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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36화 (36/238)

36화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어 (2)

갑자기 팔씨름이라니. 아무런 소득 없이 기력을 소모할 이유가 없었다.

죽립 아래에 감춰진 유진산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기왕 하는 거, 뭐라도 걸어야 하지 않겠소.”

그가 흔쾌히 승낙했기 때문일까? 백규는 함박웃음까지 머금으며 좋아했다.

“만약 나를 이긴다면 목만 빼고 줄 수 있는 것은 다 주겠소. 거기에 더해서 이 백규가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리다!”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였다. 주변인들의 반응으로 볼 때 그가 허언할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유진산은 왼쪽 가슴으로 손녀를 안고 일어섰다.

“원하는 조건을 말해보시오.”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다는 듯 백규의 대답은 즉각적으로 나왔다.

“만약 내가 이기면 당신이 우리 패도문에 입문하는 거요. 어떻소?”

문주가 유능한 인재를 사문으로 포섭하고 싶은 욕망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처음부터 그가 노린 목적이었으리라.

유진산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만에 하나 패배하더라도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으니.

“좋소.”

백규와 마주 앉은 그는 손녀를 왼쪽 무릎에 올려두었다.

최근 수년간 근력 단련에 매진한 탓인지 그의 팔은 노년임에도 근육이 대단했다.

상대도 호탕하게 웃으며 소매를 걷었다.

“하하하! 이것 참 오래간만에 흥분되는구려!”

유진산은 묵묵히 그의 오른손을 맞잡았다.

만약 그가 대련을 요구했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공의 힘이 가장 중요한 팔씨름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삼 갑자에 가까운 내공을 보유한 그는, 화경이라는 절대자의 반열이 아니라면 견줄 자가 없는 수준이었다.

준비가 완료되자 심판을 맡은 자가 한 손을 올렸다 내렸다.

“시작이오!”

동시에 유진산과 백규의 오른팔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한 치의 밀림도 없는 모습에 주변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패도문의 문주께서 저렇게 진지한 모습을 한 건 처음 아니에요?”

“와. 이거 정말 승부를 예측할 수 없겠는데.”

“연세도 있어 보이시는 분이 대단하시잖아?”

그들의 말처럼 당사자들도 서로 당황하고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상대의 힘이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백규는 인상을 가득 쓰고 있었고, 죽립 속에 감춰진 유진산도 이를 악물었다.

승부는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고, 유진산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

‘이거 낭패로구나. 초절정의 수준이었다니…….’

초절정이란 무공이 극에 이른 절정고수를 의미한다. 비록 화경의 벽을 허물지는 못했지만, 어지간한 지역의 패자에게도 도전해볼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수준이었다.

상대가 이 정도의 강자인 줄 예상치 못했다. 이대로라면 체력적으로 불리한 유진산이 패배할 상황이었다.

‘큰일이다. 이거 방법을 찾아야 할 터인데.’

하지만 상대 또한 팔씨름의 경험이 많았기에 어지간한 기교는 통하지 않을 터. 유진산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돌연 작은 무엇인가가 식탁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갑자기 손녀가 상 위로 올라왔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초절정고수를 눈앞에 두고 어찌 한눈을 팔 수 있겠는가.

잠시도 정신을 분산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의 의도를 눈치채기 전까지는 말이다.

갑자기 손녀의 앙증맞은 손이 백규의 반짝 빛나는 대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부들해~ 부들부들해.”

난데없는 돌발 상황에 모두가 당황했다.

머리는 백규가 가장 민감해하는 부분으로 언급조차 금기시되는 부분이었다.

“헛?”

“어서 내려오너라, 아가!”

주변에서 말려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바닥을 활짝 펼치자 믿지 못할 일이 펼쳐졌다.

삼 장이나 떨어져 있던 탁상에서 닭꼬치 하나가 휙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허공에서 꼬치를 낚아챈 아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오물오물 먹기 시작했다.

