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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35화 (35/238)

35화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어 (1)

장안성의 서문 앞에서 곤봉을 움켜쥔 관원들이 길을 트고 있었다.

“길을 비켜주시오!”

그들의 뒤로 관군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붉은 전투복 위에 걸친 검은 갑주와 납작한 모양의 투구까지. 한눈에 보아도 관리들을 감찰하는 어사대(御史臺)의 복장이었다.

길가의 좌우로 구경꾼들이 끊임없이 몰려들며 소곤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래?”

“어사대잖아. 탐관오리 잡아가는 저승사자들 몰라?”

“저, 저기 좀 봐!”

행렬의 중간쯤부터 줄줄이 엮인 죄수들이 끝없이 등장하고 있었다.

얼추 보아도 수백 명이나 되는 인원은 백성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저렇게 많이 잡아간다고?”

“반란군이야 뭐야?”

성문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가장 선두에 있던 죄수 한 명이 발악했다.

눈알이 파묻힐 정도로 뒤룩뒤룩 살찐 체구를 가진 인물이었다.

“이놈들, 현감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법이 어디 있더냐! 나에게 죄가 있다면 오직 저놈들에게 속은 죄뿐이다!”

현감의 눈짓이 향한 곳에는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중년인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억울합니다! 저자가 우리 천룡상회에 강압적으로 뒷돈을 요구한 것입니다! 저희는 모두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뭐라고? 너 이 새끼, 지금 뭐라고 했어?”

기다렸다는 듯이 관리 출신과 천룡상회 출신의 죄수들이 서로를 노려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죄수들의 목소리가 거세졌기 때문일까? 선두에 있던 어사대의 지휘관이 한 손을 올려 보였다.

행렬이 멈추자 그가 뒤를 돌아보며 짜증 섞인 호통을 발산했다.

“다시는 저 더러운 입들을 놀리지 못하도록 매우 쳐라!”

그것이 신호였다. 사방에서 곤봉을 움켜쥔 병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며 그들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공격에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뻐억-! 뻑-! 뻐벅-!!

“큭!”

“끄아악!”

진양현의 최고관리인 현감과 그와 함께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천룡상회의 회주, 그리고 그들의 부하와 식솔들까지 한 명도 예외가 없었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하나둘씩 피투성이로 변해갔다.

한편 주민들의 틈새에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잠든 손녀를 등에 업고 있는 유진산이었다.

‘최소한 저 둘은 살아남기 힘들겠군.’

더는 볼 필요도 없었다. 자신이 건넨 장부가 있는 이상 빠져나올 구멍이 없을 터.

목적을 달성한 유진산은 등을 돌려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죽립을 눌러쓴 그는 지팡이로 위장한 창을 들고 있었으며, 끝에는 보따리가 매어져 있었다.

그리고 등에서는 새근거리는 손녀의 숨소리가 계속 맴돌았다.

아이들은 잠이 많다고 했던가? 소란스러움에도 깨지 않고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자고 있었다.

‘흑산도 녀석들은 잘 도착했는지 모르겠군. 나도 서둘러 정착할 곳을 찾아야 할 터인데.’

흑산도와는 달리 그는 장부를 전달하느라 아직 섬서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곳에서 떠돌이 생활을 한 지가 벌써 한 달이었다.

화산파와 무당파의 고수들이 눈에 불을 켜고 추적하고 있었기에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던 탓이었다.

천룡상회의 총관과 싸우느라 드러낸 인상착의 때문에 수배전단이 붙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모든 사건을 계획한 핵심적인 배후자로 지목되어 있었다.

무거워진 그의 발걸음은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은 채 정처 없이 움직였다.

‘이제 무림맹과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들과 대립하는 세력은 나의 편이 될 수도 있겠지.’

마교가 몰락하고 자취를 감춘 이상, 그들과 대립할 수 있는 세력은 한정되어 있었다.

자유분방한 강자지존의 세계. 사파의 성지 중 하나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지 않은가.

그곳으로 가는 것은 처음 해본 고민이 아니었다.

호전적이고 거친 무림인들이 가득한 곳이라 아이의 성장에 악영향을 끼칠지 몰라 걱정이었다.

