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패도문은 오직 직진뿐이오 (1)
사혈문 지살대(地殺隊)의 대주 용천일.
그의 검 끝이 하늘을 가리키자 붉은 물결이 꿈틀대며 대열을 갖추었다.
오십 명에 이르는 검객들은 검을 잡아당긴 채 용천일의 공격 명령만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한 번 더 주겠소.”
그들의 앞에는 백규의 아내인 맹련화가 열두 명의 무사들과 비장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었다.
네 배가 넘는 인원수.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그들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맹련화의 언월도가 용천일의 목을 가리켰다.
“거절한다.”
굳이 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었다. 너무나도 뻔한 내용이었으니까.
인질이 되어 백규에게 짐이 되는 것보다는 죽음을 택한 그녀였다.
“유감이군. 그럼 모두 죽일 수밖에.”
용천일이 집요하게 설득했던 이유는 백규가 그만큼 무서운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후환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설득이 실패한 이상 더는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그가 마지막 공격명령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노부도 너희들에게 기회를 한 번 주겠다.”
등 뒤에서 메아리친 노인의 음성.
비록 작은 소리였지만 웅장한 기(氣)의 흐름을 머금고 있었다. 중후한 내공을 보유하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
지살대의 후미. 백발의 노인이 단창을 움켜쥔 채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무림의 기인처럼 신비한 모습이었다. 등 뒤에 업은 귀여운 얼굴의 여자아이만 아니라면 말이다.
배시시 웃고 있는 아이는 낚싯대 같은 기다란 막대기를 움켜쥐고 빙빙 돌려댔다.
“아찌들 나쁜짓 해떠?”
지살대의 검객들은 어리둥절하며 상황을 살폈다.
아이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만, 백발의 노인은 얘기가 달랐다.
정기가 서린 노인의 눈동자와 은은히 풍기는 기도는 언뜻 보아도 절정의 고수가 틀림없었다.
용천일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누구지? 정체를 밝혀라.”
패도문에 이런 절정고수가 있다는 정보는 듣지 못했다.
상대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불필요한 싸움까지 확대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정체가 뭐긴. 여기서 밥 얻어먹고 사는 식객이지.”
“식객이라……. 여기서 같이 죽을 필요는 없을 텐데?”
“금수도 은혜를 아는 법인데, 밥값은 해주는 게 사람의 도리겠지. 그리고 죽긴 누가 죽어 이놈아!”
급작스러운 호통에 용천일의 미간이 꿈틀댔다.
“도대체 어디에서 자신감이 나오는지 모르겠군.”
주변으로 숨 막히는 살기가 맴돌며 공기가 얼어붙었다.
일촉즉발의 그때. 유진산의 귓가로 맹련화의 전음이 들려왔다.
- 어차피 우리만으로는 당해내지 못합니다. 저희가 시간을 끌어볼 테니, 할아버지라도 먼저 빠져나가세요. 동천시장에 그이가 있을 겁니다.
- 하지만 자네들은 여기서 죽임을 당하겠지. 그리되면 아우가 슬퍼하지 않겠는가.
- 할아버지까지 여기서 같이 죽을 필요는 없어요. 그러니 어서…….
맹련화의 전음에는 다급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유진산은 오히려 지살대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 그러고 보니 자네는 내 첫째 며늘아기와 많이 닮았군. 드세고 강인하다고 생각해 잘 챙겨주지 않은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네. 알고 보면 마음이 가장 여린 아이였는데 말이야.
- ……?
- 상처가 깊어 보이는군. 무리할 것 없으니, 그렇게 잠시 쉬고 계시게.
돌연 맹련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비록 남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평생 처음으로 느껴본 감정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지살대의 코앞까지 당도한 유진산이 등 뒤로 물었다.
“아가.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 눈을 감고 해보는 것이 좋겠구나.”
“응, 설이 할 수 이떠!”
“조금 전 할아버지랑 같이 놀던 그대로만 휘두르거라.”
“웅!”
유설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막대기를 치켜세웠다.
상상을 초월하는 손녀의 기감(氣感) 능력은 굳이 시야가 필요 없을 터. 단지 잔혹한 장면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럼 놀아보자 꾸나.”
유진산이 한 걸음을 더 내디딘 그 순간.
지살대원 중 한 명이 쏜살같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죽어!”
그가 지척까지 다가왔음에도 유진산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검날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쐐에엑-!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의 동공이 동시에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때찌!”
청량한 아이의 외침.
그와 동시에 유설이 움켜쥔 막대가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그것은 벼락이 내려꽂히듯 공격하던 검객의 머리 위를 가격했다.
빠각-!
후두부를 맞은 그는 기절한 듯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검객이 풀썩 쓰러지자, 기다렸다는 듯 유진산의 창이 그의 앞가슴으로 날아들었다.
푸욱-!
조금 전 공격을 가했던 검객은 지살대에서도 강한 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가 일합도 버티지 못하고 당해버린 것이다.
지켜보던 자들은 동공이 흔들거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충격을 받은 것이리라.
모두가 당황하고 있는 그때 유진산의 측면에서 누군가 기습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머리 위에 드리워진 낚싯대가 물고기를 낚아채듯 그곳으로 향했다.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유설의 외침.
“때찌!”
막대가 꺾여나갈 듯 곡선을 그리며 다가오는 검객의 어깨를 후려쳤다.
쩌억-!
“끄윽!”
가볍게 때린 듯 보였지만, 마치 쇠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이 전해져 왔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검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그의 턱 밑으로 붉은 기(氣)를 머금은 창날이 스쳐 지나쳤다.
써컹-!
두 번이나 같은 상황이 이어지다니.
어이없는 상황에 지살대의 검객들은 흠칫하며 머뭇거렸다.