“격, 격공섭물?”

“……뭐, 뭐야 저게?”

구경꾼들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백규 또한 입이 떡 하니 벌어지며 동공이 흔들렸다. 두세 살짜리로 보이는 아이가 자신도 할 수 없는 기술을 사용한 것이다.

그때 유설이 먹다 남은 꼬치를 백규의 입에 밀어 넣어버렸다.

“이거 먹어.”

인상을 쓰고 있는 백규가 불쌍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유진산과 힘을 겨루던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기혈이 뒤틀리며 얼굴이 창백해졌다.

“끄…….”

그의 일평생 이토록 놀란 적이 없었다. 입에선 소리가 나오질 않았고, 전신의 혈맥이 터질 듯이 요동쳤다.

이대로 팔씨름이 계속된다면 주화입마를 당할 것만 같았다.

반대로 유진산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상대가 흔들리는 틈을 이용해 남은 힘을 일거에 방출했다.

쿠웅-!

백규의 손등이 바닥에 닿으며 패배를 알렸지만, 그의 얼굴은 넋만 놓고 있을 뿐이었다.

닭꼬치를 입에 문 그는 멍한 눈으로 탁상 위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밤톨만 한 아이가 자신과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이어서 개구리처럼 큰 눈으로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마이쩌?”

백규는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것을 감지한 유진산이 얼른 아이를 낚아채어 엉덩이를 한 대 때렸다.

찰싹-!

“요 녀석! 할아버지가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

성격 탓에 평소 훈육을 거의 못 하는 유진산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어쩔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두 눈에 물기가 차오른 유설은 눈물을 쏟아냈다. 아프진 않았지만, 할아버지한테 혼났다는 사실이 서러웠던 것이다.

“흐이잉.”

객잔 안은 침묵에 잠겼다. 오직 아이의 울음소리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유진산은 얼른 손녀를 안고 토닥이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우리 아이가 아직 잘 몰라서 결례를 범한 것 같소. 방해가 있었으니 이번 승부는 무승부로 하시는 것이 어떻겠소?”

객잔 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만 감돌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진산의 마음도 점차 불안해졌다.

꼴깍-!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킨 그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백규의 입에서 꼬치가 빠져 나왔다.

“당황스럽긴 하지만, 남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보다 중하다 하였소.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내가 패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 법이오.”

유진산은 눈앞의 사내가 마음에 들었다.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호탕하고 의리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달리 할 말이 없었기에 유진산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백규가 상체를 숙여 포권을 건넸다.

“형님. 이 백규가 정식으로 다시 인사를 드리겠소.”

일개 문파의 문주가 남에게 이토록 쉽게 고개를 숙이다니. 자존심을 목숨처럼 여기는 정파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거절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죽립을 벗어보였다.

“노부의 이름은 유진산이네.”

생각보다 그의 나이가 많았기 때문일까? 백규의 눈빛에 잠시 당황이 서렸다.

하지만 강호에서의 형제는 나이 차이가 중요치 않은 법.

그는 다시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럼 형님, 원하는 게 무엇인지 한번 말씀해보시오. 이 백규는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니, 돈이든 뭐든 다 들어주겠소이다.”

이미 유진산도 생각해놓은 바가 있었다.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아이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진양현의 사건으로 무림맹에 쫓기는 상황이라 잠시 머무를 곳이 좀 필요하네. 문파에 빈 공간이 있다면 식객으로 좀 받아줄 수 없겠는가.”

백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식객이란 문파나 세가에서 숙식을 제공받는 대신 조언이나 금전 등의 지원을 주는 귀빈을 뜻한다.

강호의 기준으로 무공이 고강한 식객을 사문에 두는 것은 굉장한 이득이 된다.

오히려 백규가 원하던 일이었기에 두 손 들고 환영했다.

“그런 거라면 그냥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형님 같은 분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오.”

