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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46화 (46/238)

46화 내가 네 할아버지다 (1)

고수들은 단 일 합만으로도 상대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수준이 높은 자들일수록 승부는 순식간에 결착되기 마련이다.

백규와 천수의 싸움 또한 눈 깜짝할 사이 종막으로 치닫고 있었다.

“크악!”

검을 움켜쥔 천수의 오른팔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그의 목젖에 백규가 움켜쥔 도(刀)의 날이 맞닿았다.

손아귀에 약간의 힘만 주어도 상대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정적과 함께 날카로운 도 날이 태양 빛에 반사되며 울음을 토해냈다.

스르릉-!

명백한 패배. 압도적인 실력 차이 앞에 천수는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지혈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농락하지 말고, 어서 죽이거라.”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다.”

“……?”

“우리 형님이 조언해주더군. 화근의 씨앗은 미리 제거하는 것이 좋지만, 그보다 더한 상책은 그 씨앗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헛소리하지 마라. 내가 너의 개가 될 것 같으냐?”

백규는 자신의 무기를 회수하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부탁한다, 천수. 정파로부터 나 혼자 이곳을 지키기엔 벅차다. 내 옆에서 든든한 나무가 되어줘.”

호현의 사파 세력을 통틀어 둘밖에 없는 초절정고수였다.

비록 경쟁자일지라도 그를 죽인다는 것은 정파로부터 더욱 큰 위험에 노출되는 일을 의미했다.

“…….”

천수가 머뭇거리자 백규가 고개를 돌려 구석진 전각의 문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선 한 여인이 자식들을 끌어안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그의 식솔들이었다.

“잘 생각해 봐. 나와는 달리 너는 가진 게 많잖아.”

백규는 늦은 나이에도 자식이 없었다. 귀두공의 부작용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인지 원인조차 알지 못했기에 항상 고민거리였다.

잠시 고민하던 천수는 숨을 깊게 한 번 내쉬었다.

“조건은?”

백규는 대답 대신 마천회의 회주 장량을 쓱 응시했다.

정확히는 반짝 빛나는 그의 머리였다.

“……설마?”

삭발은 곧 패도문을 향한 충성의 의미이자 상징이 되어 있었다.

백규는 씩 한 번 웃어 보이고는 등을 돌렸다.

“내일까지 기회를 주지.”

허리춤으로 쌍도를 회수한 그는 성큼성큼 장원 밖으로 걸어 나갔다.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터주는 그의 부하들.

백규는 그들을 비집고 유진산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등 뒤에 업혀 있는 유설은 그사이 잠이 든 듯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가시지요, 형님.”

“고생했네.”

백규와 유진산을 선두로 모두가 썰물 빠지듯 철수했다.

장원을 벗어나자 백규가 은근슬쩍 물었다.

“정말 사혈문이 삭발식을 거행하겠소?”

“더는 잃을 자존심도 없는 자들일세. 마천회도 했는데 사혈문이라고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음. 역시 형님 말대로 살려두길 잘한 것 같소.”

유진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먼 산을 응시했다.

“화산파와 종남파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지. 만에 하나 정파와 사파의 분쟁이 거세진다면, 이곳 호현은 버티기 쉽지 않을 걸세. 사도련에서 지원이 제때 온다는 보장도 없고. 그런 상황에서 어찌 초절정고수를 죽일 수가 있겠나.”

“그것도 그렇구려. 만일을 대비해 팔 하나는 잘라두었지만, 왼손만으로도 어지간한 절정고수는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오.”

사혈문의 문주 천수. 그가 허무하게 패한 것은 결코 약해서가 아니었다. 백규가 너무나도 강했을 뿐.

벼락처럼 빨랐던 천수의 검법은 유진산도 당해내기 힘들 정도였다.

“어쨌거나 이제 호현이 하나로 통합되었으니, 자네도 사도련의 간부가 되겠군.”

“음. 호현의 패자가 곧 섬서의 총사이니, 서열이 칠 위쯤 될 것이오.”

사도련의 서열 칠 위라면, 명문 정파의 장문인과 비교될 수 있을 정도의 배분이었다.

그야말로 무림의 거물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앞으로 사도련의 핵심인물과도 직접 만나게 되겠군.”

백규는 유진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가장을 습격한 정체불명의 괴인들. 그들에 대한 단서는 유일하게 목을 타고 오르는 용 문신이 전부였다.

어쩌면 식견이 높은 사도련의 핵심 인물들은 아는 바가 있을지도 몰랐다.

“내 잊지 않고 있소. 형님의 가문을 그렇게 만든 놈들이 누구인지, 사파의 정보망을 이용해 알아볼 것이오.”

“억울하게 죽은 자식새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네. 백규 아우의 도움을 절대 잊지 않을 걸세.”

“그게 무슨 말이오? 형님이 아니었으면 우리 패도문도 쫄딱 망할 뻔했는데, 내가 더 고맙지.”

