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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37화 (37/238)

37화 우리집에는 호랑이도 있소 (1)

화경이 무엇인가. 오직 깨달음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지고한 경지였다.

그런데 끽해야 두세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화경의 신체를 가지고 있다니? 백규는 황당한 나머지 헛웃음마저 나왔다.

“아니라고 볼 수도 없고, 이것 참.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겁니까?”

“선음지체의 체질을 타고난 아이일세. 그리고 어쩌다가 영물의 내단을 복용하고, 검후를 만나 다시 한번 기연을 얻었지.”

놀라움이 끝이 없었다.

선천적으로 신선의 오감을 지녀 높은 경지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다는 선음지체(仙音之體). 그것도 모자라 무림 제일 고수로 이름을 날렸던 검후까지 거론되다니.

백규의 얼굴엔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금분세수식을 거행하고 무림을 떠난 그 검후요?”

“맞네. 검후가 아이를 각성시키는 장면은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더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쪼그만 녀석이 어떻게 화경의 깨달음을…….”

“검후의 말로는, 순수한 마음을 간직한 아이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더군. 그래서 깨달음을 얻기가 더 수월하다고 했네. 결정적으로는 선음지체를 타고난 둘이 만났기에 가능했던 일이겠지.”

백규는 유설과 눈을 마주친 채 한참 동안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이렇게 여리고 예쁘장하게 생긴 아이가 절대고수의 반열이라는 화경에 도달했다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결코 믿지 못했을 일이었다.

그는 아이의 머리를 쓱 쓰다듬으며 웃어 보였다.

“앞날이 기대되는 아이로군요. 이렇게 금싸라기 같은 손녀를 뒀으니 형님도 참 뿌듯하겠소.”

“암, 그렇고말고. 그런데 무림맹 내에서 이 아이를 노리는 못된 세력이 있던 것 같더군. 혹시 아는 바가 없는가?”

비록 정파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식견이 높을 사파의 문주라면 뭔가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몇 년 전 특이체질을 가진 아이들이 실종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긴 했다오. 아무래도 어떤 특정 세력에서 조직적으로 납치를 진행한 것 같소.”

유진산도 벽씨세가가 습격당해 아이가 사라졌다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에 내가 한 놈을 잡았는데, 용 문신이 목까지 새겨져 있었네. 혹시 이런 자들을 알고 있는가?”

“용 문신이라……. 내가 아는 자들 중에는 없지만, 좀 알아보겠소. 아무튼, 조심하는 게 좋겠수다. 뭐 우리 패도문에 눌러계신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의 말대로 사파의 성지인 이곳에 잠시 몸을 의탁한다면 어느 정도는 안심이었다.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신세 좀 지겠네. 나중에 꼭 보답함세.”

“보답하고 싶으시면, 손녀한테 나중에 우리 패도문 좀 잘 봐달라고 전해주소.”

무림의 역사상 최연소의 나이에 절대자의 반열에 오른 아이였다. 이대로 무사히 성장하기만 한다면 훗날 지존의 자리는 그야말로 떼놓은 당상이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백규의 농담에 유진산도 껄껄 웃어주었다.

“허허허. 꼭 그리함세.”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던 그들은 어느새 목적지의 코앞에 도착했다.

잠시 후 유진산은 눈 앞에 펼쳐진 장원을 보고 몹시 놀랐다.

천 평이 넘어 보이는 웅장한 부지에 곧게 뻗은 담장들. 그리고 안으로 비추어진 전각들은 예상했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비록 정파의 구대문파에 비견될 수준은 아니었지만,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우리 문파가 어떻게 재력을 모았는지는 물어보지 마소. 나도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거니.”

전대에 활동했던 백규의 아비라면 자신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 그분의 존함이 어찌 되시는가?”

“백운현이오. 무림맹의 누군가에 당했다는데,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오.”

잠시 기억을 거슬러가던 유진산은 곧이어 무엇인가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극혈도(極血刀) 백운현?”