“이렇게 쉽게 허락해주니 고맙네. 혹시 민폐가 되지는 않겠는가? 나 때문에 무림맹에 해코지라도 당한다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서 말일세.”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 무림맹의 일원은 사도련과 맺은 조약에 따라 호현에 들어올 수가 없으니까. 이곳에서는 정파 놈들 따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소.”

다행히 소문과 다르지 않았다. 일이 생각대로 잘 풀리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조금 전 손녀가 벌인 일에 대한 해명이었다.

유진산은 아이를 안아들며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그리고 오해가 있을 것 같아 말해주자면, 이 아이는…….”

그때 백규가 조용히 하라는 듯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댔다. 그러고는 좌중을 둘러보며 진지한 얼굴로 소리쳤다.

“양화객잔의 형제분들! 오늘 본 것은 우리들끼리의 비밀로 하는 것이 어떻소?”

“암요, 문주님. 우리 의리 알잖아요.”

“어차피 얘기해도 아무도 안 믿어요! 미친놈 취급이나 받겠죠, 뭐.”

유진산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었다. 손녀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은 그다지 반가울 만한 일이 아니었으니.

백규가 가슴을 탕탕치며 소리쳤다.

“하하하! 그럼 오늘 기분도 좋고, 이 백규가 객잔의 모든 술값을 계산하겠소이다!”

객잔의 곳곳에서 환호성이 울려 펴졌다.

“하하. 이보시게, 점소이! 죽엽청주 한 동이 가져다주오!”

“여기도 한 동이 주시오!”

더는 팔씨름이나 아이에 대해 언급을 꺼내는 이가 없었다.

실컷 먹고, 마시고, 떠들고, 자유분방한 사파의 분위기는 바로 적응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들과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객잔의 분위기가 절정으로 치닫고, 다들 취기가 진득이 오를 무렵. 백규가 자신이 호언한 대로 술값을 모두 계산했다.

“크하하! 오늘 참 좋은 날이지 않소, 형님?”

“물론이네. 오늘보다 더 좋은 날을 기억해내기 힘들 정도로 말일세. 아이를 돌봐야 하는 입장이라 같이 취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은 정말 즐거웠네.”

유진산은 예의상 술을 몇 잔 마시긴 했지만, 내공을 이용해 취기를 모두 날려버렸다. 그렇기에 그의 정신은 평상시와 전혀 다름이 없었다.

반면 백규는 지금의 기분을 만끽하고 싶다는 듯 취기를 유지하며 비틀거렸다.

“자 그럼 갑시다, 형님! 우리 패도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집 구경부터 시켜드릴 테니.”

유진산은 졸린 눈으로 하품하는 손녀를 등 뒤에 묶고 그를 따라 나섰다.

“고맙군. 내 입장을 이해해주어서.”

“그 아이 말이오? 아까는 사실 놀라서 기절할 뻔했소. 소문나서 좋을 것이 없기에 쉬쉬하고 넘겼지만, 어찌된 일인지 너무 궁금하다오.”

“말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 하지만 자네가 내 말을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백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갸우뚱했다.

“……?”

“아이의 손을 한번 잡아보시게.”

등 뒤에 업힌 유설이 졸린 눈으로 백규의 정수리를 향해 손을 내뻗고 있었다.

“부들 머리…….”

“요 녀석. 지금까지 내 머리를 만져본 것은 우리 부모님 이후 네가 처음이다.”

그는 검지를 아이의 손을 향해 내뻗어 보았다.

작은 손아귀가 오므려지며 기다렸다는 듯이 검지를 감쌌다.

그리고 그 순간. 백규는 헛바람을 집어삼키고야 말았다.

“헙?”

술기운이 확 달아났는지 비틀거리던 그의 신형이 곧추세워졌다. 마치 심연처럼 끝을 알 수 없는 응집된 기(氣)의 흐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껄껄 웃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백규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자네 짐작대로네. 화경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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