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그래, 끝장을 보자 (1)
강양촌에 도착한 현희는 호흡을 골랐다.
평소 긴장을 잘 하지 않는 그녀도 이 순간만큼은 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감정에 몰입하기 위해 눈을 감고 심호흡을 계속했다. 유진산이 일러준 대로 거짓을 연기해야 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마음에 준비가 되자 그녀는 눈을 뜨고 모퉁이를 돌았다.
“……?”
예상대로 무당파의 도사들이 집결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두 명 중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일대제자였다.
그리고 항렬이 가장 높아 보이는 노인은 무당파의 장로 중 한 명인 무허였다. 이런 거물급 인사까지 함께 왔을 줄은 현희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녀는 다짜고짜 그에게 달려가 주저앉고 흐느꼈다.
“……흐흑. 흐흐흑.”
진중한 표정으로 현희를 둘러싸는 무당파의 도사들. 그중 문파의 어른인 무허 장로가 그녀를 토닥였다.
“일 년이 넘은 것 같구나. 그동안 실종된 너희를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를 게다.”
“흐흑. 모두 죽었습니다. 사형제들과 사숙님들까지 모두…….”
무당파의 도사들이 동시에 안타깝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겠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어서 얘기해보아라.”
“저희는…… 살해당한 것입니다.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치욕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끄흐흑.”
무당파의 도사들은 누군지 모를 흉수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무허 장로 또한 진정되지 않는지 목소리가 깊게 잠겼다.
“네 서신을 받고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만, 기어코 사달이 난 모양이로구나. 누구냐……. 그 아이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한 놈들이 누군지 어서 고하여라.”
적지 않은 무당파의 제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었다. 흉수가 누구든 마음 같아선 당장에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눈물을 닦아낸 현희는 잠시 안정을 취하려는 듯 몇 번 호흡을 크게 들이마셨다.
일대제자들과 무허 장로도 차분히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당시…… 산적을 토벌한 후 진양현에 머물던 저희는 천룡상회와 시비가 있었습니다. 이후 야밤에 기습을 받았는데, 저 혼자 살아남아…… 지금껏 감금되어 있다가 겨우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럴싸해 보이는 거짓이었으나, 상대는 단번에 속일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무허 장로가 눈빛을 빛내며 하나씩 질문을 건넸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구나. 허나 그곳을 탈출했으면 바로 사문으로 달려와야지, 어찌 사람을 시켜 서신만 보냈느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탈출한 제가 빠져나갈 수 없도록 마을 입구를 틀어막고 감시하고 있었으니까요……. 지금도 겨우 빠져나온 것입니다.”
가서 확인해보면 알게 될 일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진양현의 마을 입구가 무림인들에게 통제되고 있는지 말이다.
가장 궁금했던 의문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천룡상회라니? 아무리 방심했다고 한들, 그 아이들이 그런 삼류 세력에게 어찌 맥없이 당했다는 말이냐?”
더군다나 협성검(俠性劍) 정현까지 보내지 않았던가. 다른 제자들은 몰라도 무당사검 중 한 명인 정현만큼은 결코 쉽게 쓰러질 실력이 아니었다.
“천룡상회의 뒤에…… 화산파가 있었습니다.”
무허 장로를 포함하여 일대제자들이 동시에 흠칫했다.
도무지 말이 되질 않았지만,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근방에서는 화산파를 제외하고는 그런 능력을 지닌 세력이 없었으니까.
그때 일대제자 한 명이 무허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사백님. 현희 사질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천룡상회는 화산파의 중요한 자금줄입니다.”
무허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떠다니는 구름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엔 깊은 고민이 담겨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묻겠다. 화산파가…… 화산파가 정녕 우리 아이들을 공격했단 말이더냐?”
현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예……. 제자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말씀드리겠습니까?”
무허는 크게 한 번 호흡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긴 숨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경직된 얼굴과 이글거리는 눈동자. 온화하게 보였던 그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앞장서거라. 진양현으로 간다.”
