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우리 손녀가 싸움을 좀 잘해 (2)
유진산에게 붙잡힌 도사는 정신없이 두들겨 맞았다.
겉으로 보기엔 아이가 어른 위에 올라타 때리는 듯했기에, 그 모습이 어색해 보였다.
두 눈이 반쯤 풀린 도사가 필사적으로 외쳐댔다.
“살, 살려다오!”
유진산이 그의 얼굴 앞에서 주먹을 움켜쥐며 눈을 부라렸다.
“마지막 기회이니 다시 한 번 얘기해 보거라.”
전날 문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이었다.
겉보기엔 어린아이였지만, 소문대로 반로환동한 고수라면 실제의 나이가 아주 많을 터.
“……살, 살려주십시오, 어르신.”
유진산은 이제야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양손을 털고 일어섰다.
“그럼 너는 내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느냐.”
“살, 살려만 주신다면 모든 다 드리겠습니다.”
아직 강호의 경험이 많지 않은 종남파의 이대제자였다.
만약 문파의 핵심전력인 일대제자였다면 이토록 쉽게 굴복하지는 않았으리라.
“네깟 애송이 하나를 해치워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올라가서 현호라는 녀석에게 전해라. 어제 못다한 승부를 내고 싶으면 혼자서 내려오라고 말이다.”
“알, 알겠습니다. 올라가서 장로님께 꼭 전하겠습니다.”
유진산은 흡족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일식경 안에 오라고 해. 그때까지 안 오면 이곳에 없을 테니까.”
“……예, 어르신. 그럼 가 봐도 되겠습니까?”
“어서 가봐. 마음이 변하기 전에.”
허락이 떨어지자 도사는 등을 돌려 부리나케 사라져갔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에서 멀어지고 싶었는지 미친 듯이 달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그림자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였다.
돌연 아주 먼 곳에서 한 가닥의 외침이 메아리치며 다가왔다.
“야 이 애새끼야, 넌 뒈졌어! 거기 딱 기다려라!”
유진산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먼 산을 올려다보았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을 그냥…….’
그렇게 교육을 했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쫓아간다면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계획을 위해서는 참을 수밖에. 고작 이대제자 하나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반드시 일식경 안에 올 것이다.’
하지만 현호 혼자서 올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최소한 장로급 한 명은 더 대동하고 올 확률이 높았다. 아니면 다른 수작을 부린다거나.
그러나 그게 무엇이든 관계는 없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 또한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까.
유진산은 죽봉을 챙겨 들며 풀숲을 향해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손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여기 계속 있어?”
“오냐. 할아버지가 얘기할 때까지, 거기 그대로 숨어 있거라.”
유진산이 손날로 죽봉의 끝을 사선으로 베자 날카로운 죽창이 만들어졌다.
써컥-!
“힝. 내 건데!”
유설의 수련용 무기였지만, 창기를 좀 더 쉽게 뿜어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집에 많이 있지 않느냐. 돌아가면 몇 개 더 만들어주마.”
준비를 마친 유진산은 종남산으로 가는 입구를 틀어막은 채 잠자코 기다렸다.
그렇게 일각이 더 지났을 때였다.
흥분한 손녀의 전음이 귓가로 메아리쳤다.
- 오고 있어!
벌써 내려오다니, 생각보다 반응이 빨랐다.
잠시 후 유진산도 느낄 수가 있었다. 먼 곳에서부터 강한 기(氣)의 흐름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리고 한 호흡이 더 지났을 때는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일직선으로 쏘아져 오는 한줄기 빛살. 가히 전광석화 같은 속도에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둘의 간격은 급격히 좁혀졌다.
그리고 일 장의 거리까지 좁혀지자, 유진산은 좌측으로 반보를 움직이며 상체를 급격히 비틀었다.
그 순간 눈부신 섬광이 그의 앞가슴을 스쳐 지나며 바닥에 적중했다.
콰아앙-!!
지면이 터져나가며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곳에선 나이가 지긋한 백발의 도사가 자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통성명조차 없는 기습적인 공격. 그의 의도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조금 전의 공격은 나와 위치를 바꾸기 위함이었군.’
자신은 어느새 종남산을 등진 형국이 되어 있었다.
도망칠 퇴로부터 차단하겠다는 의미이리라. 그리고 또 한 가지. 뒤에서 또 다른 원군이 온다면 자신은 꼼짝없이 포위당할 터였다.
극진문을 기습할 때 선봉에 섰던 종남파의 장로 현호. 역시나 강호의 경험이 많은 노련한 상대였다.
그가 검을 앞으로 내뻗으며 나직이 말했다.
“오늘은 결코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누군지는 궁금하지도 않은가 보군.”
“걱정하지 말거라. 우선 네놈의 사지근맥을 끊어 놓은 후 천천히 심문해줄 것이니.”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진산의 등 뒤로 강력한 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것도 두 명이나 새로 합류하다니…….
어제 두 명에게 죽도록 맞지 않았던가. 셋이라면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할 수 없을 터.
“도사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야비해졌나.”
눈 깜짝할 사이 새로 합류한 두 명의 원로 고수.
유진산은 장로들에 의해 품(品)자의 중심에 갇히고야 말았다.
포위가 구축되자 현호가 기수식을 취하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이곳에 침입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
그 순간 종남의 장로들은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꼈다.
포위당한 상대의 얼굴에 여유가 넘쳤기 때문이다. 결코, 막다른 길에 몰린 자의 표정이 아니었다.
“고작 셋이서 우리를 상대하겠다니, 어이가 없군.”
난데없이 우리라니? 분명 근처에는 아무도 없지 않은가. 혹시나 해서 장로들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의미지?”
그때 유진산의 검지가 꼬물꼬물 움직이며 현호를 지목했다.
