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그래, 끝장을 보자 (3)
천룡상회의 총관 양충.
그는 마치 헛것을 보고 있다는 듯 두 눈이 부릅떠졌다. 두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의 질주를 두 눈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경공은 아닌데 마치 축지법을 쓰듯 엄청나게 빨랐다.
목표는 자신의 반대편에 있는 노인이리라.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절호의 기회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달리는 아이를 낚아채기 위해 자세를 낮추며 왼손을 내뻗었다.
휘이익-!
반월을 그리며 나아가는 왼팔. 그리고 손가락이 아이의 몸을 낚아채는 그 순간이었다.
돌연 앙증맞은 유설의 발이 지면을 튕기며 용수철처럼 떠올랐다.
폴짝-!
양충은 자신의 왼팔 위로 튕겨 오르는 아이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손을 피했다고?’
단순히 피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아이는 어느새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었다.
그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당황하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
그는 검을 쥔 오른팔로 휘감듯이 아이를 감쌌다.
낯선 이에게 신체를 구속당했기 때문일까?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흐이잉.”
놀라운 능력을 지녔지만, 아이는 아이였다. 경험 많은 어른의 노련함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린 양충은 검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움직이지 마라! 다가오면 죽인다!”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유진산은 전신에 힘이 빠져나간 마냥 한 걸음을 휘청거렸다.
“안, 안 된다, 이놈!”
그때 회심의 표정을 짓고 있던 양충의 안면이 갑자기 경직되었다.
자신의 팔에 안겨있던 아이가 갑자기 날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파닥대듯 바둥거리는 힘이 엄청났다.
“크윽. 가만있어!”
내공을 끌어올렸음에도 오히려 자신의 팔이 버티지 못할 정도라니. 황당함이 끝이 없었다.
그때 더욱 경악할 만한 일이 펼쳐졌다.
“시더!!!”
활짝 펼쳐진 아이의 손바닥이 자신의 팔목을 내리쳐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기껏해야 고사리 같은 손아귀에 불과했다.
충격이 없을 거라 예상하고 무시했던 양충은 곧이어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쩌엉-!
손바닥이 적중한 부위에서 충격파가 일었다.
“크윽!!”
정신이 혼미해지는 충격. 동시에 손목의 힘이 빠져나가며 들고 있던 검이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오른팔의 뼈가 산산이 조각난 것이다.
‘뭐 이런 황당한 일이…….’
이럴 줄 알았으면 호신강기라도 펼쳤을 것을. 후회가 막심했지만 이미 일은 돌이킬 수가 없었다.
이미 아이는 자신의 손에서 벗어난 이후였다.
그리고 아이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본 순간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네 이놈!!”
화가 잔뜩 난 유진산이 어느새 코앞까지 달려와 있었다.
자신의 앞가슴을 향해 맹렬히 돌진해오는 단창(短槍) 한 자루.
창끝에 맺힌 붉은 창기를 걷어내야 했지만, 검을 놓친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곧이어 피처럼 붉은 빛살이 그의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푸욱-!
“크헉!”
유진산이 다시 창을 뽑아내자, 온몸에 힘이 쭉 하고 빠져나갔다.
털썩-!
무릎을 꿇은 양충의 눈빛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지금도 자신이 왜 죽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도,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유진산은 조심스럽게 손녀를 안으며 중얼거렸다.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지존이 될 아이에게 당한 것이니.”
“…….”
눈앞의 아이가 화경의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양충은 죽는 순간까지 의문을 풀지 못했다.
그의 입이 무엇인가를 물어보려는 듯 뻥긋댔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서서히 고꾸라지던 양충의 머리가 바닥에 맞닿았다.
쿠웅-!
장원 안에는 이제 저항하는 인물이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멀찍이서 겁먹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천룡상회의 식솔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값비싼 비단옷과 귀금속을 온몸에 두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사치가 누구의 주머니에서 나왔을지 잘 알고 있었기에 전혀 동정심이 일지 않았다.
유진산은 오른손으로 움켜쥔 단창의 끝을 그들에게 겨냥했다.
“그동안 남들의 고통으로 사치를 누렸으니, 앞으로 다가올 죗값을 달게 받으시게.”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긴 유진산은 등을 돌려 달렸다.
더는 여기에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타앗-!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담장을 뛰어넘은 그는 머뭇거림 없이 이동했다.
