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살풍창의 주인 (2)
유가건곤장 일초식 일파무흔(一破無痕).
“첫째는 정(靜)으로 동(動)을 제어하며,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파도를 밀쳐내듯 전면을 향해 뻗어 나가는 손바닥. 벼락처럼 빠른 일장은 산들바람을 만들어내며 유설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까르륵!”
손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유진산도 모처럼 힘이 났다.
비록 왼팔을 다쳤지만, 장법을 시연하는 것쯤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의 양손이 바삐 움직이며 원을 만들어내자, 주변의 낙엽이 그 안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동그랗게 모여든 낙엽은 손안에서 소용돌이치며 맹렬히 회전했다.
“사나운 용이 덤벼들거든 부드러움으로 얼굴을 때려주어라.”
휘젓던 양팔을 활짝 펼치자, 둥글게 회전하던 낙엽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유가건곤장 이초식 맹룡회안타(猛龍回顔打)였다.
온 세상이 낙엽으로 뒤덮인 듯한 광경에 유설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히이~.”
유가건곤장은 총 팔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전자의 내공과 숙련도에 따라 그 위력이 완전히 달라진다.
유진산은 가문에서 제일가는 건곤장의 달인이었으며, 이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근엄한 얼굴로 하나씩 시연을 해 보이던 그는 어느덧 마지막 초식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마지막은 상대의 힘을 이용해 실(實)을 흘려보내고, 허(虛)를 향해 되돌려주는 것이다.”
하늘 높이 끌어당긴 양손이 하강하며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그 순간 오른손이 돌풍과 함께 다시 솟구쳐 오르며 하늘을 찢어발겼다.
파앙-!
유가건곤장의 절초 건곤이격(乾坤理格)이었다.
시연을 모두 끝낸 그는 호흡을 몰아쉬었다. 모처럼 무리를 했더니 피로가 몰려온 것이다.
“또 해죠, 하배!”
손녀가 더 놀아달라고 눈빛을 빛내고 있었지만, 이미 체력이 바닥이었다.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다. 더 했다간 진짜 죽겠구나.”
유설의 얼굴에는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할아버지가 죽는다는 말에 더는 떼를 쓰지 않았다.
“…….”
오리처럼 입을 꾹 닫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보이기만 했다.
유진산은 흐뭇한 미소로 아이를 안아 들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늦었으니 오늘은 씻고 일찍 자자꾸나.”
그는 부엌에서 유설을 씻기고는 다시 방에 들어와 앉았다.
잠시 후 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가부좌를 틀었다.
한시도 내공 수련을 게을리할 수가 없었다.
유가심법에 따라 내기(內氣)를 일주천하자, 혈색이 돌아오며 피로가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는 운기조식을 하면서도 지금의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설이의 재능이 빛을 발하고 있구나. 무림사를 통틀어 이런 아이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이 정도라면 건곤장을 전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펼쳐질 상황 또한 가시밭길이었기에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생존과도 직결되는 문제가 아니던가. 어느 것 하나라도 허투루 할 수가 없었다.
‘내일부터는 운기조식과 내력의 운용법도 함께 가르쳐봐야겠구나.’
* * *
다시 한 달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 사이 유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진기의 흐름을 다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쉽게 풀어 알려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스스로가 여러 시도를 해보면서 깨닫고 이해한 것이다.
본디 혈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진기를 운용한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다. 운공의 흐름을 역행해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녀에게만큼은 해당하지 않는 일이었다. 진기의 흐름이 막힘이 없고 자유롭다는 화경의 신체가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아이의 성취도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일취월장했다.
“바람이 나무에 가서 쿵해쪄!”
잠시 한눈을 팔고 있던 유진산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응? 쿵하다니?”
“나무가 아야 해…….”
아이의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무심코 그곳을 바라보던 유진산은 화들짝 놀랐다.
일장이 떨어진 곳에 우뚝 솟은 아름드리나무. 그곳에 앙증맞은 손바닥 자국이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자신은 이런 무공을 아이에게 알려준 기억이 없었다.
“이, 이거 어떻게 했어?”