하지만 당장의 생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지금은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겠지.’

* * *

호현(戶縣). 사파의 성지 중 하나인 이곳은 무림맹의 출입을 불허한다.

지나는 거리마다 곳곳이 무법지대와 같은 느낌이었다.

이곳에서 양민들이 문제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사파의 연합체인 사도련(邪道聯). 그들은 누구라도 호현의 양민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인구 수가 감소하면 마을의 경제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며, 그것은 곧 성지의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리라.

탁-!

시장의 정육 상인이 닭 모가지를 자르는 소리였다.

“자, 닭 한 마리에 엽전 다섯 냥입니다!”

“오늘 갓 도축한 돼지고기 팝니다!”

곳곳에서 호객행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여타의 다른 마을들에 비교하면 다소 지저분했지만, 곳곳에 활력이 넘쳐났다.

할아버지의 등에 업힌 유설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힝. 꼬꼬댁 죽어떠!”

유진산은 흐뭇한 미소로 대꾸했다.

“우리 설이가 닭이 죽어서 슬픈가 보구나.”

“어떡해…….”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닭고기를 가장 좋아하는 아이였다.

지금껏 손녀의 뱃속으로 들어간 닭이 몇 마리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허허. 슬퍼하지 말거라. 분명 좋은 곳으로 떠났을 게다.”

“좋은 곳이 어디쩌?”

설명해주기가 조금 애매한 질문이었다.

그때 고민하던 유진산의 시야에 객잔이 들어왔다. 마침 식사를 해야 할 시간이기도 했다.

“저깄다! 저기 가면 방금 죽은 닭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게다.”

“히히.”

밥 먹을 곳은 귀신같이 알아채는 아이였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밖에서 보았던 객잔의 모습은 분명 여타의 곳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내부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객잔의 중심부에 붙여놓은 두 개의 식탁. 그곳으로 십수 명의 장한이 몰려들어 팔씨름으로 내기를 하고 있었다.

“하하하! 이번에도 내가 이겼소.”

“이런 빌어먹을!”

“다음 도전자 없소?”

왁자지껄한 사파인들은 점잖은 정파와는 확연히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그들에게 품위나 가식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유진산은 주변의 시선을 피해 조용히 구석진 자리로 이동했다.

몇 가지 음식을 주문한 그는 습관처럼 내부를 둘러보며 안전을 살폈다.

무공을 익힌 자들이 수십 명이었지만,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은 없었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다음 도전자 있으시면 나오시오! 누가 이 위무강의 팔 힘을 감당해보겠소?”

“…….”

자신을 위무강이라 소개한 자가 다시 한번 물었지만, 나서는 이가 없었다.

“아무도 없소? 그럼 이 돈은…….”

그때 객잔 밖에서 누군가 들어서며 소리쳤다.

“내가 도전하지!”

“……?”

다부진 체구에 반짝 빛나는 대머리. 그리고 얼굴에 사선으로 그어진 흉터 자국까지. 무척이나 위협적인 인상을 지닌 중년인이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유진산의 얼굴에도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언뜻 보기에도 최소한 절정 이상의 실력을 지닌 고수였기 때문이다.

객잔의 중심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그는 다짜고짜 위무강의 맞은편에 앉아 손을 내뻗었다.

“한번 끼워주게.”

위무강은 그를 알고 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친근해 보이는 것이 대다수가 이 객잔의 단골인 듯했다.

“백 형, 거 너무 하시는 거 아니오? 왜 애들 싸움에 끼려고 하쇼?”

“그러지 말고 한 번 좀 끼워 줘. 한 손가락으로 해줄 테니. 대신 내가 지면 내깃돈에 열 배를 주지.”

“지고 나서 다른 소리 하기 없기요?”

“암, 당연하지! 이 백규를 뭐로 보는 거야?”

구경꾼들은 위무강이 우세하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한 손가락으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나 대결이 시작됨과 동시에 위무강이 우세를 점했다.

인상을 쓰고 있는 백규는 질 듯 말 듯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버티고 있었다.

“백 형, 뭐 하시는 거요? 이제 끝장을 봐야겠으니, 날 원망하소.”

“어이쿠, 좀 살살해!”

