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화산파가 왜 뒷배를 봐줘 (1)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산파가 어디인가. 도가 계열의 문파로 명색이 구파일방의 한 축이었다.
“그들이 뭐가 아쉬워 놈들의 뒷배를 봐준단 말인가?”
현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천룡상회의 회주가 화산파의 속가제자로 유명해요. 주기적으로 상납하는 금액이 어마어마하대요.”
“아무리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거늘, 정파의 협은 어디로 가고 어찌…….”
유진산은 말끝을 흐리며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피가 머리로 솟구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겉으로만 협의를 외치지, 실제로는 이해득실을 우선으로 따지잖아요. 거대 문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많이 필요할 테니까요.”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강호가 언제 이렇게 변했다는 말인가.
유진산이 활동하던 시대의 정파는 결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때의 강호에는 낭만이 있었고, 협의가 밑바탕이 되던 시절이었다.
마교가 몰락하고 경쟁상대가 없어졌기 때문일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자네가 몸담았던 문파도 그랬던가?”
“물론이에요. 누구든 후원금을 많이 내는 자는 손쉽게 무당파의 속가제자가 될 수 있었어요.”
유진산의 입에서는 안타깝다는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어쨌거나 우리가 천룡상회를 털게 된다면, 화산파의 자금 수급에 차질이 생기겠구나.”
“확실해요. 화산파의 자금 중 상당한 금액이 천룡상회에서 나온다는 얘기가 있어요.”
무당파에 이어서 화산파에도 원한을 사게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무엇이 더 두렵겠는가. 유진산은 물론이고 흑산도의 산적들도 더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이곳으로 결정했다. 이놈들의 재산은 강탈해도 마음이 무겁지 않겠어.”
“하지만 천룡상회는 무사들의 수만 이백 명이 넘어요. 그들 중 절반은 항시 장원에 대기하고 있고요.”
“우리의 목적은 그들과 전면전을 벌이는 게 아니야. 그들 전부를 상대할 필요는 없네.”
현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문제는 천룡상회의 총관이에요. 그의 무공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있어요.”
현재의 전력으로 절정고수를 상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앞서 겪어서 잘 알고 있었다.
무당파의 일대제자 한 명으로 인해 모두가 전멸할 뻔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다른 곳들도 만만한 곳은 없었다.
“대규모로 자금을 융통하는 곳이니 그 정도 고수 하나쯤은 있겠지. 방법을 생각해보자꾸나.”
“네, 할아버지. 근데 언제 시작할 거예요?”
“여유 부릴 때가 아니니 빠를수록 좋겠지. 그 전에 확인할 게 있어.”
“……?”
현희는 눈빛을 빛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 도대체 어떤 놈들인지.”
조사 내용만 가지고 일을 계획하기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더군다나 유혈사태가 벌어질 것이 불 보듯 뻔한 일.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마음이 편할 것만 같았다.
“마을에 다녀오시게요?”
“멀지 않은 곳이니, 금방 올 거야.”
“혹시 모르니 저도 같이 가드릴게요.”
유진산은 고개를 가로로 한 번 내저었다.
비록 한때는 곳곳에 수배 전단이 붙기도 했지만, 이미 이 년이 지난 일이었다. 이미 모두 사라지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가고 있었다. 검후의 은퇴식 때 직접 확인한 사실이었다.
가문을 습격하고 수배령을 내린 직접적인 흉수가 아니라면, 자신을 알아볼 수 있는 자는 없을 터였다.
“별일 없을 테니 자네는 산채로 돌아가 애들 무공 수련이나 좀 도와줘. 그게 더 중요한 일이니.”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래. 이틀 후 내가 산채로 찾아가겠네.”
* * *
진양현의 마을 어귀에 있는 이 층 구조의 아담한 전각.
입구에는 다장객잔(多張客棧)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반년 전만 해도 대낮엔 손님이 붐볐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정적만이 가득했다.
빗자루를 움켜쥔 점소이가 한숨을 내쉬며 주방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그냥 포기합시다. 이대로면 객잔만 넘어가는 게 아니라, 제 인생까지 종치게 생겼어요.”