그때 가슴에 안긴 유설이 훌쩍이고 있었다.
“우리 손녀 왜 울어?”
“무서워쪄. 힝…….”
“언제나 할아버지가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는 손녀의 등을 토닥거리며 위로해주었다.
위기에서 벗어나자 그의 얼굴에 흐뭇함이 떠올랐다.
조금 전 자신의 손녀가 양충의 팔목을 때리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것은 분명 유가건곤장 일초식 일파무흔(一破無痕)이었다.
벌써 가문의 무공을 실전에 응용하다니. 기특하고 대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가 도착한 곳은 나루터였다.
대형선박 한 척이 출항 준비를 마친 채 정박해 있었다.
천룡상회의 자산이었지만, 갑판 위에는 흑산도의 산적들만이 가득했다.
“어르신, 여깁니다!”
“빨리요!”
고개를 끄덕인 유진산은 전력으로 질주했다.
이윽고 그의 발이 물 위를 튕기며 물수제비처럼 나아갔다.
타타타탓-!
고급 경신술인 등평도수(登萍渡水)였다.
물 위를 밟고 전광석화처럼 달리는 그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멋들어진 광경에 갑판 위의 산적들이 앞다투어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대단해요, 어르신!!”
곧이어 그의 신형이 매처럼 날아오르며 단번에 갑판 위로 착지했다.
타앗-!
목적지에 도달한 유진산은 산적들을 향해 호통부터 쳤다.
“이놈들아, 그냥 우리 여기 있으니까 와서 죽여달라고 소리를 질러!”
이미 객잔에서 싸우던 무림인들이 상황을 눈치채고 잡으러 오고 있을지도 몰랐다.
산적들이 실수를 깨닫고 반성할 무렵, 중앙 돛이 활짝 펼쳐졌다.
“전속력으로 출발하라!”
배가 출발하자 유설이 내려달라고 다리를 파닥거렸다.
“넘어지지 말고, 조심해서 놀아야 한다.”
“히이~”
배를 처음 타본 아이는 신이 나는지 갑판 위를 뛰어다녔다.
산적들이 쫓아다니며 아이와 놀아주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유진산은 뒷짐을 쥔 채 갑판을 쭉 둘러보았다.
현희를 포함한 부상자들은 선실에 누워있는 듯했다.
곧이어 선수로 이동하자 풍호가 선장과 함께 항로를 살펴보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어르신. 고생 많으셨습니다.”
“음. 이제 다 끝난 것 같군. 자네도 수고했네.”
풍호는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인 후 어딘가를 가리켰다.
갑판의 한쪽에 가지런히 놓인 십수 개의 상자들. 천룡상회의 본거지에서 훔쳐온 전리품들이었다.
“지금도 믿기지 않는군요. 우선 전리품부터 같이 살펴보시죠?”
“그리하지.”
풍호가 앞장서서 상자를 하나씩 따내기 시작했다.
상자가 하나씩 열릴 때마다 옆에서 지켜보던 산적들은 탄성을 내뱉었다.
은자 상자를 포함하여, 귀금속과 온갖 사치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가치를 모두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와……. 정말 엄청나네요.”
하지만 유진산의 표정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그가 찾는 것은 금은보화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양민들의 피를 빨아 축적한 재산이 이 정도라니, 그동안 얼마나 못된 짓을 저지른 것인지 상상도 안 가는군. 우선 뒤로 좀 나와보게.”
풍호와 위치를 교환한 유진산은 상자 안을 수색하듯 하나씩 하나씩 뒤적거렸다.
그중에서 가장 볼품없는 상자에 이르렀을 때였다. 내용물을 걷어내고 안쪽을 더듬거리길 잠시 후.
딸칵-!
상자가 분리되며 안쪽으로 또 다른 공간이 나왔다. 예상대로 이 층 구조로 만들어진 상자였다.
안에는 금박으로 장식된 서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것은 뭡니까?”
“내가 찾던 걸세. 아마도 비밀 장부겠지.”
장부를 펼쳐보자 그동안 천룡상회에서 뇌물을 공여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관련된 관원들의 목록과 금액 등이 굉장히 세부적이었다.
“이거, 아래에서 윗놈까지 뇌물을 받지 않은 놈들이 없구나.”
“정말 더러운 놈들끼리 손을 잡았었네요. 헌데 그 장부가 이제 무슨 소용인지요?”
유진산은 서책을 품속에 갈무리하며 답했다.
