신 데가 있으면 언제든 찾아주십시오.”

그가 물러가고 풍호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어르신. 그런데 이제 저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무당사검(武當四劍) 중 일인을 죽였으니, 무당파에서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무림맹에 소속된 거대 문파가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면 산적들 따위가 어찌 감당하겠는가.

풍호가 경험 많은 유진산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음에는 더 강한 놈들이 오겠지. 떼거리로 온다든지, 아니면 장로급이 직접 올 수도. 그들 앞에서 무슨 방법이 통하겠나.”

이미 현희를 통해 들은 바가 있었다.

비록 정현이 일대제자 중에서는 최상위급 실력자였지만, 무당파에는 그보다 더한 고수들이 수두룩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다음번에는 감당할 수 있는 자신이 없었다.

“고견이 있으시면 조언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가부좌를 튼 유진산은 지그시 하늘을 응시했다.

“곧 있으면 겨울이 올 것 같군. 살고 싶으면 다시 꽃이 피기 전에 모두 이곳을 떠나거라. 나도 그때는 이곳에 없을 게다.”

무당파의 위치는 호북성으로, 이곳에서 꽤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다.

그들이 정현의 실종을 확신하고 이곳으로 쳐들어올 시기는 아마도 봄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 정도는 풍호도 예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아시다시피 저희 식구들이 입이 좀 많습니다. 이 인원이 무턱대고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을 것입니다.”

“그동안 산적질 하면서 벌어 놓은 돈이 있을 거 아닌가?”

풍호는 어두운 안색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재산이 있었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말이 산적이지, 대부분의 생활이 자급자족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양민들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모아놓은 돈이 거의 없었다.

유진산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오늘만 보고 산다는 산적 놈들이 뭐가 그리 걱정이 많아? 겨울이 끝나기 전에 크게 한탕 해 먹고 도망치면 되는 것 아니더냐.”

“어르신도 아시다시피 저희가 털 수 있는 무림세력은 많지가 않습니다. 게다가 재력까지 갖춘 곳이라면…….”

“일을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니 어려운 게지. 먼저 주변의 세력들을 조사해서 가지고 와보거라. 적당한 목표가 있는지 알아보는 게 우선이니.”

풍호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렇다면 어르신도 함께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아직 결정하진 않았어.”

유진산도 이곳을 떠나기 위해 여비가 필요했던 터였다.

한몫 챙길 기회가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때 뒤에서 지켜보던 현희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할아버지와 함께하면 정말 든든할 것 같아요! 근방에서 어느 세력이 돈이 많은지 모두 조사해올게요.”

유진산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손짓을 했다.

“그래. 얘기들 끝났으면 어서들 돌아가. 좀 쉬어야겠으니.”

흑산도의 간부들은 거리를 벌리고는 고개를 숙여보였다.

“예, 어르신.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다음에 봬요, 할아버지!”

잠시 후 홀로 남겨진 유진산은 잠시 앉아서 바람을 쐬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가장 큰 고민은 왼팔의 부상이었다.

‘이 방법밖에는 없겠지.’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거처 앞에 세워둔 화룡신창과 태도를 챙겨 들었다.

‘급한 대로 이렇게라도 쓸 수밖에.’

그는 마당 어딘가에 있는 두 개의 돌덩이 사이에 화룡신창을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태도를 움켜쥐었다.

가보를 반으로 자르기 위해서였다.

창 자루야 나중에 다시 제작하면 그뿐. 우선 손에 익은 창을 한 손으로 휘두를 수 있는 길이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가 움켜쥔 태도의 날이 유백색의 광채를 머금으며 도기(刀氣)를 발산했다.

‘조상님들께서도 이해해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우리 가문의 생존을 위해서니.’

하나뿐인 가보를 자신의 손으로 가르는 마음이 어찌 편하겠는가.

잠시 후 날카로운 도기가 화룡신창의 창 자루를 가르고 지나갔다.

써컥-!

그는 깨끗하게 잘린 창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몇 번 휘둘러보았다.

휘익-! 휘익-!

“이 정도면 제법 쓸 만하겠구나. 남은 창대는 가늘게 다듬어서 우리 설이…….”

유진산은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끔뻑였다. 잘려나간 창 자루의 단면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창 자루 속에 비어있는 작은 공간. 그곳에 둘둘 말린 채로 삐져나온 것은 분명 양피지였다.

‘뭐지?’

끝을 조심스럽게 잡고 잡아당기자 양피지가 끊임없이 뽑혀 나왔다. 그리고 거기에는 깨알처럼 작은 글씨가 가득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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