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화산파가 왜 뒷배를 봐줘 (2)
“아이도 있는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는가.”
유진산이 등 뒤로 내뱉은 한마디였다.
천룡상회의 무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 이 노인네가 미쳤나.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유진산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만. 아이 앞에서 한 번 더 험한 소리를 하면 참지 않겠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객잔의 주방장과 점소이는 식은땀을 흘렸다. 공포에 질려 온몸이 굳어버린 듯했다.
무사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근처의 식탁에서 빈 접시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렇군. 밖에 우리 애들을 공격한 게 네놈 짓이었어.”
잠시 후 접시가 그의 손을 빠져나오며 유진산의 뒷덜미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휘리릭-!
팽이처럼 회전하는 접시는 내기를 머금고 있었기에, 암기나 다름이 없었다.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유진산 또한 뒤에서 다가오는 접시를 기(氣)의 흐름으로 느끼고 있었다. 적정한 거리에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할 요령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상황은 그의 예측을 완전히 벗어났다.
유진산은 물론 암습을 가한 무사까지 화들짝 놀랐다. 맹렬히 쇄도하던 접시가 돌연 허공에서 정지했기 때문이다.
“……?”
그 순간 등 뒤에서 경악하는 무사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격……. 격, 격공섭물?”
유진산은 은밀히 손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등 뒤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틀림없이 유설의 짓이었지만, 등 뒤의 무사가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자신도 할 수 없는 격공섭물을 도토리만 한 아이가 했으리라고 어찌 상상하겠는가.
유진산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한번 말해 보아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기가 어렸던 무사의 눈빛이 토끼처럼 변했다.
그는 노인이 등 뒤로 격공섭물을 펼쳐 다가오는 접시를 멈췄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최소한 절대고수의 반열일 터.
그렇다면 천룡상회에서 감당할 수 있는 고수가 아니었다.
“죽,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최소한 천룡상회의 무사 중 조장급 이상은 되는 인물이었다.
일류의 실력을 갖춘 그가 난생처음으로 목숨을 구걸하고 있는 것이다.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강호의 섭리 앞에 자존심은 무의미했다.
“우선 어르신을 공경할 줄 모르는 네놈의 싹수부터 좀 고쳐주마.”
유진산이 눈짓을 보내자 점소이가 엉거주춤 유설의 시야를 차단했다.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접시가 떨어져 내렸지만, 아무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유진산의 손바닥이 그의 따귀를 날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쫘아악-! 쫘아악-!
“끄…….”
천룡상회의 무사는 얼굴이 퉁퉁 불어터지면서도 신음을 참고 있었다. 유진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였다.
교육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손녀를 생각해서 유진산이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한 것이다.
“네놈의 패악질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양민이 고통받았을지 상상도 안 가는구나.”
“살, 살려만 주신다면 착실히 살겠습니다.”
그 말을 믿을 유진산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거짓말이리라. 말과는 달리 그의 눈빛에는 개과천선의 기색이 담겨있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요절을 내고 싶었지만, 그리한다면 이 객잔이 대신 화를 입을 수도 있을 터.
이번엔 적당한 선에서 보내줘야만 했다.
“운이 좋구나. 오늘은 날이 좋아서 살려주는 게다. 허나 또다시 노부의 눈에 띈다면 그땐 죽여 달라고 빌게 해줄 것이다.”
“고, 고맙습니다, 어르신.”
그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치며 객잔을 빠져나가려 할 때였다.
“잠깐.”
“……?”
유진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향해 왼손을 내밀었다.
“그냥은 못 가지. 가진 돈을 다 내놓거라.”
“……예?”
무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착각마저 들었다.
신선처럼 점잖은 모습으로 돈을 갈취하려 하다니. 게다가 하필 오늘이 수금 날이었기에 적지 않은 돈을 지참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다 못해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마치 꿈만 같았다.
‘빌어먹을. 강호의 은거기인들은 성격이 괴팍하여 종잡을 수 없다더니, 이거 제대로 걸렸구나.’
유진산은 그의 속내를 아랑곳하지 않고 독촉했다.