“우리 아버지의 별호를 어찌 알고 있소?”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당시 패도적인 도법으로 유명한 분이었네. 내 창술과 한번 겨뤄보고 싶었던 인물이었지. 헌데 그분의 사문은 귀두문(鬼頭門)이었을 텐데?”

당시 귀두문의 활약상은 무척 유명했다. 문파 이름 그대로 귀신같은 무공을 펼치던 자들이었기에 정파인들 사이에서도 이따금 거론되곤 했다.

그때 백규가 검지로 장원의 정문에 걸려있는 현판을 가리켰다.

“문파 이름이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내가 바꿔버렸소.”

“음. 확실히 패도문이 더 강해 보이는 것 같구만.”

입구에 도착하자 경계를 서고 있던 두 명의 무사가 동시에 기립했다.

“오셨습니까, 문주님!”

“응. 수고들 많아.”

백규는 그들의 어깨를 한 번씩 토닥이고는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르던 유진산은 연신 감탄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훈련장과 겸용으로 쓰는 드넓은 마당이었다. 곳곳에서 수십여 명의 무인들이 짝을 이루어 수련에 열중이었다.

전체적인 인원은 흑산도와 비슷해 보였지만, 개개인의 무공 실력은 차원이 달랐다.

“문도들의 실력이 굉장하군. 역시 귀두문의 후예들답네. 헌데 문도들의 머리가 왜…….”

기이하게도 머리카락이 있는 문도가 한 명도 없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식솔들을 제외하고는 한 명도 예외가 없이 같은 모습이었다.

“문주가 대머리인데 문도들만 머리를 기를 수 없지 않소? 그래서 모두 밀라고 하였소.”

“자네답지 않군. 어찌 그렇게 혹독한 것을 명하였는가.”

그가 생각했던 백규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유진산이 의아해하는 순간 그가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농담이올시다. 사실 우리 패도문의 내공심법인 귀두공(鬼頭功)의 부작용 때문이오. 뭐 형님이 원하신다면 특별히 전수해드릴 수도 있소.”

“자네 무서운 소리를 하는군.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하겠네.”

껄껄 웃으며 훈련장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돌연 훈련장의 끄트머리 어딘가에서 푸근한 모습의 중년 여성이 경공을 펼쳐 달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황소와 같은 무지막지한 돌진에 유진산과 백규가 동시에 흠칫했다.

“저분은 누구…….”

한달음에 달려온 그녀는 다짜고짜 백규의 등짝에 손바닥을 날렸다. 한눈에 보아도 내공이 실려 있는 일격이었다.

짜악-!

“아악!”

백규가 몸을 움츠리는 시늉을 하자, 그녀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쌍심지를 켰다.

“또 어디서 처놀다 왔어? 지금 문주가 대낮부터 술 퍼마시러 다닐 시국이야? 사혈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까, 자리 비우지 말라고 했잖아!”

백규는 양손으로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그녀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반격했다.

“일이 있어서 어디 좀 다녀왔다니까! 이거 손님 앞에서 창피하게 이럴 거야?”

중년의 여인은 이제야 유진산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범상치 않은 풍채로 아이를 등에 업은 노인의 모습은 무림의 기인을 방불케 했다.

객잔의 주정뱅이 친구들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제야 자신의 결례를 깨달은 그녀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얼굴을 붉혔다.

“……손, 손님이셨어?”

“앞으로 우리 문파에서 머무를 귀빈이니까, 잘 접대해드려.”

“미리 얘기하지 그랬어.”

순식간에 변하는 그녀의 태도와 목소리는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규는 고개를 설레설레 휘젓고는 유진산을 바라보았다.

“형님이 좀 이해해주시오. 집에 호랑이 마님이 있다는 얘기를 깜빡했수다.”

이렇게나 공과 사가 확실한 아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녀는 어느새 양손까지 다소곳이 모으고 있었다.

“내가 안내해드릴까……?”

“내가 직접 할 테니, 신경 쓸 것 없어. 이따가 저녁이나 함께하자고.”