주방을 쓸고 있던 나이 든 주방장이 미간을 좁히며 소리를 빽 질렀다.
“그 입 닥치지 못해? 내 목이 날아가는 한이 있어도 이 객잔은 절대 못 넘겨!”
“갈수록 빚만 늘어나는데 무슨 수로 갚으려고요? 지금이라도 객잔을 정리하고 남은 돈으로 뭔가 해볼 생각을 해야죠. 어제는 양씨 아저씨네 가게도 넘어갔대요.”
그 순간 주방장의 이마에 핏대가 곤두섰다.
고함을 지르려던 그는 의자에 털썩 앉아 호흡을 골랐다. 심호흡을 몇 번 하고서야 마음이 진정되었는지 혈색이 조금 가라앉았다.
“상두야. 우리 가문이 삼대에 걸쳐 이 객잔을 운영해오며, 떳떳하지 못한 일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어째서 우리가 쫓겨나야 한다는 말이냐. 그깟 빚이야 열심히 벌어서 갚으면 돼.”
점소이는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두들기며 물었다.
“어휴, 아버지. 장사를 못 하게 훼방 놓는데 무슨 수로 벌어서 갚아요? 이미 이자가 원금에 열 배까지 넘어갔다니까요!”
“이 녀석이 그래도?”
부자간의 싸움이 점차 거세질 찰나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들의 다툼이 단번에 증발해버렸다. 객잔의 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단정한 풍채의 노인과 도토리만 한 여자아이.
아마도 할아버지가 손녀를 데리고 산책이라도 나온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받은 손님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았기에 지금 상황이 어색하기만 했다.
“어, 어떻게 오셨습니까?”
“걸어서 왔네.”
“……예?
“그럼 손님한테 어떻게 왔냐고 물으면, 내가 뭐라고 답해줘야 하는가.”
“혹, 혹시 밖에서 못 들어오게 막는 자들이 없었는지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유진산도 잘 알고 있었다.
객잔의 벽면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두 명의 무사는 분명 자신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손님 안 받을 생각이면 어서 말하게.”
“…….”
그때 주방에서 주인장의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상두야. 어서 손님 모시지 않고 뭐 하는 게냐.”
“하, 하지만…….”
“어서!”
머리를 긁적이던 점소이는 주방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로 안내했다. 단골손님 등을 위한 특별한 귀빈석이었지만, 모든 곳이 텅텅 비어있었기에 가릴 필요가 없었다.
“이쪽에 앉으십시오. 음식은 무엇으로 주문해드릴까요?”
유진산은 맞은편에 손녀를 앉혀 놓고 지그시 바라보았다.
“우리 설이, 뭐 먹고 싶어?”
“꼬기.”
역시나 반사적으로 나오는 대답이었다.
쪼그만 게 아는 음식이 뭐가 있겠는가. 고기 아니면 죽이 전부였다.
“이보게 점소이. 혹시 고기가 들어가는 면 요리가 있는가?”
고기는 손녀에게 먹이고, 면발만 조금 뺏어 먹을 요령이었다. 무엇보다 입맛이 없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점소이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죄송하지만 오늘 반죽해놓은 재료가 없어서 면 요리는 어렵습니다.”
“음. 그럼 닭죽 한 그릇만 내어주시게.”
잠시 머뭇거리던 점소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어르신. 닭죽은 양이 좀 적은데요? 원래 이건 정식 요리도 아니라…….”
“나는 입맛이 없으니, 손녀 먹일 닭죽 한 그릇이면 충분하네. 혹시 하나만 시키면 문제라도 되는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점소이가 계속 머뭇거리자 주방에서 지켜보던 아비가 그를 불러들였다.
“상두야 잠시 이리 와보거라.”
“……?”
한달음에 달려간 점소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일 때였다.
돌연 바가지가 날아들며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콰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조각난 바가지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악! 왜 때려요, 아버지?”