“예, 장로님.”
현희를 포함한 무당파의 고수들은 곧장 진양현으로 달렸다.
경공을 펼친다면 일식경 안에 도착하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 도착한 순간 그들의 심증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마을 입구를 통제하고 있는 열 명의 무사들. 복장에 천룡(天龍)이란 문구가 각인되어 있는 것을 보면 틀림없었다.
앞서 현희가 전달했던 말과 정확히 일치했다.
“저자들이 천룡상회의 하수인들입니다.”
현희도 더는 숨을 이유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무리를 이탈한 그녀가 그들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그때 그녀를 먼저 발견한 천룡상회의 무사들이 갑자기 호각을 불기 시작했다.
“찾았다!”
“무당파의 도사년이 여깄어!”
소란스럽게 몰려드는 천룡상회의 무사들.
잠시 후 현희를 바라보던 그들의 두 눈이 점차 공포에 질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로 분노에 휩싸인 무당파의 고수들이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당파의 정예들인 그들은 앞서 마주쳤던 도사들과 기세 자체가 달랐다.
“무당파의 도사년이라 했느냐……. 네까짓 놈들이 감히!”
무허 장로의 전신에서 소름 돋는 기(氣)가 돌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파앙-!
그와 마주하고 있던 무사들은 온몸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장로님.”
무허의 두 눈에 살기가 맺혔다.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한 명이면 충분하다.”
“알겠습니다.”
한 명만 빼고 다 죽이라는 얘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더는 참기 힘들었던 무당파의 일대제자들이었다.
동시에 열 한 명의 도사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마치 한 몸을 연상케 하는 일률적인 움직임. 그리고 전광석화같이 빠른 몸놀림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찰나의 순간 무사들의 코앞까지 당도한 그들은 동시에 살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푸욱-!
“컥!”
“크윽!”
전혀 싸움이 되지 않는 수준 차이.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마치 처형식을 방불케 한 전투는 시작과 동시에 바로 끝이 나 버렸다.
어느새 살아 있는 무사는 단 한 명만이 남아있었다.
그를 향해 무허 장로가 무서운 얼굴로 천천히 다가갔다.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는 것이 네게 이로울 것이다.”
“…….”
공포에 잠식당한 그는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마을에 화산파 녀석들이 함께 있느냐?”
“……맞습니다.”
다시 한번 무허의 입에서 탄식이 뒤섞인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우려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네놈을 보내줄 터이니, 모두 이곳으로 불러오너라.”
“……예?”
천룡상회의 무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분노에 휩싸인 무허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마을에 있는 화산파 녀석들을 모두 불러오라 했다!”
“알, 알겠습니다!”
보내준다는데 망설일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최후의 생존자인 그는 어딘가를 향해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쳤다.
무허를 포함한 무당파의 일대제자들은 넓은 공터에 자리를 잡고 그들을 기다렸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기에 거리에 행인이 많지 않았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산의 정예라는 매화검수 일곱 명을 마주할 수 있었다. 마을에 더 많은 사형제들이 흩어져 있었지만, 급한 대로 최정예만 소집하여 몰려온 것이다.
선두에서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인물은 화산파의 대제자 청수였다.
평상시 같았으면 배분이 높은 정파의 웃어른에게 인사부터 했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독기만이 가득했다.
“장로께서 중재하신다고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저희도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무허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릎 꿇고 사죄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판국에 도리어 성을 내다니.
안면이 있던 사이였지만 그것이 무허를 극대노하게 만들었다.
“네, 이놈!! 일말의 자비를 베풀어 전후사정을 들어주려 했거늘, 어찌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나온단 말이냐!!”
“이놈이라 하지 마십시오.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무허의 오른손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아무도 그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본 사람이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 그의 손바닥은 청수의 뺨을 후려치고 있었다.
짜악-!
내공이 실려 있던 일격이었기에 쓰러져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청수는 상체를 휘청거리면서도 두 다리만큼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버티고 나오자 무허의 오른손이 다시 한번 움직였다.
