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밥값은 해주셔야지 (2)
진양나루터.
황하를 끼고 있는 이곳은 하루에도 수십 척의 상선이 드나들고 있다.
누구든 이곳에서 배를 띄우려면 천룡상회에 적지 않은 돈을 수고비로 지급해야 한다.
물품의 적재와 하역을 도와준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상은 시늉도 하지 않았다. 말이 좋아 수고비지, 협박을 통한 갈취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상단들로부터 수금한 금액 중 일정한 비중을 지방관아에 전달하고 있었기에, 관군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나루터는 천룡상회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꿀단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말이다.
“파락호들이 상인들을 갈취하는 것을 어찌 두고 본단 말이오?”
무당파의 도복을 입은 일곱 명의 무림인들이었다. 그들의 주위로는 천룡상회의 무사들이 십수 명이나 쓰러져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중재하기 위해 찾아온 화산파의 도사 두 명이 그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몰아붙이실 필요까진 없지 않소. 진정들 하시고, 저희가 수습할 터이니 맡겨주시지요.”
화산파의 도사가 사근사근 얘기하고 있었지만, 무당파는 전혀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화산이 언제부터 왈패들의 대변을 맡았소? 이들과 무슨 관계인지 밝히시오.”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에 두 명의 도사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천룡상회의 주인이 화산파의 속가제자이니, 남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의 내부적인 일이니, 대협들께서는 물러가 주시지요.”
본디 거대 문파간에 분쟁이 일어나면 서로가 회피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고, 윗선에서 해결하도록 유도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법. 혈기왕성한 젊은 무림인들, 그것도 양측의 배분이 비슷한 상황에서는 그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더군다나 작정하고 온 이상에야 사고는 필연적이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무당파로 변장한 산적들이 거침없이 입담을 털어냈다.
“왈패들이랑 한패거리란 말이네.”
“무림맹의 수치네요. 같은 도사들이란 게 부끄러워요, 사형들.”
“그러게. 이름만 정파지, 하는 짓은 쓰레기잖아?”
여러 상단을 포함하여 뱃사람들까지. 어느새 수백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이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구경꾼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는 하나같이 무당파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한순간에 파락호로 전락해버린 화산파의 도사들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 지금 뭐라 하셨소? 이렇게 도발을 하시고도 감당할 수 있겠소?”
풍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코웃음을 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러분! 제 말이 틀렸습니까?”
몰려든 인파는 눈치만 살살 보고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동조하면서도, 괜히 나섰다가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정적을 깨고 어디선가 노인의 고함이 들려왔다.
“왈패들의 뒷배를 봐주는 놈들이 있으면, 왈패보다 더 나쁜 놈들이지! 하는 짓이 시체를 파먹고 다니는 까마귀들 같구나!”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죽립을 깊게 눌러쓴 행인이 인파의 틈새에서 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때 그의 품에 안겨있던 아이가 호흡을 맞춰 까마귀 흉내를 내었다.
“까마귀? 꺄아악~. 꺄아악~.”
둘의 정체는 유진산과 그의 손녀였다.
웃음이 나올 법한 상황이었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용기를 얻었기 때문일까? 주변의 상인들이 화산파를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화산파가 양민들을 보호해주지 못할망정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다고?”
“도대체 화산파의 정의는 어디로 간 것이오?”
“당신들이 더 나빠!”
화산파의 도사들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여론이 조성되자마자 누군가가 행동을 개시했다.
방심한 도사들의 틈새로 파고든 현희의 기습공격. 검집을 움켜쥔 그녀의 신형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그들의 다리를 가격했다.
퍼억-! 콰직-!
“크악!”
“큭!”
갑작스러운 기습에 화산파의 도사들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무당파의 응징이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발길질에 둘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퍼억-! 퍽-! 퍽-!
“그냥 죽어!”
“이런 벌레 같은 것들.”
도를 수련한다는 도인들치고는 입이 좀 험했지만, 그것을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크윽!”
“크하악!!”
두들겨 맞는 화산파의 도사들은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마치 꿈만 같았다.
육체적인 고통 따위가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만천하가 보는 앞에서 파락호로 매도되어 구타를 당하다니. 바닥으로 떨어진 화산파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눈가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내렸다.
잠시 후 둘의 신형이 축 늘어지자 현희가 손을 털며 풍호를 바라보았다.
“사형. 이쯤이면 정신 차렸겠죠?”
“그런 것 같군.”
“배고픈데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요.”
볼일을 마쳤다는 듯 유유자적 사라지는 무당파의 일곱 도사들.
마치 처음부터 이것이 목적이었다는 것처럼, 그들은 천룡상회에 더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구경꾼들도 불똥이 튈라, 너나 할 것 없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남겨진 것은 바닥을 뒹구는 천룡상회의 무사들과 화산파의 도사 두 명뿐이었다.
잠시 후 일단의 무리가 달려오며 자리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형님, 어서 일어나십시오.”
천룡회의 조장급 인사가 검지로 한쪽을 가리켰다.
“나는 괜찮으니, 저분들부터 빨리 모셔!”
화산파가 우선이었다.
그들을 부축하기 위해 다가가던 무사들은 순간 겁을 먹고 주춤거렸다. 도사들이 두 주먹을 움켜쥐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핏줄이 터졌는지 붉게 충혈된 두 눈은 공포를 한층 더했다. 한눈에 보아도 맞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참을 수 없는 분노 때문이리라.
뼛속까지 사무친 원한이 빠른 속도로 그들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이빨을 갈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조금만 기다려라. 반드시 갚아줄 테니.”