유진산과 백규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서렸다.

“자네도 이제부터 더욱 바빠지겠군. 섬서 지역의 사파를 통솔해야 하니.”

백규는 뭔가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마도 그렇지 않겠소? 그럼 형님은 이제부터 뭘 할 생각이오?”

“자네가 소개해준 의원의 말에 따르면 내 수명이 멀지 않았다더군. 그 전에 우리 손녀에게 내 모든 것을 전수할 생각이네.”

“형님이 원한다면, 애들에게 시켜서 패도문의 무공도 알려주리다.”

본디 정파의 심법으로 내공을 쌓은 자는 성질이 다른 사파의 무공을 익히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화경의 신체를 가진 유설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유진산은 즉시 고개를 내저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설이의 머리는 밀 수 없어.”

진지한 그의 표정에 백규는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뭘 그렇게 정색을 하시오? 내 설마 설이한테까지 그런 요구를 할 리가 없지 않소?”

“나도 농담이었네. 나중에 필요하면 얘기하지. 지금은 우리 가문의 무공을 전수하기에도 벅차니까 말일세.”

* * *

드디어 호현에 완전한 평화가 찾아왔다.

이곳의 모든 사파인들이 백규의 이름 아래 하나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패도문의 식객인 유진산도 더욱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해졌다.

원수들에 대한 단서도 소식이 없었기에 그는 거처에 틀어박혀 모든 시간을 손녀에게 할애했다.

가문의 절기인 살풍창(殺風槍)을 함께 익혔으며 장법, 경공, 보법 등 자신이 아는 모든 무공을 하나둘씩 아이에게 전수해 나갔다.

유설의 재능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공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자, 외부로부터 숨길 필요성이 있었다.

백규는 패도문 내에 유설을 위한 폐쇄된 수련장을 별도로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아이의 능력을 정확히 알고 있는 그는 조금의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 시간은 유수처럼 흘렀다.

그리고 그렇게…….

오 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다.

* * *

“할배!”

거처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후다닥 들어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칼과 눈이 크고 귀여운 상을 가진 여자아이. 어느덧 여덟 살이 된 유설이었다. 키도 무럭무럭 자라 어른의 허리춤을 넘어설 정도였다.

그리고 유진산은 병상에 누워있었다. 최근 들어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누워서 지내야만 했다.

“……경공 수련은 잘 마치고 왔느냐.”

마치 병든 닭처럼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유설은 할아버지의 가슴 앞에 무릎을 꿇고는 울먹이며 답했다.

“응. 소화산까지 갔다 왔어.”

“……어떻게 이렇게 빨리 갔다 왔어?”

소화산은 작년까지 아이와 함께 산맥을 타고 경공 수련을 다니던 곳이었다.

꽤 먼 거리였기에 최소한 반나절 이상이 걸리곤 했다.

그곳을 지금 혼자서 한 시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주파하고 온 것이다. 그것도 가볍게 운동 삼아서 말이다.

“뛰어서 갔다 왔어.”

“본 사람 없었지?”

고개를 끄덕인 유설은 품속에서 주섬주섬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고사리 같은 손아귀에 들려져 있는 검은 잎사귀. 마치 진귀한 영약처럼 사람과도 비슷한 형상이었다.

“할배 이거 먹어봐. ……아프면 안 돼.”

분명 흔히 볼 수 있는 잎사귀가 아니었다.

무림의 영약에 대해서 아이에게 교육을 해주긴 했지만, 오해가 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거 독초다. 먹으면 즉사야.”

하필이면 독초 중에서도 최고로 쳐주는 산공초였다.

영약만큼이나 보기 힘든 이것을 어찌 찾아냈단 말인가. 절정고수인 유진산조차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위험한 독초였다.

유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맛을 보려는 듯 입으로 가져갔다.

말리려던 유진산은 이미 늦었음을 알고는 포기했다.

애초부터 그럴 필요도 없었다. 손녀의 신체는 천하의 어떠한 독도 침범하지 못하는 만독불침(萬毒不侵)의 화경이었으니.

“컥! 맛없어!”

잎사귀를 맛보던 유설은 기겁을 하며 뱉어냈다.

이산 저산을 뛰어다니며 할아버지에게 줄 영약을 구해왔지만, 그것이 독초였다니.

금세 울상으로 변하는 아이의 얼굴.

자신을 걱정하는 손녀의 모습에 유진산이 인자한 미소로 나직이 말했다.

“곧 일어날 수 있으니, 이제 약초 같은 거 구해올 필요 없다.”

그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할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유설의 눈가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흐이잉. 죽으면 안 돼, 할배……. 설이 혼자 어떻게 살아.”

유진산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 더는 미룰 수가 없겠구나.’

더 이상 버텼다간 어느 순간 급사할 우려가 있었다. 다행히 손녀도 많이 자랐기에 이제는 마음 놓고 환골탈태를 진행해도 문제 될 게 없었다.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하지? 혹시라도 할아버지의 모습이 조금 변하더라도 놀라면 안 된다.”