그들을 노려보던 유진산이 등 뒤로 중얼거렸다.
“잘하고 있다, 아가. 절대 눈을 뜨지 말거라.”
“알아떠.”
“그럼 지금부터는 더 빨리 움직여보자꾸나.”
지면을 박찬 유진산은 적들의 중심부를 향해 거침없이 돌진했다.
분명 겉으로 보기엔 무모해 보였지만, 그 모습을 마주한 적들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오직 신이 난 것은 두 눈을 감고 막대기를 휘두르는 유설뿐이었다.
“때찌! 때찌!”
쩍-! 콰직-! 빠각-!
마치 두더지를 잡듯 휘두르는 막대는 눈으로조차 쫓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다.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외침이 공격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소리가 한 번씩 들려올 때마다 서너 명씩 쓰러져나갔다.
“크윽!”
“뭐, 뭐야……. 컥!”
“크악!”
초식에 얽매이지 않은 본능적인 공격이었다. 그렇기에 살상능력은 없었지만, 문제는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는 것이었다.
막대기에 후려 맞고 자세를 잃은 적들은 하나둘씩 유진산의 창에 꿰뚫렸다.
상황이 이쯤 되자 지살대는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대주인 용천일조차 온몸이 얼어붙은 듯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대주님, 어서 도와주십시오!”
그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혼란스러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 대원 중 삼 할을 잃다니.
넋을 놓은 그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화경……. 화경이다…….”
“누가요?”
“저 아이 말이다.”
그를 바라보는 부하의 두 눈은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냐고 묻고 있는 듯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어서 명령을!”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가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검진(殺劍陣)을 펼쳐라.”
“예.”
호각소리와 함께 지살대의 무사들이 한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뛰어다닌 유진산도 몹시 지쳤기에 거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물러선 그는 맹련화와 패도문의 무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미안하네. 큰소리를 쳤지만, 절반도 쓰러트리질 못했군.”
놀란 눈을 하고 있던 맹련화는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할아버지. 단신으로 저 정도나 쓰러트릴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군요.”
“나 혼자서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어쨌거나 상황이 어렵게 되었군.”
아직도 두 배가 넘는 적의(赤衣) 검객들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검진을 펼친 그들의 기세는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이 정도의 전력 차이면 버텨 볼 만합니다. 조금 있으면 그이가 올 것입니다.”
말을 마친 그녀가 언월도의 손잡이로 바닥을 쿵쿵 두들기자, 휘하의 무사들이 밀집하여 방어진을 형성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게. 노부가 앞에 서겠네.”
“……예.”
출혈 때문인지 맹련화의 안색이 조금 전보다 더욱 창백해져 있었다. 게다가 복부의 상처가 심각해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이 상태로 싸움을 계속한다면 그녀의 목숨을 장담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유진산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보기 위해 상대에게 말을 건넸다.
“어떻게 하겠는가. 이대로 공격을 한다면 너희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사혈문의 지살대주 용천일도 내심 머뭇거리던 참이었다.
휘하의 무사들은 공격 태세를 마친 채 마지막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노인이 나타나기 전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로군.”
유진산은 부정하지 않았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창을 움켜쥐었다.
“맞네. 조금 있으면 내 아우가 도착할 것이네. 감당할 수 있겠는가?”
“과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믿지 못하겠으면 시험해보게.”
잠시 고민하던 용천일은 결심을 굳힌 듯 그의 등 뒤에 업힌 아이를 응시했다.
“오늘 우리가 모두 죽더라도 그 아이만큼은 없애야겠다.”
“이놈!”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손녀에 대한 위협은 참지 못하는 유진산이었다.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그는 화룡신창을 잡아당기며 출수할 준비를 마쳤다.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그 순간 모두가 아이의 옹알거림을 들을 수가 있었다.
“부들머리…….”
“응?”
“부들머리 와쩌.”
유진산의 어깨 위로 아이의 검지가 삐져나와 어딘가를 가리켰다.
패도문의 정문이 있는 방향. 그곳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살기(殺氣)가 용천일의 오감을 자극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설마……?’
뒤를 돌아본 용천일은 가슴이 철렁해졌다.
양손에 쌍도를 움켜쥔 백규가 양팔을 벌린 채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상의를 탈의한 그의 다부진 상체로 수많은 근육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그리고 반짝 빛나는 이마에 불끈 튀어나온 힘줄까지. 더는 흉악할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백규…….”
백규의 이가 뿌드득 갈렸다. 몹시 화가 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모습을 한 대머리 무사들이 끝없이 등장하며 뒤따르고 있었다.
“누구야. 내 마누라의 배때기에 칼을 꽂은 새끼. 천천히…… 아주 잘근잘근…… 모두 씹어먹어 주겠다.”
“…….”
소름 돋는 그의 모습에 사기가 꺾인 지살대는 몹시 동요했다.
그들은 눈알을 굴리며 퇴로를 찾기에 바빴다.
“누가 그랬냐고 물었다!”
누가 감히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겠는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백규의 모습은 마치 저승사자 같았다.
지살대의 무사들은 입을 꾹 다문 채 비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고요한 침묵이 흐르는 그때.
돌연 할아버지 등에 업혀 있는 유설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손가락을 내뻗으며 누군가를 가리켰다.
“이 아찌가 그래떠.”
모두의 시선이 아이의 검지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이 지목당했음을 깨달은 용천일은 흠칫거렸다.
“내, 내가 언제?”
용천일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에게 변명할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꾸욱-!
백규가 쌍도를 강하게 움켜쥐는 소리였다.
“너 지금부터 뒈졌다고 생각해라.”
말을 마친 그는 지살대를 향해 단신으로 쏘아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