말을 마친 백규는 은근슬쩍 유진산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마치 서둘러 부인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잠시 후 아내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 저 성질머리를 어떡하면 좋겠소?”

“내 눈에는 금실만 좋아 보이는데 뭐가 걱정인가. 보아하니 자네를 대신해 문파의 운영까지 맡고 있는 것 같던데.”

“하긴 그것도 맞소. 겉보기엔 맹수이지만, 그래도 일 처리 하나만큼은 똑 부러진다오. 그러니까 이렇게 참고 살지 않겠소.”

“허허허.”

유진산이 연신 껄껄 웃자 백규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그리도 재밌으시오?”

“어찌 재미있지 않겠는가. 내 강호의 경험이 수십 년이지만, 사파인들이 이렇게 인간적이라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네. 그동안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구만.”

“정파나 사파나 사람 사는 곳이 어찌 다르겠소. 단지 이쪽 사람들은 가식이 없으니,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더 나쁘게 보일 뿐이지요.”

유진산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보니 확실히 맞는 말인 것 같군. 헌데 아까 부인이 사혈문이라는 얘기를 하던데, 그들 또한 사파가 아니던가?”

“맞소. 지금 이곳 호현은 네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있소. 서쪽의 패도문과 북쪽의 사혈문. 그리고 동쪽과 남쪽은 흑룡단과 마천회의 영향권이오.”

“설마 사파의 세력끼리 이권 다툼이라도 시작했다는 말인가?”

백규가 놀란 눈빛으로 유진산을 쓱 한 번 바라보았다.

“역시 형님은 눈치가 대단하시구려. 한동안 잠잠했는데, 기어코 사혈문 녀석들이 먼저 움직였소. 얼마 전 흑룡단을 먼저 흡수하고, 지금은 우리와 마천회까지 넘보고 있소.”

“무림맹에 압도적으로 밀리는 사파가 굳이 그렇게까지 출혈 경쟁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도련주께서 호현이 하나로 결속되길 원하고 있기 때문이오. 이곳의 패자가 된 자는 사도련의 간부가 될 자격을 얻을 수 있소. 명분이 생겼으니 사혈문이 먼저 움직인 것이고.”

사도련주는 정파의 최고 권력자인 무림맹주와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유진산도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궁금하긴 했지만, 너무 캐묻는 것도 결례라 생각되었기에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이들의 발걸음은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원의 가장 안쪽에 자리한 깨끗한 전각을 백규가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자 이곳이오, 형님. 문도들에게도 일러둘 테니, 부족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만 하시오.”

“부족한 게 뭐가 있겠는가. 이렇게나 신경을 써주니 고맙기만 할 뿐이네.”

백규는 씩 웃으며 한발 물러서서 포권을 했다.

“오늘은 뜻깊은 날이니 저녁에 식사라도 같이하지요.”

“그리하세.”

그가 돌아간 후 유진산은 손녀와 함께 집을 둘러보았다.

아담한 전각이었지만, 아이와 함께 생활하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뒷마당이 딸려 있다는 것이었다.

담장과 나무에 가려진 십여 평의 공터. 무공을 수련할 장소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리도 쉽게 보금자리를 얻다니. 거참 꿈만 같구나.’

정파와 사파는 전쟁과 휴전을 반복하며 시비가 끊이질 않는 관계였다.

그래서인지 서로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 마련이다. 그러한 선입견이 오늘 완전히 깨져버리고야 말았다.

오늘 마주친 이곳의 무림인들은 결코 정파보다 나쁘다고 할 수가 없는 자들이었다.

오히려 가식 없는 그들의 모습은 정파보다 나은 점도 많았다.

생각에 잠겨있던 유진산의 시선이 마당을 뛰어다니는 손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하지만 쉴 틈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또 한 걸음을 나아가야겠지.’

그는 품속에서 갈무리된 양피지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가문의 비전 무공. 살풍창(殺風槍)의 무공비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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