“네놈의 목숨값이니 어서 결정하거라. 노부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어이가 없었지만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품속에서 재빨리 전낭을 꺼내 유진산에게 내밀었다.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고, 고맙습니다!”
“볼일 끝났으면 어서 눈앞에서 사라져.”
무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빨리 객잔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는 다리가 풀린다는 듯 벽면에 기대어 호흡을 골랐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이 몰려들었다.
“형님, 어찌 된 일입니까?”
“얼굴은 왜 그러세요?”
그는 소매로 입가의 핏물을 닦아내며 이를 갈았다.
“웬 미친 마두(魔頭)한테 당했다. 내가 날린 암기를 등 뒤로 격공섭물을 시전하여 막았어.”
“예? 그런 고수가 저 안에 있다는 말입니까?”
얼굴이 퉁퉁 불어터진 무사는 치를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악하기가 보통이 아니야. 사람의 탈을 쓴 뱀인 줄 알았다. 아마도 몰락한 마교의 은퇴 고수 같아.”
“고작 한 명이면 애들 모아 와서 덮치죠?”
“미친 짓거리 하지 마. 우리 같은 자들은 떼거리로 와도…….”
그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갑자기 객잔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접시가 깨지고 식탁이 부수어지는 소리였다.
“마두가 안에서 깽판을 부리는 모양입니다.”
“확실해. 엮여봐야 좋을 것 없으니, 불똥 튀기 전에 일단 철수한다.”
“예, 형님.”
그들이 사라지고 난 뒤.
객잔 안에서 들려오던 소란스러운 굉음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안에서는 점소이가 유설의 눈과 귀를 막고 있었다.
부서진 식탁 몇 개와 함몰된 벽면까지. 객잔 내부는 난장판이 된 모습이었다.
“너무 섭섭해 하지 마시게. 이렇게 해놔야 자네들이 무사할 수 있네.”
“…….”
객잔의 주인장은 양손을 모은 채 눈만 끔뻑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유진산이 무사에게 빼앗은 전낭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투욱-!
“은자 가치로 여덟 냥쯤 되는 것 같더군. 이 정도면 수리비로는 충분하겠지.”
은자 한 냥이면 한 가정이 반년은 생활할 수 있는 큰돈이다.
여덟 냥이면 수리비가 문제가 아니라 횡재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이 큰돈을 저희가 어찌…….”
“천룡상회에서 조사가 나오면, 내게 핍박을 받았다고 말하시게. 그래야 무사할 수 있을 테니. 노부는 지금 이 마을을 떠날 것이니 신경쓸 것 없네.”
유진산은 그 말을 끝으로 손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자, 할아버지랑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집에 가기 시더.”
모처럼 만의 외출이 끝나는 것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소란을 피운 이상 더 머무르는 것은 위험부담이 있었다.
주방장과 점소이 부자는 멀어져 가는 그의 뒤를 향해 공손히 포권했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그럼 살펴 가십시오.”
아이를 안고 객잔을 나가는 유진산은 잠시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선한 일을 하다 보면 때론 화가 복으로 바뀌기도 하는 법이지. 당장은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인내해 보시게. 좋은 소식이 있을 테니.”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긴 그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 * *
양주산 정상 부근 흑산도의 산채.
높게 둘러싸인 목책의 입구로 아이를 등에 업은 노인이 들어서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유진산을 알아본 산적들이 두 다리를 붙이고 인사를 건넸다. 기합이 바짝 들어간 모습이었다.
“채주는 안에 계시는가?”
“예, 어르신께서 오시면 바로 모시라 하셨습니다.”
흑산도의 산적들은 자신들의 대장인 채주보다 유진산을 상급자로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몇 번이나 자신들을 구해주었기 때문이리라.
유진산은 안내를 받아 곧장 채주의 전각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채주와 총관을 포함하여 흑산도의 간부들이 전부 모여있었다.
그들이 동시에 일어서서 포권을 건넸다.
“오셨습니까, 어르신.”
“고생하셨습니다, 할아버지.”
고개를 끄덕인 유진산은 빈자리에 앉으며 손녀를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마침 다들 모여있었군.”
