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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51화 (51/238)

51화 우리 손녀가 싸움을 좀 잘해 (1)

누가 하나뿐인 할아버지를 이렇게나 때렸단 말인가.

불어터진 입술과 밤송이가 된 눈꺼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유설은 양손을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용서 못 해.”

극대노한 손녀의 반응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유진산이었다.

그는 반대편으로 돌아누우며 등 뒤로 중얼거렸다.

“그냥 혼자 넘어진 거니 신경 쓰지 말거라.”

“거짓말하지 마! 누가 때렸어?”

세상에 어떤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두들겨 맞고 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유진산은 등 뒤로 한 손을 휘휘 내저었다.

“늦었으니 빨리 잠이나 자.”

“…….”

아직 잠을 자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뒤에서는 씩씩대는 손녀의 숨소리가 계속해서 느껴졌다.

살며시 뒤를 돌아본 유진산은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손녀가 심술 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아이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유진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잠시 어디 좀 다녀올 테니 먼저 자고 있거라.”

유설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표정이 사뭇 심각해 보였다.

할아버지가 문밖으로 나간 그때였다.

기척을 죽인 아이는 할아버지의 뒤를 은밀히 따라붙기 시작했다.

반박귀진에 이른 절대고수가 작정하고 내기를 갈무리하면 바로 옆에 있어도 눈치챌 수가 없다.

유진산은 손녀가 미행하고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가 향한 곳은 백규의 집무실이었다.

“안에 아우 있는가?”

입구를 지키는 경비 무사가 자세를 최대한 낮추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꼬마라고 생각하고 막아섰다가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반로환동한 고수임을 알고 있었기에 태도가 백팔십도 변해 있었다.

“예,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저희 문주께서 어르신이 오시면 바로 들여보내시라고 하셨습니다.”

유진산은 발꿈치를 치켜세우고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고개를 숙인 그의 어깨를 토닥이기 위해서였다.

“그래, 고생이 많아.”

왠지 모를 어색함에 경비 무사는 묘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 사이 전각의 벽면 그림자로 작은 음영이 찰싹 달라붙었다.

기척을 숨기고 접근한 유설은 안에서 들려오는 내용을 엿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화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생소하고 어려운 강호의 이야기들.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그런 것들은 관심이 없었다.

유설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할아버지를 곤죽으로 만든 흉수였으니.

곧이어 아이의 두 눈이 게슴츠레 작아졌다. 그것은 마치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표정이었다.

벌컥-!

전각의 문이 다시 열리며 유진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규에게 위로를 받았기 때문일까? 그의 표정은 한층 밝아져 있었다.

그때 경비 무사가 떠나는 그를 향해 다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어르신.”

“오냐. 너도 수고하거라.”

뒷짐을 쥔 유진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거처로 향했다.

잠시 뒤 담벼락을 지나 거처의 입구를 마주할 때였다.

“……음? 왜 아직 안 자고 나와 있어?”

유설이 양손을 허리춤에 올린 채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분하다는 손녀의 한마디.

경험이 많은 유진산은 단번에 직감했다. 아이가 자신을 미행했음을.

그렇다고 탓할 수도 없었다. 자신을 생각하는 손녀의 마음을 어찌 나무랄 수 있겠는가.

“……들었어?”

유설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되물었다.

“종남이가 누구야.”

유진산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도 처음으로 들어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종남이라니……?”

“다 들었어. 종남이가 할배 때렸다며.”

아무래도 흉수에 대해 오해가 좀 있었던 모양이었다.

유진산은 조용히 미소지으며 손녀의 등을 토닥였다.

“늦었으니 잠이나 자자꾸나. 내일 얘기해주마.”

“정말 얘기해줄 거지?”

순간순간의 감정에 충실할 나이가 아니던가.

어차피 내일이 되면 잊어먹을 터.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다니까. 할아버지가 언제 설이한테 거짓말한 적이 있더냐.”

“…….”

유진산은 그대로 방에 들어와 대자로 누웠다.