스스로 장풍(掌風)을 터득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유설은 입을 꾹 다문 채 개구리처럼 큰 눈을 끔뻑이고만 있었다. 본인도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리라.
‘벌써 기(氣)를 외부로 발출시킬 수 있다니…….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한둘이 아녔다.
그때 유설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물었다.
“또 해죠?”
“아, 아니다. 나중에 할아버지가 팔 나으면, 그때 제대로 가르쳐주마.”
아이에게 있어서 무공 수련은 곧 놀이였다.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를 어떻게 다 표현하겠는가. 게다가 무공을 펼칠 때마다 나타나는 자연의 변화는 언제나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하배, 새 되고 싶어?”
난데없이 새라니. 너무나도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무엇인가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기회만 된다면, 새가 되어서 한번 날아보고 싶구나. 근데 그건 왜 물…….”
유진산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떡하니 벌렸다. 갑자기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격, 격공섭물!?”
격공섭물(隔空攝物). 손을 대지 않고 사물을 움직이는 기술로, 중후한 내공이 없으면 시도조차 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타인의 신체를 움직인다는 것은 화경의 반열에 오른 절대자 정도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새 유진산의 발은 지면에서 일 장 가까이 떠오르고 있었다.
도대체 이런 건 언제 터득했단 말인가?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손녀가 양손을 내뻗으며 보조개를 피어 올리고 있었다.
“하배 재미떠?”
재밌을 리가 없지 않은가. 넋을 놓고 있던 그는 다급히 천근추(千斤錘)를 운용했다. 내공으로 자신의 무게를 증가시키는 기술이었다.
그의 무게가 천근처럼 무거워지며 다시 지면을 향해 서서히 하강했다.
손녀의 손길에서 벗어난 유진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까이 다가갔다. 이어서 바닥에 쪼그려 앉아 눈을 마주치고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설아. 위험하니 이런 건 다른 사람한테 사용하면 안 된다. 알았지?”
“알아떠.”
기특하게도 하지 말라는 건 토를 달지 않고 잘 듣고 있었다.
흐뭇한 미소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을 때였다.
돌연 어디선가에서 귀에 익은 메아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흑산도의 총관인 현희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방문 계획을 미리 알고 있던 터라 놀라지 않았다.
“자, 언니가 우리 설이 선물로 뭘 가져왔나 보러 가자.”
선물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순간 설이의 귀가 쫑긋거렸다.
자신이 좋아하는 단어는 기가 막히게 알아듣는 아이였다.
“설이 꺼?”
“오냐. 할아버지가 미리 부탁해놨다.”
입이 귓가에 걸린 유설은 무릎 언저리에서 양팔을 팔딱거리며 좋아했다.
“히이~. 언니 좋아.”
아이는 두더지처럼 코를 킁킁거리더니 앞장서서 달려나갔다.
분명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었지만, 그 속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아기의 모습을 한 선인(仙人)이 축지법을 쓴다면 이런 모습일까. 지켜보던 유진산의 얼굴엔 근심이 한가득했다.
“넘어지니까, 천천히 가거라!”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미 유설은 제운종까지 펼치며 앞을 가로막은 집을 뛰어넘고 있었다.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진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뒤따랐다.
‘아직 경공을 배우지 않은 상태인데, 어찌 저렇게 빠를 수 있다는 말인가.’
앞으로 경공을 가르쳐야 할지 고민이었다.
만약 아이가 경공과 보법을 본격적으로 익힌다면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손녀의 재능이 특출한 것은 분명 기쁜 일이지만, 좋아해야 하는 것이 맞는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좋게 생각하자. 앞으로 이 험한 세상을 무사히 살아 나가려면 강해지는 것이 최선이겠지.’
유일한 핏줄이라고는 자신밖에 없었다.
언제까지고 보호해줄 수도 없는 노릇. 마음 한편에 있는, 누구보다 강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두런두런 생각에 잠긴 사이 발걸음이 목적지에 당도했다.
손녀는 어느새 현희의 품에 안겨 까르륵거리고 있었다. 손에 움켜쥔 탕후루 때문이리라.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설이가 이렇게 간식을 좋아할 줄은 몰랐어요.”