“야 이놈아. 우리 다장객잔이 언제부터 주문을 가려서 받았어? 어르신이 그걸 몰라서 그렇게 주문했겠어?”
“저는 그런 의도가 아니라…….”
“어서 가서 사죄드리고 와!”
쭈뼛쭈뼛 다가온 상두는 양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렸다.
“저 어르신.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그런 의도는 아니었고, 혹시라도 양에 안 차실까 봐…….”
깍듯한 점소이의 모습에 지켜보던 유진산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허. 젊은 친구가 예의가 참 바르구만. 자네를 곤란하게 했으니 내가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우선 물부터 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일각이 지난 후.
주문했던 닭죽이 나오자, 유진산은 숟가락으로 떠서 손녀의 입에 조금씩 넣어주었다.
“얌~ 마이떠.”
“허허. 그래, 천천히 먹거라.”
기분이 좋아진 유설은 상 밑으로 내려온 다리를 흔들거렸다.
유진산은 손녀가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불렀다.
오늘 겪었던 일 때문에 입맛이 없어졌던 탓도 있었다.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들른 객잔이 바로 이곳이었다.
가는 곳마다 가관이었다. 마을의 모든 상권이 어떤 세력으로부터 통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보게 된 광경들은 결코, 유쾌한 모습들이 아니었다.
“하배는 왜 안 먹어?”
“할아버지는 배가 부르니 설이 많이 먹거라. 다음에는 더 맛있는 거 사주마.”
“히이~ 좋아.”
유진산은 뿌듯한 미소로 열심히 손녀에게 죽을 떠먹였다.
그러던 중 왠지 뒤통수가 따가워 뒤를 돌아본 그는 화들짝 놀랐다.
점소이가 자신과 손녀를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돈이 없어서 못 먹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아니, 저 녀석이?’
유진산은 한마디 해주려다가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나쁜 의도가 없었으니 굳이 뭐라 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점소이보다 더욱 신경 쓰이는 소리가 있었다.
주방에서 들려오는 훌쩍이는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슬며시 부엌을 바라보니 주인장이 눈물을 흘리며 무언가를 조리하고 있었다.
‘설마?’
그의 예상은 빗나가질 않았다.
잠시 후 눈이 퉁퉁 부은 주인장이 접시 두 개를 가지고 나왔다.
“저 어르신, 이것 좀 드셔보시지요.”
돼지고기를 간장에 조린 경장육사와 오리탕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다 먹지도 못할 만큼 많은 양이었다.
“나는 닭죽 말고 다른 음식은 주문하지 않았네.”
“……이건 그냥 드리는 겁니다. 계산은 안 하셔도 되니까 마음껏 드세요.”
주인장은 쑥스럽다는 듯 대답도 듣지 않고 등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유진산은 마음이 따듯해짐을 느끼고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아직까진 세상이 살 만하구만.’
주인장의 성의를 봐서 맛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리탕을 한입 떠먹어보니 맛이 기가 막혔다.
어느새 유설도 아기새처럼 입을 최대한 크게 벌리고 있었다.
“아~~”
입속에 국물을 넣어주자마자 배시시 웃는 걸 보니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모처럼 푸짐한 식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돌연 객잔 밖에서 신경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이 새끼들 왜 여기서 자빠져 자고 있어?”
이어서 따귀를 날리는 소리가 몇 번 들려왔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천룡상회의 무사들이 찾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요? 아무래도 기절한 것 같아요.”
“도대체 누구한테 당한 거야? 너넨 여기서 잠시 기다려.”
객잔의 문이 벌컥 열리며 허리에 박도를 찬 무사가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산적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험상궂게 생긴 얼굴이었다.
“너 이리 안 와?”
점소이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예? 왜, 왜요?”
그를 향해 눈알을 부라리던 무사는 유진산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 봐라? 손님도 받았네?”
유진산은 묵묵히 손녀에게 음식을 먹이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무사가 점소이에게 다가가 정강이를 걷어차기 전까지는 말이다.
콰직-!
“아악!”
그 순간 입을 벌리고 있던 유설의 맑은 눈동자가 무사를 향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