풍호가 찻잔을 채워 그에게 내밀었다.
“예. 가신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시장을 돌아보며 나름대로 조사해보았네. 무고한 양민들의 피를 빨아 부를 축적하는 못된 세력이더군.”
“그럼 결정을 내리셨는지요?”
유진산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천룡상회로 결정했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풍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종이 한 장을 그에게 내밀었다.
장원의 구조가 그려진 약도로 금고의 예상 위치와 병력 배치 등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 상세하진 않았지만, 작전을 논의하기에는 쓸 만한 수준이었다.
“저희도 그동안 조사를 좀 더 해두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가장 주의해야 할 인물은 총관 양충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 사군자라 불리는 네 명의 일류고수가 있습니다.”
유진산은 아까 객잔에서 만났던 녀석의 복장에 새겨진 매화 문양을 기억해냈다. 아마 그놈도 사군자 중 일인인 듯했다.
“사군자라. 하는 짓은 왈패만도 못한 주제에 이름은 거창하구만.”
풍호는 겨우 웃음을 참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사군자의 휘하로는 각기 오십 명의 무사가 배정되어 있으며, 밤낮을 교대로 절반의 인원이 장원에 상주하고 있답니다.”
“그게 전부인가?”
“예. 그래도 우리만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전력입니다.”
유진산은 찻잔을 들어 손녀의 입에 차를 넣어주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뒤에는 화산파도 버티고 있지. 정면승부를 벌인다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겠군.”
“좋은 방도가 있겠습니까?”
유진산은 현희를 한 번 바라보며 말했다.
“상황이 불리하니 우리가 가진 모든 걸 사용해야겠지. 이이제이를 써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이제이(以夷制夷). 적을 이용하여 다른 적을 제어한다는 뜻이다.
그의 뜻을 눈치챈 풍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무당파를 이용하겠다는 말씀입니까?”
“맞네. 만약 무당파가 천룡상회를 공격한다면, 화산파와의 마찰을 피할 수 없겠지. 그 틈에 우린 어부지리를 노릴 수 있고.”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유진산은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는 듯 거침없이 말했다.
“이곳 아이들은 현희 총관에게 무당파의 검술을 배우지 않았는가. 우선 몇 명을 가려 뽑아 무당파의 도사로 변장하고, 천룡상회의 무사들을 습격할 것이네.”
“그럼 천룡상회에서 화산파에 지원을 요청하겠군요?”
“그렇겠지. 천룡상회 따위가 무당파에 맞설 수는 없을 테니. 더군다나 화산파와 무당파는 최근 관계가 그리 좋지 못하니 그 점을 이용할 수 있네.”
몇 년 전 화산에서 열린 후기지수들의 비무대회.
당시 무당파의 제자가 화산파의 제자를 실수로 죽인 사건이 있었다. 그 뒤로 두 문파의 사이가 어색해졌다는 일화는 유명했다.
그 점을 이용해 앞서 해치운 무당파 도사들의 소품을 화산 근처에 뿌려 혼란을 주고, 시간을 벌지 않았던가.
“그다음은요?”
“화산파 녀석들이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무당파의 도사들을 찾아다니지 않겠는가. 그때부터가 가장 중요하네.”
유진산은 그 뒤로도 반각에 걸쳐 다음 계획을 설명해나갔다.
그의 대답을 듣던 풍호는 감탄했는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찌 이런 계책을……. 정말 대단하십니다.”
“생존이 달린 일인데 조금 비겁하면 어떤가. 어쨌거나 적정한 시점에서 그동안 실종사로 여겨졌던 무당파의 이대제자가 등장하는 게지.”
“그 한 명이 바로……?”
현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각오를 다졌다.
“맡겨만 주세요. 제가 흑산도의 총관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테니까요.”
계획은 그럴싸했지만,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좋은 곳으로 떠난 우리 막내 며늘아기처럼 똑 부러져서 마음에 드는군. 우선 자네는 서신을 하나 작성해줘야겠네. 시기적절하게 무당파의 고수들을 불러들여야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