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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48화 (48/238)

48화 내가 네 할아버지다 (3)

타앙-!

의자에 앉아 있던 유진산은 탁상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섰다.

“그게 정말 사실인가!?”

그의 모습에 백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가문의 원수를 논하는 진지한 상황이었지만,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강아지 같은 얼굴로 탁상 위에 턱만 빼꼼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규는 웃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다물었다.

“큭. 아 미안하오, 형님.”

작아진 신체가 적응이 안 되는 것은 유진산 또한 마찬가지였다.

머쓱해진 그는 다시 의자로 올라와 앉았다.

“아닐세. 나도 지금 내 모습이 웃기는데 자네라고 오죽하겠나. 지내다 보면 곧 적응되겠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백규는 호흡을 크게 들이켠 후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극진문은 사파에서도 알아주는 문파였소. 전체적인 전력이 아마 지금의 우리와 비슷했을 것이오.”

“나도 잘 알고 있네. 내가 활동하던 시대에도 유명했던 세력이었지. 아마도 위치 때문에 종남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네.”

백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앞으로 쓱 내밀었다.

“그렇다면 얘기가 빠르겠구려. 석 달 전 이 갈대숲에서 극진문이 종남파를 격퇴한 전적이 있었소. 그리고 지난달 종남파에서 보복 공격을 했는데, 대담하게도 본진을 때렸단 말이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문파 내부에는 은퇴한 원로고수들을 비롯해 어마어마한 전력이 포진하고 있다. 그렇기에 어지간해서는 본진은 건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조력자들이 있지 않고서야 종남파에서 홀로 공격을 감행할 리가 없었다.

“믿고 있는 구석이 있으니 그런 일을 벌였겠지. 그리고 당시에 종남파를 도왔던 녀석들이 바로 그 빌어먹을 놈들이었고.”

“맞소. 턱 밑까지 용의 문신을 새겨 넣은 자들 말이오. 고작 세 명한테 극진문의 원로 고수들이 갈대처럼 쓰러졌다고 하오.”

유진산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확실한 정보인가?”

“그곳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문도에게 내가 직접 물어본 것이니 틀림없소.”

종남파를 도운 것으로 보아 무림맹의 암중 무력단체일 확률이 높았다.

그 말은 곧 유가장을 습격한 흉수가 같은 정파라는 얘기였다.

일평생 그들의 편에 서서 싸워왔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배신감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유진산은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눈을 감았다.

“설마 했었건만 그들이 어찌 내게 이렇게 천인공노할 짓을…….”

“더러운 일을 음지에서 처리하는 무림맹의 비밀조직이 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소. 아마 형님 말고도 당한 자들이 많이 있을 거요. ”

“그럴 수도 있겠지……. 협의를 지켜야 할 정파의 이름으로 어찌 그런 패악한 짓을 하고 다닌단 말인가.

백규는 정파를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정파나 사파나 한낱 칼로 밥 빌어먹고 사는 놈들일 뿐이오. 적어도 우린 죽이고 싶으면 그냥 가서 죽이지, 고고한 웃음으로 뒤에서 칼침 놓는 짓 따윈 하지 않소.”

유진산은 치가 떨린다는 듯 이를 갈았다.

싸늘하게 죽어간 식솔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자,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가 불타올랐다.

“이 괘씸한 놈들을 찾아서 다 때려 죽여야겠다.”

“조금만 기다려보시오. 우리 사도련에서 은밀히 조사하고 있으니, 정보가 나오면 알려주겠소.”

장파의 습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유진산이었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네. 오히려 들쑤실수록 더욱 깊은 곳으로 숨어버리겠지.”

“그래도 뭐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봐야 하지 않겠소? 형님의 원수이기에 앞서 우리의 적이기도 하니까.”

유진산은 결심을 굳힌 듯 진중한 얼굴로 백규를 올려다보았다.

“사도련은 잠시 이 일에서 빠져주었으면 좋겠군. 부탁이네.”

“어쩔 생각이오?”