* * *
유진산과 흑산도의 정예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이들이 모인 곳은 마을에서 가장 중심부에 있는 객잔이었다.
어느새 모두가 무당파의 도복을 벗고 있었다. 건을 풀고 머리를 풀어 젖힌 모습은 조금전까지 도사로 변장했던 자들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들은 객잔 삼 층의 구석에 자리를 잡고 축제를 만끽했다.
“하하하! 정말 대단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재밌었어요. 우리 흑산도가 화산파를 이기다니.”
“그래도 아까는 사실 엄청 무서웠다고요.”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올라 있었다.
그때 채주 풍호가 유진산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르신, 이제 뭘 해야 하는 겁니까?”
그는 흐뭇한 미소로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네. 식사가 끝나면 바로 마을을 벗어나 몸을 사리고 있으시게.”
“정말 그들이 움직일까요?”
“자존심이 강한 화산파가 이번 사건을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내 짐작대로라면 오래 걸리지 않을 걸세.”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약속장소에서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식사가 끝난 후 풍호는 부하들을 데리고 은밀히 마을을 빠져나갔다.
객잔에 남겨진 것은 유진산과 손녀 유설. 그리고 현희뿐이었다.
이들은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객잔 밖을 나서지 않았다. 객잔의 창문으로 밖을 염탐하며 때를 기다렸다.
어느 순간 잠든 유설을 무릎 위로 안고 있는 현희가 하품을 하며 물었다.
“그래도 최소한 며칠은 걸리지 않을까요?”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그렇겠지.”
화산과 인접한 이 마을은, 마음만 먹는다면 경공으로 두 시진이면 왕복할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오랜 시간 경공을 쉬지 않고 펼친다는 것은 곤욕스러운 일이기에, 단번에 움직이는 경우가 없었다.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유진산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노을이 질 때쯤 진양현의 거리에 살기(殺氣)를 띤 그림자가 안개처럼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현희의 검지가 창문 밖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저기…….”
무려 아홉 명이나 되는 화산파의 도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도복에 새겨진 문양으로 보아 대부분이 일대제자들이었다.
젊고 혈기왕성한 이대제자들과는 달리, 일대제자는 경험이 많은 중년의 고수들이 대다수였으며 문파의 핵심 전력이었다. 그들이 직접 움직였다는 것은 작정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 중 가장 배분이 높아 보이는 자가 씩씩대며 성을 냈다.
“어디야!? 아직도 못 찾았어?”
“사질들이 찾아다니고 있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대사형.”
“위치 확인되면 즉시 나한테 보고해.”
눈이 뒤집힌 그에게 다른 일대제자들이 쩔쩔매고 있었다.
성질만큼이나 무공 또한 대단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때 다른 일대제자 한 명이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타이르듯 말했다.
“일단 좀 진정하시지요, 대사형. 장문인께 보고도 드리지 않고 무작정 내려와서 무당파랑 싸울 수는 없잖아요? 뒷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요? 원로님들을 통해 문파끼리 대화로 해결하는 게 원칙…….”
그는 말을 마칠 수 없었다.
대사형이라 불린 자의 손이 섬전처럼 움직이며 그의 목을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꽈악-!
“크윽…….”
살기 어린 그의 눈빛에 다른 일대제자들이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책임은 내가 질 거니까, 그 입 좀 닥치고 있어. 알았어?”
“예…….”
“너희들도 가서 찾아. 무당파 놈들, 오늘 안에 전부 잡아다가 때려죽일 테니까.”
대사형인 그가 격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화산의 자존심이 짓밟힘을 당했다. 그것도 자신들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말이다.
뒷감당은 나중이었다. 도저히 같은 무림맹이라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한편 객잔의 삼 층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대사형이라는 자가 저렇게 성질이 더러우니, 문파의 앞날이 뻔히 보이는구나.”
“그래도 실력만큼은 대단한 자예요. 무림에서의 명성도 꽤 높은 편이고요.”
“하지만 드러난 무공 실력과 명성이 꼭 명줄과 비례하는 것도 아니지. 무림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감정에 지배당하지 말고, 고요해야 하는 법이네.”
“네, 할아버지. 좋은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화산파의 도사들이 곳곳을 이 잡듯 뒤지고 다녔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이미 흑산도의 산적들이 산채로 복귀하였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데도 약이 바짝 오른 그들은 포기할 줄을 몰랐다. 급기야 천룡상회의 무사들도 모조리 동원하기 시작했다.
유진산과 현희가 머문 객잔에도 몇 차례나 들락날락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온 평범한 일가족의 모습처럼 보일 뿐이었다.
특히나 붉은색 두건을 단정히 눌러쓰고, 얼굴에 분칠을 한 현희의 모습은 정말 감쪽같았다.
“정말 화가 많이 났나 봐요. 우리를 이 잡듯이 찾아다니네요.”
“그렇겠지. 오늘 일은 화산파의 역사에서 손에 꼽을 망신이었을 테니.”
“이제 어쩌죠?”
창밖을 지그시 응시하던 유진산이 나직이 되물었다.
“무당에서 불러들인 도사들이 어디에 머무르고 있다고 했지?”
“강양촌입니다. 이곳에서 일식경이면 충분히 갈 수 있어요.”
잠시 고민하던 그가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때가 무르익었으니 지금 불러오면 되겠구나.”
“알겠습니다. 금방 다녀올게요, 할아버지.”
“그래. 모쪼록 조심하거라. 도착하기 전에 도사복을 착용하고, 분칠을 지우는 것도 잊지 말고…….”
현희는 잠든 아이를 조심스럽게 건네며 방긋 웃어 보였다.
“잘할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약속 장소에서 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