종남파의 장로들에게 정신없이 두들겨 맞았기에 온몸이 아려왔다. 그나마 뼈가 상한 곳이 없는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젊음이 좋구나. 예전 같았으면 몇 군데는 부러졌을 터인데.’

두런두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손녀가 자연스럽게 다가와 팔을 베고 옆에 누웠다.

아기 때부터 그래왔으니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뭔가 어색했다. 아마도 짧고 가늘어진 자신의 팔 때문이리라.

‘가여운 내 새끼…….’

자신의 복수를 하겠다고 날뛰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오늘따라 곤히 잠드는 아이의 모습이 측은해 보였다.

어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야 할 나이거늘. 의존할 가족이라고는 할아버지밖에 없는 손녀가 너무 안타까웠다.

‘건강하게만 자라거라. 그때까지 할아버지가 꼭 지켜주마.’

속으로 조용히 다짐하던 유진산은 피식하고 말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웃겼기 때문이다. 누가 누굴 지킨단 말인가.

힘으로도 오래전부터 손녀를 당해낼 수 없었으며, 이제는 신체적인 우월함도 없어진 상태였다.

두런두런 생각에 잠겨있던 그도 어느 순간 스르륵 잠이 들고야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조금씩 느껴지는 인기척에 살며시 떠진 실눈.

곧이어 무엇인가를 발견한 유진산은 화들짝 놀랐다.

“뭐, 뭐해?”

죽봉을 움켜쥔 손녀가 문 앞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비장한 표정을 보니 단단히 각오한 모양이었다.

“빨리 가자, 할배. 종남이 만나러.”

거절한다면 잡아끌고서라도 가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당황한 유진산은 주섬주섬 옷부터 챙겨입었다.

“괜찮대도. 할아버지는 이미 다 나았으니, 같이 산책이나 하자꾸나.”

유설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안 돼. 당한 것은 반드시 되돌려 줘야 한다고 했어. 안 그러면 또 당한대.”

“……누가?”

“백규 삼촌이.”

역시나 앞만 보고 돌진하는 사파의 가르침다웠다.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손녀의 의견을 무시할 것인지, 아니면 도움을 받아 다시 한번 도전할 것인지 고민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비록 종남산에 수많은 고수가 있지만, 화경의 벽을 허문 절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이를 데리고 간다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손녀에게 조금의 위험이 된다면 피하고 싶은 것이 할아버지의 마음이었다.

‘만에 하나 종남산에서 포위라도 당한다면 안전을 장담할 수 없겠지.’

이미 직접 겪어봐서 잘 알고 있었다. 수백 명의 도사에게 둘러싸인다면 빠져나오기도 어려울 터.

그렇다면 답은 간단했다.

‘포위당할 일만 피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만약 놈을 밖으로 유인할 수만 있다면……?’

경우의 수를 따져보던 유진산은 결심을 굳혔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응? 어떤 거?”

“무조건 할아버지의 말을 잘 듣고,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절대 혼자 나서면 안 돼.”

어려운 요구도 아니었다.

어느새 얼굴이 활짝 펴진 유설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알았어!”

준비를 마친 유진산은 손녀와 함께 집 밖을 나왔다.

종남산까지는 경공을 펼쳐 부지런히 달려야 한다.

출발하기에 앞서 유설이 잠시 머뭇거렸다.

“갈 길이 머니까 어서 출발하자꾸나.”

모처럼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외출에 기분이 좋아졌던 것일까? 손녀의 얼굴에는 해맑은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할배, 내 손 잡아줘.”

옆에서 유설이 오른손을 앙증맞게 내뻗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반로환동을 한 뒤로는 아이의 손을 잡아준 적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어색한 느낌이 들었지만, 손녀의 손길을 피할 수도 없는 노릇. 유진산도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어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음.”

어깨를 나란히 한 둘은 그렇게 목적지를 향해 첫걸음을 뗐다.

순식간에 패도문의 장원을 벗어날 때쯤이었다.

유진산은 멀지 않은 곳에서 낯익은 자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푸하하핫!”