“힝. 알았어.”

이때를 대비해 아이에게 환골탈태와 반로환동에 대해 수차례나 설명해 놓았던 유진산이었다.

“좀 쉬어야겠으니, 잠시 좀 나가 있거라. 삼촌들한테 가서 놀아달라고 해.”

“응.”

환골탈태의 과정을 아이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손녀가 나간 후 유진산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호흡을 골랐다.

조건은 이미 충분히 갖춰져 있었으며, 얇아진 독맥을 뚫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중년 정도로만 돌아가도 좋겠구나.’

의원 마양의 말에 의하면 어느 정도나 젊어질지 예측할 수가 없다고 했다.

유진산은 청년이 되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십 년 이상만 젊어지더라도 만족할 터였다. 최소한 손녀가 성인이 되는 것은 볼 수가 있었으니.

준비를 마친 그는 망설임 없이 운공을 개시했다.

이미 한 번의 경험이 있었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잠시 후 중후한 그의 내공이 독맥을 뚫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화아악-!

눈부시도록 찬란한 휘광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이미 무아지경에 빠져 우주를 헤매고 있던 유진산은 그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우드득-! 우드득-!

피부가 녹아내리며 새살이 자라고, 전신의 뼈가 뒤틀리며 끊임없이 변화했다.

그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일생의 모든 기억이 거꾸로 흘러가며 태초(太初)로 돌아가는 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점차 정신이 맑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구름을 뚫고 도약할 수 있을 것처럼 가벼워진 몸의 감각까지.

조금씩 몸의 떨림이 멈추었다.

잠시 후 모든 것이 호수처럼 고요해지자 그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성공이구나. 얼마나 젊어진 것이지?’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처음으로 느낀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커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지나치게 헐렁해진 장삼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려 있었다.

‘……설마?’

화들짝 놀란 유진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바지가 흘러내리며 아래가 시원해졌다.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이, 이럴 수가…….”

유진산은 자신의 목소리에 또 한 번 놀랐다. 마치 손녀 또래의 애들이나 낼 법한 목소리라니.

머릿속이 창백해졌지만,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우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알몸이었으니, 우선 뭐라도 걸쳐야 했다.

기존에 입었던 옷들은 당연히 맞지 않을 터. 그때 그의 시야에 한쪽에 널브러진 손녀의 옷들이 보였다.

자괴감이 들었지만, 지금은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손녀의 옷을 주섬주섬 입어보니 맞춤옷처럼 신체에 딱 맞았다. 신발의 크기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우리 애가 보면 놀랄 터인데 큰일이로구나.’

그야말로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그는 일단 지금의 상황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해 거처 밖으로 나왔다.

피부에 와닿는 바람의 감촉이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그만큼 감각이 발달된 것이리라.

게다가 지금까지 느껴볼 수 없는 가벼움. 자유로워진 관절과 날렵해진 신체의 반응 속도에 기분이 묘했다.

“어디 한 번…….”

타앗-!

지면을 박찬 유진산의 신형이 허공에서 세 바퀴나 회전을 했다.

제비처럼 가벼워진 몸놀림. 그리고 주먹을 내뻗자 사정없이 뿜어져 나오는 권풍은 그의 전성기 시절에도 하지 못했던 수준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어졌다. 어떤 적을 만나더라도 쓰러트릴 자신이 생겼다.

‘허허. 이거 새라도 되어 날아갈 것만 같구나.’

기분이 어느 정도 풀린 유진산은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내면일 뿐. 껍데기 따위에 집착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가 자아도취에 빠져 있을 무렵이었다.

“너 누구야?”

귀에 익은 목소리. 어느새 돌아온 유설이었다.

손녀의 감쪽같은 기척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라면 자신과 눈높이가 똑같다는 것뿐.

유진산은 잠시 헛기침을 하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놀라지 마라, 아가. 내가 네 할아버지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살펴보던 유설의 얼굴에 장난기가 떠올랐다.

아이는 돌연 허리를 굽히고는 등을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그럼 나는 네 할머니야.”

감히 할아버지에게 장난을 치다니. 역시나 믿지 않는 눈치였다.

유진산은 다시 한번 진지하게 말했다.

“장난치지 말고 이리 와 보거라. 내가 정말…….”

그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손녀의 신형이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빛살처럼 빠른 보법. 순식간에 코앞에서 다시 나타난 아이는 어느새 자신의 귀를 움켜쥐고 있었다.

피하는 것은 어림도 내지 못할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환골탈태와 반로환동으로 무척 강해졌다고 생각했건만, 유설은 이미 차원이 다른 고수가 되어 있었다.

“너 도둑이지? 내 옷을 훔쳐 입었어.”

손녀에게 귀때기를 붙잡힌 유진산은 기겁하며 소리쳤다.

“아악! 이, 이 녀석!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내가 네 할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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