눈으로조차 쫓기 힘든 가공스러운 속도. 모두가 청수가 쓰러질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터업-!
어느새 무허의 팔목을 청수가 움켜쥐고 있었다. 막아낸 것이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빨을 드러낸 그는 무허의 눈을 노려봤다. 여차하면 반격하겠다는 태세였다.
“감히 막아?”
“…….”
비록 문파는 다를지언정 무림맹이라는 연합단체로 결속된 관계였다.
이러한 하극상은 쉽게 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화산파와 무당파의 도사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댔다.
도저히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두 번 얘기하지 않겠다. 지금 이 손을 놓지 않는다면, 너와 네 사제들까지 모두 이 자리에서 죽는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에 모두가 말없이 마른침만 꼴깍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한 호흡이 더 지난 후.
무허를 노려보던 청수가 잡고 있던 그의 손목을 놓았다.
청수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고 한들 원로 고수를 쉽게 당해낼 수는 없는 법.
그는 일언반구도 없이 신경질적으로 등을 돌렸다. 그의 사제들 또한 경직된 얼굴로 묵묵히 청수의 뒤를 따라 사라져갔다.
그때 무당파의 제자 중 한 명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무허에게 다가갔다.
“사백님, 저 녀석을 그냥 보내줄 겁니까? 이번 기회에 본때를 보여줘서 확실히 기강을 잡아야 합니다.”
잠시 고민하던 무허는 고개를 한 번 내저었다.
“고작 저 아이들을 건드려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내일 화산으로 간다. 장문인을 직접 만나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대사형이란 놈이 저렇게 나올 정도면, 대화가 통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나온다면 남은 것은 전면전밖에 없겠지.”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무당산으로 돌아가 원로원을 소집할 계획이었다.
무당의 일대제자들은 분노를 삭이며 마을의 중심부로 진입했다.
잠시 후 그들의 시야에 삼 층 구조의 객잔이 잡혔다.
“사백님. 저 객잔에서 하루를 머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하는 것이 좋겠구나. 좀 쉬고 날이 밝는 대로 출발하자꾸나.”
* * *
진양현의 중심가.
깊은 밤인데도 늦게까지 술장사를 하는 노점식당 몇 군데가 남아있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우리 화산이 호구로 보였나 보네.”
삼삼오오 모인 화산의 제자들.
그들의 얼굴엔 참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사질들을 폭행한 것도 모자라 대사형의 따귀를 날려?”
“빌어먹을 무당파 놈들. 예전 비무대회 사건으로 앙심을 품고 있는 게 분명하다니까요?”
“장로만 같이 안 왔어도 다 때려눕히는 건데.”
그들은 몹시 억울했다.
비록 무당파를 험담하며 마을을 소란스럽게 한 것은 분명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 제공은 그들에게 있었다.
하루 사이 두 번이나 험한 꼴을 당한 그들의 심정은 활화산과도 같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술 한 잔에 의지하며 분을 삭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취기가 오르면 감정이 격해지는 법.
하나둘씩 불만의 목소리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나는 도저히 못 참겠어.”
“우리도 웃어른을 모셔와야죠. 급을 맞춰야 복수를 해줄 것 아닙니까?”
“대사형이 결정할 문제야. 장문인은커녕 장로님들한테도 얘기 안 하고 내려왔잖아. 지금 와서 사실대로 보고하기도 애매하고.”
“그럼 이렇게 넘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조금 기다려봐. 청수 사형 성격 잘 알잖아.”
탁상에 머리를 맞댄 네 명의 일대제자가 한탄을 하고 있을 때였다.
모퉁이에서 이대제자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사숙님들, 청수 사백께서 지금 즉시 모이시랍니다!”
“대사형이? 왜?”
“제가 아는 것은 그것뿐이에요. 천룡상회의 무사들도 전부 집결하고 있어요.”
화산파의 제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서며 검집을 움켜쥐었다.
“무당파 놈들, 오늘 전부 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