“일을 시작했으면, 마무리는 확실하게 해야 하는 법이지. 이것을 장안성의 어사대에 전할 것이네.”
어사대(御史臺)는 관리들을 감찰하는 수도의 중앙관청이었다.
그들에게 부정행위가 걸리면 목이 달아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관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설마 수도로 가신단 말씀입니까?”
“쫓기는 몸으로 어찌 그곳까지 가겠나. 정의로운 관원을 한 명 알고 있으니, 그를 통해 전달할 생각이네.”
풍호가 통쾌하다는 듯 웃었다.
“하하. 그 못된 놈들, 사이좋게 손잡고 굴비처럼 엮여 들어가겠군요.”
고개를 끄덕인 유진산은 은자 한 움큼을 움켜쥐고 전낭에 챙겨 넣었다.
“반드시 그리될 걸세. 그리고 이건 내 몫이네.”
“전리품의 절반을 요구하셨잖아요? 왜 그것만 가져가세요?”
“이 늙은이가 그 많은 돈이 뭐가 필요하겠는가. 우리 손녀 간식 사 먹일 돈만 있으면 충분하지.”
“그럼 그때는 왜…….”
갑판 위에 우뚝 선 유진산은 밝게 떠오른 달을 지그시 응시했다.
잠시 후 그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피해를 본 마을 주민들에게 나눠주려 했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네.”
“그럼 어찌합니까……?”
“시간이 흐르고 모든 것이 잠잠해지면 그때 와서 베풀어주시게. 자네에게 양심이 남아있다면.”
유진산은 풍호의 인품을 믿고 있었다.
만약 그가 그리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합당한 사유가 있을 터. 하늘의 뜻에 맡기기로 했다.
“저를 믿어주시니 고맙습니다. 반드시 그리할 것입니다.”
“음. 그나저나 자네들은 어디까지 갈 생각인가?”
“저희는 이흥도라는 섬으로 갈 생각입니다. 지금 풍속으로는 하루 정도 걸린다고 하더군요.”
장강의 상류인 한수(漢水)에 있는 섬이었다. 그곳이라면 무림맹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루 거리라…….”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요?”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말일세. 보급에 문제가 없다면, 좀 더 먼 곳까지 이동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뭐 상관은 없습니다만, 무슨 이유이신지……?”
“오늘 일을 계기로 화산파와 무당파는 자네들을 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걸세. 게다가 무림인들의 추적술은 무시할 수가 없는 수준이지. 고작 하루 거리라면 위험하지 않겠는가.”
풍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의 말씀을 들어서 후회한 적은 없었으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오면 어디까지 가는 게 좋겠습니까?”
“이곳의 소문이 닿지 않을 곳이라면, 최소한 하남성까지는 이동하는 게 좋겠군. 그곳이라면 안심해도 괜찮을 걸세.”
이곳에서부터 장강의 물살을 타고 열흘을 이동한 후, 다시 육로로 닷새 이상을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하남성이라……. 그곳도 나쁘지 않겠군요.”
“꼭 그리하시게. 정착한 이후에는 무엇을 할 생각이지?”
“아직 정한 것은 없습니다. 무엇이든 우리 식구들이 함께할 수 있는 걸 찾아볼 생각입니다.”
“재력이 생겼으니 무엇을 하든 크게 될 수 있을 것이네.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겠지.”
“예. 차후 하남으로 오신다면 저희를 도와주신 은혜를 꼭 갚을 것입니다.”
유진산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언제부터 세상이 그리 좁았던가. 서로를 찾아내려면, 자네들이나 나나 유명해져야 하겠지.”
“아무튼, 꼭 다시 보게 될 거라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어르신은 어디로 가실 겁니까?”
유진산은 말없이 갑판 위를 뛰어다니는 손녀를 응시했다.
해맑은 아이의 웃음을 보는 게 그의 유일한 행복이었다.
“하배!”
“넘어질 수 있으니 조심해서 다니거라!”
그는 달려오는 아이를 번쩍 들어 바람을 쐬게 해주었다.
장강의 물결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는 깊은 고민이 아른거렸다.
아이를 데리고 흑산도와 함께 이동하는 것은 위험했기에 각자의 길을 택해야 했다. 그러나 갈 곳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곳이 어디든 다른 안식처를 찾아야겠지……. 가문의 비기인 살풍창을 전수할 수 있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