산사나무 열매를 꼬치에 꿴 후 물엿을 묻혀 굳힌 간식이었다.
고양이처럼 맛있게 핥아 먹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미소가 절로 나왔다.
“허허. 산에서 달콤한 간식을 먹는 게 어찌 쉬운 일인가.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빈손으로 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팔은 좀 어떠세요?”
“이제 통증은 없어. 전에 같이 왔던 의원 녀석 실력이 꽤 괜찮더군.”
“그래도 불편하지 않으세요?”
생활에 불편함은 없었다. 창술을 펼칠 수는 없다는 것이 문제일 뿐.
만약 환골탈태가 일어난다면 팔은 회복될 수 있을 테지만, 그때까지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아. 헌데 어깨의 그 보따리는 뭔가.”
현희는 왼팔로 아이를 옮겨 안고는 우측 어깨에 메고 있던 보따리를 풀었다.
안에는 둘둘 말려진 종이 뭉치가 한가득 담겨있었다.
“이곳에서 반경 백 리 안에 존재하는 모든 세력을 조사해왔어요.”
예상대로였다.
겨울이 지나면 무당파에서 본격적인 움직임을 개시할 터.
그들이 또다시 쳐들어오기 전에 자본금을 마련하고 도망쳐야 했다. 그러기 위한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정보조사였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앉아서 얘기하는 게 좋겠군.”
“예, 할아버지.”
유진산과 현희는 원두막으로 올라가 마주 보고 앉았다.
종이 뭉텅이를 건네받은 유진산은 내용을 훑어보며 연신 감탄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군. 산적들이 어찌 이렇게 정보를 잘 정리해왔는가.”
정리는 물론이고 정보 수집능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세력별로 규모와 특징은 물론 주의할 점까지. 세부적인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현희가 뿌듯한 미소로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애들 대부분이 관군 출신이잖아요. 첩보병들도 꽤 있었대요.”
그러고 보니 채주 풍호에게 들은 기억이 있었다. 흑산도의 근본은 반군에서 이탈한 탈영부대였음을.
“어쨌거나 수고들 많았네.”
유진산은 대답을 하면서도 자료를 하나씩 살펴보고 있었다.
기회는 한 번뿐이었으며, 모두의 운명이 달린 일이었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한참이나 말문이 없자 현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에 드는 데가 없으세요?”
“우리에겐 비록 한 번의 약탈이지만, 그로 인해 어떤 자들은 평생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받을 수도 있겠지. 그 대상을 선택하는 일이 어찌 가벼울 수 있겠는가.”
“우리 채주님은 이유를 불문하고 할아버지가 정한 대로 따르겠다고 했어요.”
유진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차적으로 분류한 서류를 한곳으로 치웠다.
“이곳들은 우선 제외하겠네.”
표국이나 상단 등 상대적으로 약소한 세력들이었다.
동시에 가장 만만한 목표들이었기에 현희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왜요?”
“내 비록 협객은 아니지만, 협의에 어긋나는 일은 한 적이 없네. 선량하게 모은 자들의 재산은 약탈할 수 없어.”
“남은 곳 중에선 우리 능력으로 털 수 있는 데가 없을 텐데요?”
남은 종이는 여섯 장. 하나 같이 이름있는 흑도 문파이거나, 규모가 커서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뿐이었다.
고민 끝에 유진산이 선택한 종이에는 천룡상회란 이름이 적혀있었다.
현희가 조사해온 세력 중 가장 큰 자산을 보유한 곳으로, 그만큼 방비도 만만치 않을 터였다.
내용을 다시 훑어보던 유진산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고리대금업이 주요 사업이라……. 어떻게 이것만으로 세력을 이렇게 크게 불렸지?”
“조사할수록 못된 놈들이었어요.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수십 배로 불려 받는 건 다반사고, 뒤로는 인신매매까지 일삼는다고 해요.”
“그런 짓을 하고도 무사하다고?”
“관아에 상납하는 금액이 어마어마하대요. 게다가 화산파에서도 뒷배를 봐주고 있어서, 이 일대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어요.”
화산파라는 이름이 나오자 유진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산파에서 왜 이놈들의 뒷배를 봐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