모두가 위무강이 이겼다고 생각할 때였다.

구석에서 흥미롭게 지켜보던 유진산만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가로로 내젓고 있었다. 백규가 봐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인들의 팔씨름은 근력보다 내공의 화후가 가장 중요한 법. 백규에게서 느껴지는 패도적인 기운은 위무강을 압도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씩 그의 연기가 빛을 발하며 아슬아슬하게 위무강을 제압해갔다.

“이이얍! 간다!”

쿠웅-!

“어휴! 또 졌네.”

위무강은 한숨을 내쉬며 엽전 뭉치를 그에게 건네고 물러섰다. 그러자 백규가 호탕한 웃음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하하하! 그럼 이제 누가 이 백규와 한번 놀아보시겠소?”

쉽게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곳에서 가장 센 위무강이 패배한 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그와 친분이 있던 몇몇 무림인들이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패도문의 문주님을 누가 당해요? 왜 애들 노는 데 와서…….”

“거봐요 백 형, 문주님이 품위를 지켜주셔야죠.”

백규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핫! 오늘만 사는 우리 사파인들에게 품위 따위가 뭐가 중요한가? 후회 없이 잘 놀다 가면 그만인 것을!”

“어휴. 문주님을 누가 당합니까?”

그 순간 호탕하게 웃던 백규가 거짓말처럼 웃음을 뚝 멈추었다. 그러더니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댔다.

“……?”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집중되자 그가 나직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곳에 한 명이 있소.”

객잔의 무림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예?”

“누가요?”

“위무형까지 당한 마당에 누가 문주님을 당해요?”

그때 입술에 가져다 댄 그의 검지가 서서히 움직이며 누군가를 가리켰다.

객잔에서 가장 구석진 식탁.

누군가가 밤톨만 한 아이와 함께 조용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죽립 아래로 드리워진 백발로 미루어 나이가 적지 않다는 것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다들 저분이 뉘신지 아시오?”

손녀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던 유진산의 손이 허공에서 정지했다.

자신을 지칭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백규의 말은 그의 긴장을 극도로 올려주었다.

“얼마 전 진양현에 있었던 사건을 모두 잘 아실 거요.”

어찌 모르겠는가. 섬서의 무림인들에게 크게 회자되었던 일이다.

화산파와 무당파의 도사들이 누군가의 간계에 빠져 떼죽음을 당한 일로 강호가 떠들썩했다. 그 일 때문에 무림맹에서 흉수를 잡기 위해 난리인 상황이 아니던가. 아무래도 수배전단을 보고 유추한 것이리라.

유진산은 식탁 아래에 감춰진 손으로 은밀히 창을 움켜쥐었다.

‘그동안 잘 피해 다녔거늘, 이거 오늘은 잘못 걸렸구나.’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백규의 말 또한 예상대로였다.

주먹을 움켜쥔 그가 누군가를 때리는 시늉을 하며 소리쳤다.

“무당파와 화산파에게 한 방을 먹인 장본인이 바로 저분이시오!”

꾸욱-!

유진산이 창을 움켜쥐는 소리였다.

여차하면 출수할 태세를 갖추고 있을 때, 객잔의 무림인들이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상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이어졌다.

곳곳에서 갈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우왓! 정말 그분이 맞습니까?”

“하하! 이럴 수가.”

“대협은 사파의 영웅이에요!”

“존경합니다, 대협! 그 얘길 듣고 속이 시원했어요!”

무림맹을 골탕 먹이고도 대협(大侠)이란 소리를 듣다니. 무려 수십 년 만에 듣게 된 호칭이었다.

얼떨떨해진 유진산은 지금의 상황이 적응되질 않았다.

긴장감이 극에 달해 잠시 잊고 있었다. 이곳은 정파와 대립하고 있는 사파의 성지라는 것을.

멋쩍어진 그는 긴장이 탁하고 풀리며 쥐고 있던 창을 놓았다.

“…….”

그때 백규가 유진산을 향해 손바닥을 슬며시 내밀었다.

“자, 대협. 그럼 이 백규의 도전을 한번 받아주시겠습니까?”

유진산은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 참 미치겠군. 이 나이에 팔씨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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