“내가 직접 종남산으로 올라가서 알아볼 생각이네. 어떤 놈들인지 그들은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종남파가 어디인가. 비록 구파의 말석이지만 명문 정파로서 무수히 많은 고수가 포진한 곳이다.

백규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뭐 우리도 수고를 더는 셈이니 상관은 없지만, 그 몸으로 가능하겠소?”

비록 반로환동한 고수라 해도 꼬마의 모습으로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유진산은 찻잔을 들어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길 잠시 후. 돌연 찻잔이 손바닥 위에서 팽이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휘리리릭-!

회전하는 속도는 계속해서 빨라졌다.

잠시 후에는 마치 용오름처럼 찻잔 안의 물이 회오리치며 조금씩 솟구쳐 올랐다.

기둥처럼 변한 물줄기는 점차 가늘어지며 놀라운 광경을 연출했다.

천장을 뚫을 듯 솟구치던 물줄기는 점차 힘을 잃으며 찻잔 안으로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놀라운 것은 이 과정에서 단 한 방울의 물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교하게 기(氣)를 다룰 수 있는 기교가 없으면 시도조차 불가능한 기술이었다.

“어떤 것 같은가. 팔다리가 짧은 것은 좀 불편하지만, 늙은 몸뚱이보단 훨씬 나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던 백규의 표정은 백팔십도 달라져 있었다.

그는 양손을 부딪치며 갈채를 보냈다.

“하하! 역시, 우리 진산 형님이오. 내가 괜한 걱정을 했소.”

“그래도 혼자서 종남산을 휘젓고 다니는 것은 무리니 요령껏 잘 조사해 봐야겠지.”

“지원이 필요하면 말씀하시오. 쓸만한 애들로 몇 명 붙여줄 테니까.”

유진산은 머리카락이 없는 백규의 두피를 지그시 응시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사파에서 염탐하러 왔다고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란 얘긴가?”

백규는 박장대소하며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었다.

“하하하. 농담이었소, 농담. 그럼 이거라도 가지고 가소. 백연단이라고 사도련의 간부들에게만 지급되는 물품인데,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이걸 사용하시오.”

백연단(白煙團). 유진산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살수들이 사용하는 연막탄보다 상위 등급의 도구로, 주로 도주할 때 사용하는 귀한 물품이었다.

“고맙군. 다녀와서 다시 돌려주겠네.”

“어쨌거나 내 권한으로 보름 동안은 시간을 벌어보리다. 그동안 사도련은 나서지 않을 것이지만, 이후에는 련주의 눈치를 봐야 하니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소.”

“보름이라…….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는 기간이지. 고맙네.”

* * *

백규와 만남을 마친 유진산은 바로 거처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손녀가 잠옷을 입은 채로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잘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와 있다니. 오늘따라 뭔가 이상했다.

“안 자고 있었어?”

“응! 할배랑 놀려고 기다렸어.”

그러고 보니 아이랑 놀아주기로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야밤에 뛰어놀 수도 없는 노릇. 시간이 너무 늦었기에 오늘은 포기해야 했다.

“착한 아이는 일찍 자야지.”

오늘따라 유설의 반응이 평소와는 달랐다.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따지듯 묻는 것이 아닌가.

“그럼 할배는 왜 일찍 안 자? 착한 아이가 안 되고 싶어?”

유진산은 일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자신 또한 겉모습은 영락없는 아이가 아니던가.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했기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그는 설명을 잠시 미루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늦었으니 일단 들어오너라. 할아버지가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마.”

“히히. 정말? 무슨 이야기?”

“아주 옛날에 욕심 많은 부자와 가난한 농부가 있었단다.”

유설은 평소처럼 할아버지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반듯이 누웠다.

잠을 자기 전에 동화를 듣는 것은 손녀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한참 뒤 아이가 새근새근 잠이 들자, 반듯이 눕혀준 후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거 앞으로가 걱정이로구나.’

여러 가지로 고민이 깊어지는 날이었다.