상의를 탈의한 채 물수건을 움켜쥔 우람한 체구의 대머리 중년인. 때마침 근처로 백규가 지나가고 있었다.

두 명의 아이가 손을 맞잡고 나란히 경공을 펼치고 있으니, 그 모습이 웃길 수밖에.

유진산은 씁쓸한 미소로 한 손을 올려 보였다.

‘그 녀석 참.’

백규는 멀어져가는 유진산과 유설의 등 뒤를 향해 소리쳤다.

“하하! 보기 좋소이다! 조심히 잘 다녀오소!”

* * *

종남산의 입구 근처.

인적이 드문 풀숲에 두 명의 아이가 몸을 웅크린 채 오솔길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느새 도착한 유진산과 손녀 유설이었다.

별다른 은신술을 쓰지 않았음에도 둘 다 체구가 작았기에 매복이 감쪽같았다.

“아가. 위험한 순간이 아니라면, 실전에서는 살풍창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알았어.”

살풍창(殺風槍). 오래전 창귀(槍鬼)로 이름을 날렸던 조상이 남겨준 절세무공이었다.

죽음의 바람을 몰고 다니는 어마어마한 창법으로, 펼쳐지는 순간 무시무시한 살상력을 뿜어낸다.

삼성(三成)의 성취도에 불과한 자신과는 달리 유설은 벌써 팔성(八成)으로 완성에 근접해가고 있었다.

만약 살풍창을 마음먹고 펼친다면 어지간한 상대는 갈가리 찢겨나갈 터였기에 사용을 제한한 것이다.

“그래. 그리고 할아버지가 신호하기 전까진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말거라. 잘할 수 있지?”

“응! 근데 언제 와?”

풀숲에 쪼그려 앉아서 기다린 지 벌써 반 시진이 지났다.

인기척조차 없는 오솔길만 바라보고 있으니 지루할 수밖에.

“저 산 위에 사는 도사들은 반드시 이 길을 지나야 하지. 이제 곧 있으면 올 게다.”

“얼마나?”

“곧 있으면 온다니까. 할아버지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언제나 마음이 고요하고 차분해야 해.”

“근데 종남이는 얼마나 나빠?”

“원수의 친구란다.”

“원수?”

유진산은 다음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 우리 가문을 풍비박산 낸 놈들……. 네 부모를 잔혹하게 살해한 녀석들 말이다.’

그때였다. 갑자기 유설이 흥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할배, 저기 누가 내려오고 있어!”

아직 유진산의 시야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화경의 오감이 그것을 감지했다면 틀림없을 터.

“쉿. 지금부터는 조용히 해야 해.”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잠시 후 종남산이 있는 방향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회색빛 도포와 검은 법모. 그리고 허리춤에 매단 장검까지. 종남파의 도사가 확실했다.

유진산은 숨을 죽인 채 그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모습은 마치 사냥감을 공격하기 직전의 맹수처럼 보였다.

잠시 후 거리가 일 장 이내로 좁혀질 때였다.

타앗-!

지면을 박차며 튀어 나간 유진산은 다짜고짜 그를 향해 옆차기를 날렸다.

다람쥐처럼 날래고 쏜살같은 움직임은 그가 피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콰직-!

난데없는 기습에 앞가슴을 적중당한 도사는 데굴데굴 구르며 소리쳤다.

“크악! 누, 누구냐?”

정신을 차려보니 웬 꼬마가 팔짱을 낀 채로 노려보고 있었다.

“나다. 소문은 들었겠지?”

주저앉은 채 유진산을 살펴보던 도사는 몹시 당황했다.

전날 종남산에 잠입해왔다가 도망친 사파의 고수 때문에 문파가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그리고 인상착의와 정황상 그자가 분명했다.

“이, 이놈! 도대체 원하는 게 무엇이냐?”

유진산은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요즘 젊은 도사들은 하나같이 예의가 없구나. 어른을 보면 인사를 해야지, 반말이나 찍찍해대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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