이어서 그의 작은 입이 어딘가를 향해 중얼거렸다.
“이놈이 바로 종남이란 녀석이고, 저 두 놈도 같이 할아버지를 때렸던 못된 놈들이다.”
“……?”
장로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자신들에게 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의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지척의 풀숲. 고작 삼 장 거리에서 웬 여자아이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몹시 화가 난 듯 아이의 미간이 가운데로 모여 내 천(川)을 그리고 있었다.
유진산의 뒤에 있던 장로 중 한 명이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역시나 믿는 구석이 있었단 말인가? 반로환동한 고수가 한 명 더 있었다니…….”
“신경 쓸 것 없네, 현진 사제. 우리가 더 유리하니까.”
수적으로는 분명 그랬다. 삼(三)대 이(二)의 싸움이었으니.
그러나 무공이 가장 고강한 현호 장로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그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계속 저곳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어째서 저 노괴는 기(氣)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거지?’
본디 무공을 익히면 어떤 형태로든 외부로 흔적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새로 모습을 드러낸 인물에게는 조금의 기척도 느낄 수가 없었다. 반박귀진을 이룬 초인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무기조차 움켜쥐지 않은 채 맨몸으로 다가오고 있다니.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한 그의 본능이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사제들의 코앞에 당도한 아이가 소리를 빽 질렀다.
“우리 할배 왜 때렸어!? 왜에!!!”
불길한 느낌을 받은 현호는 사제들에게 후퇴를 지시하려고 했지만, 한발 늦고야 말았다.
당황한 현진 사제가 먼저 상대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안 돼!’
마음속으로 아무리 외쳐봐야 소용이 없었다.
그의 불안감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었다.
유설을 향해 호기롭게 날아드는 한 가닥의 강기.
그러나 그것이 적중하는 순간, 유설은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나 있었다.
눈으로조차 쫓기 힘들 정도로 벼락같은 움직임. 어느새 현진의 코앞에 나타난 유설은 이미 일장을 내지르고 있었다.
마치 벼락이 꽂히듯 작은 손바닥이 그의 복부를 사정없이 후려쳐 버렸다.
쩌엉-!!!
무지막지한 굉음과 함께 현진의 등 뒤로 기의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더는 완벽할 수가 없는 유가건곤장이었다.
“끄헉!”
숨이 턱하고 막혀온 현진은 단 한 방에 다리가 풀려버렸다.
그가 무릎을 꿇어갈 무렵, 그의 옆에 있던 현성이 반사적으로 기습을 이어갔다.
꽃잎처럼 퍼지는 날카로운 검기(劍氣)의 무리. 종남의 절기 중 하나인 난화십삽검(亂華十三劍)의 초식이었다.
그것을 마주한 유설이 보법을 밟자, 기이한 각도로 신형이 미끄러지며 바람처럼 흩어졌다.
스르륵-!
상대의 공격 범위를 벗어난 유설은 팽이처럼 회전하며 그의 측면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선풍보법(仙風步法). 가문의 기술로 보법을 펼칠 때의 모습이 바람처럼 움직이는 신선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당황한 현성은 자리를 이탈하려 했지만, 이미 한발 늦고야 말았다.
회전하던 가속도를 이용해 상체를 숙이는 유설. 동시에 앙증맞은 뒷발이 수직으로 솟구쳐오르며 그의 턱을 가격했다.
콰앙-!!
쓰러지는 현성 장로는 눈동자가 돌아가 흰자가 드러나 있었다. 기절한 것이리라.
모든 게 고작 한 호흡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훌륭하구나!”
가문의 무공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손녀의 모습에 유진산이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질려가는 이가 있었다.
차원을 넘어서는 가공할 무력.
홀로 남겨진 현호 장로는 마치 헛것을 보았다는 듯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화경?”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장로들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하겠는가. 사문의 원로들이 떼거리로 몰려오지 않는 이상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어서 눈빛을 확인한 현호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저들의 목표는 처음부터 자신이었음을.
유설이 오른손을 활짝 펴자 어디선가 죽봉이 날아들며 손아귀로 움켜쥐어졌다.
꽈악-!
공포. 이 순간 현호가 느낀 감정은 오직 공포뿐이었다.
죽봉을 움켜쥐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상대의 모습에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사문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도주를 결심한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이를 악다문 현호는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도주에 유진산이 화들짝 놀랐다.
다른 장로는 몰라도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목표물이었다.
“놓치면 안 된다! 어서 종남이를 잡아오너라!”
잔상을 뿌리며 쭉쭉 늘어지는 현호 장로의 경공은 일품이었다.
‘어림없다!’
경공술만큼은 문파 내에서 한 손에 꼽히는 현호였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정신없이 달리던 그는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죽봉을 움켜쥔 여자아이가 허공을 밟으며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공답보?”
둘의 간격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고, 머지않아 따라잡힐 게 분명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안심하며 몸을 돌렸다.
그에겐 따로 할 일이 있었다.
‘이 또한 강호의 섭리일지니, 나를 원망치 말거라.’
현호와 함께 쫓아왔던 두 명의 장로들을 처리해야 했다.
이대로 보내주면 언젠가 다시 적으로 만나게 될 터.
경험이 적은 어린 도사들에겐 자애로운 유진산이었지만, 강호의 주역들에겐 조금의 자비도 없었다.
우드득-!
유진산은 저항할 수 없는 그들의 목을 차례로 비틀어 편한 곳으로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가 일을 마칠 무렵. 돌연 등 뒤에서 거센 함성이 들려왔다.
“저놈이다!”
“저놈이 장로님을 살해했다!”
뒤를 돌아보자 종남산의 방향에서 검을 쥔 도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던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며 죽창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