그의 하루는 깊은 한숨과 함께 뜬눈으로 저물어갔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유설은 평소의 습관대로 수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홀로 남은 유진산은 거처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반로환동을 이룬 후 처음으로 하는 운기조식이었다. 본격적으로 몸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다.

눈에 띄게 향상된 전신의 감각과 신체 능력까지. 어지간한 절정고수는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살풍창의 완성이로군.’

앞으로 틈이 나는 대로 가문의 최고 절학인 살풍창을 중점적으로 연마할 생각이었다.

그의 성취도는 고작 삼성(三成)으로 실전에서는 사용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손녀가 팔성(八成)에 도달한 것에 비교하면 몹시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아직도 화후가 낮은 것은 결코 그가 게을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간 노쇠했던 체력과 건강문제로 훈련할 시간이 매우 한정되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부터는 앞만 보고 나아갈 것이다.’

유진산은 다시 정신을 집중하여 운기조식을 계속했다.

혈도를 타고 거침없이 움직이는 기(氣)의 물결. 예전과는 움직임이 전혀 달랐다.

이것은 곧 무공을 펼침에 있어 막힘이 없고, 내공을 쌓는 속도 또한 몇 배나 빨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확실히 환골탈태가 되었음을 몸 상태가 말해주고 있었다.

절정을 넘어서 초절정의 반열에 도달한 셈이었다.

무아지경에 빠진 그는 무려 두 시진이나 앉은 자세로 운기조식을 진행했다.

그리고 슬며시 눈을 떠가던 그는 화들짝 놀라고야 말았다.

“깜, 깜짝이야. 왜 그러고 있어?”

자신의 코앞에서 유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턱을 괴고 마주 앉아 있었다.

체외의 모든 기가 내부로 갈무리 된 반박귀진의 경지를 이룬 아이였다. 그렇기에 가까이 온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할배 어디 가?”

난데없는 질문에 유진산이 오히려 당황했다.

“어떻게 알았어?”

“저기.”

아이의 검지가 꼬물꼬물 어딘가를 가리켰다.

문 앞에 가지런히 놓인 봇짐과 죽봉 한 자루. 외출 준비를 눈치챈 것이다.

“금방 다녀올 테니 얌전히 있거라. 오늘 새벽녘까지는 돌아올 게다.”

“힝. 설이도 데려가!”

종남산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전력으로 경공을 펼치면 두 시진이면 가는 거리였기에 금방 다녀올 요량이었다.

무공이 고강한 손녀를 데려간다면 든든하긴 하겠지만, 아직 은신 기술을 가르쳐주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네 선물 사러 가는 게다. 미리 알면 재미가 없지 않느냐.”

선물이라는 말에 유설이 흠칫했다.

할아버지한테 언제 선물을 받아보았단 말인가.

“……알았어.”

유진산은 고분고분해진 아이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기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요즘은 삼촌들이랑 비무 놀이 안 해?”

“안 놀아준대……. 아무도.”

“백규 삼촌도?”

“응. 몸이 안 좋대.”

어젯밤까지만 해도 멀쩡하지 않았던가.

설이와 비무를 하다 보면 깨달음을 얻는 것 같다고 좋아하던 백규가 이제는 피해 다닌다니. 대충 상황이 짐작되었던 유진산은 피식 웃고야 말았다.

“그러게 살살하라고 하지 않았더냐. 할아버지 다녀올 동안 훈련 열심히 하고, 이모들이랑 놀고 있거라.”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 것을 확인한 유진산은 등을 돌려 봇짐을 메었다.

그리고 죽봉을 봇짐의 틈새에 끼워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손녀가 평소에 훈련용으로 사용하던 것으로, 아이의 신체에 딱 맞게 제작된 작은 크기였다.

가보인 화룡신창은 너무 커서 당분간은 사용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준비를 마친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멀쩡한 가문을 풍비박산 낸 놈들.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무리가 코앞에 있었다.

거처를 나선 그는 종남산을 향해 직선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기다려라, 이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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