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양괴와 음괴 (1)
화양현. 종남산에서 멀지 않은 인근 마을의 이름이었다.
머리에 꽃을 꽂은 아이 둘이 손을 맞잡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아이고, 귀여워라. 남매인가 보구나?”
“쌍둥이니? 어쩜 둘이 똑 닮았을까.”
유진산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길가에서 마주치는 어른마다 흐뭇한 미소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었기에 그냥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모처럼 신난 손녀의 모습을 보며 위안만 삼을 뿐이었다.
“우리 할아버지예요!”
부유해 보이는 어느 중년 부부가 배꼽을 잡으며 엽전 몇 개를 꺼내었다.
“하하핫. 귀엽게 생겨서 재치까지 있네. 자, 맛있는 거 사 먹어라.”
“히히. 고맙습니다!”
엽전을 건넨 부부는 아이들의 머리를 번갈아 쓰다듬었다.
좋아하는 손녀와 달리 유진산은 심정이 착잡했다.
“…….”
누가 감히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단 말인가. 그렇다고 아이의 모습으로 성을 내는 것도 무의미한 짓이었다.
‘미치겠구나. 방법을 찾아야 할 터인데.’
그가 한숨을 내쉴 무렵 유설이 손을 잡아끌며 어딘가로 이끌었다.
“할배, 우리 이걸로 맛있는 거 사 먹자! 내가 사줄게.”
주전부리 두어 개 정도는 사 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유진산도 따로 챙겨온 돈이 있었지만, 우선은 지켜보기로 했다.
아이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거리에는 노점상이 가득했으며 온갖 간식거리로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이렇게 둘이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는 것이 얼마 만인가.
지난해에도 몇 번 나오긴 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기에 지금처럼 여유가 없었다.
노점상 앞에 우뚝 선 손녀가 엽전 두 냥을 내밀며 방긋 웃어 보였다.
“아저씨, 탕후루 두 개 주세요!”
산사나무 열매에 꿀을 발라 굳힌 꼬치로 유설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능숙하게 주문하는 모습이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병상에 누워있을 때 혼자 나가서 많이 사 먹어본 모양이었다.
노점주인이 흐뭇한 미소로 꼬치 두 개를 내밀었다.
“자 여기 있다, 우리 꼬마 손님들.”
탕후루를 건네받은 유설이 할아버지한테 하나를 내밀었다.
“맛있어. 먹어 봐.”
“……음?”
탕후루라니. 애들이나 먹는 간식으로 그는 먹어본 기억조차 없었다.
하지만 손녀가 난생처음으로 사준 것을 어찌 무시하겠는가.
게다가 눈앞에서 기대 어린 표정으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유진산은 한 입을 물어보았다.
“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탄성이 절로 나왔다. 반로환동으로 입맛도 같이 어려진 것일까? 이게 맛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히히. 어때?”
“먹, 먹을 만하구나.”
시장 곳곳에는 통나무를 깎아 만든 의자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탕후루를 하나씩 움켜쥔 둘은 적당한 곳을 찾아 앉았다.
모처럼 따듯한 햇살을 받으며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유설이 품속에서 전낭 주머니를 꺼내며 물었다.
“할배, 또 뭐 먹고 싶어?”
전낭 안에서 딸그락거리는 소리는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게다가 묵직해 보이는 내용물. 믿을 수 없게도 은자인 듯했다.
엽전이라면 모를까, 은자는 아이들이 만질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도대체 이런 큰돈이 어디서 났다는 말인가. 출처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돈이 어디서 났어?”
유설이 전낭을 열어서 보여주며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지붕 위에서 주웠어. 나 이제 부자야.”
“……우리 집?”
천룡상회를 털고 자신의 몫으로 챙겨놓은 자금 중 남은 돈을 전각 지붕에 숨겨두었었다.
도대체 그걸 어떻게 발견했단 말인가.
“응! 왜에?”
시치미를 뚝 떼고, 묻는 아이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일까. 확신할 수가 없었다.
집밖에 허술하게 보관해놓은 자신의 잘못도 있었으니, 굳이 야단을 치고 싶지는 않았다.
알아듣게 설명을 해주면 될 터.
“돈을 주우면 주인을 찾아줘야 하는 거란다. 할아버지 거니깐 어서 건네 주거라.”
손녀는 오리처럼 입을 꾹 닫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반신반의한 모양이었다.
“……정말?”
“그렇다니까~ 할아버지가 언제 거짓말을 한 적이 있더냐.”
“…….”
머뭇거리며 전낭을 천천히 내미는 걸 보니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순순히 건네주는 것이 다행이었다. 안 주겠다고 버티면 힘으로는 빼앗을 방도가 없었으니 말이다.
유진산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독여주었다.
“우리 설이 착하다. 대신 할아버지가 선물을 사주마.”
선물이라는 말에 손녀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히히. 좋아!”
그렇게 잡담을 하며 나른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돌연 둘의 고개가 동시에 좌측으로 돌아갔다.
“거기 서!”
멀리 보이는 시장의 모퉁이였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며 헐레벌떡 도망치고 있었다.
찢어진 흑의에 날이 부러진 도(刀)를 움켜쥔 인물이었다. 부상을 당한 듯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으며, 머리에는 핏물이 질펀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푸른 경장 차림을 한 여섯 명의 검객이 뒤쫓고 있었다.
청의(靑衣)에 장식된 독특한 자수 문양. 무림맹의 무력단체 중 하나로 잘 알려진 청운대의 의복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설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할배, 저 아저씨는 왜 도망쳐?”
“음. 아무래도 사파를 뒤쫓는 정파의 무리로구나. 강호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
무림의 정세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강호에서 자라온 유설에게는 익숙한 단어들이었다.
“그럼 우리는 사파니까, 저 아저씨 도와줄까?”
유진산은 아이의 물음에 순간 움찔했다.
어찌하여 자신이 사파라고 생각한다는 말인가.
유가장은 엄연히 정파의 가문이었다. 아이에게 결코 사파라고 알려준 적이 없었다.
패도문의 영향을 받았던 탓일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스러웠지만, 길게 고민할 이유도 없는 문제였다.
‘뭐 상관없겠지. 정파에서 유가장을 버린 순간부터, 나 또한 정파를 버리기로 했으니.’
결심을 굳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싯적 같았으면 무림맹을 도왔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이제 무림맹이라면 치가 떨리는 유진산이었다.
“우선 가서 살펴보자꾸나.”
유진산과 유설의 신형이 동시에 날아올랐다.
타앗-!
근처의 전각 위에 올라선 둘은 지붕 위를 넘나들며 달리기 시작했다.
작은 체구로 날렵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족제비를 연상케 할 정도로 재빨랐다.
“저쪽으로 가고 있어!”
어깨를 나란히 한 유설이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십여 장 거리의 골목길. 그들과의 거리는 급격히 좁혀져 갔다.
잠시 후 사파의 무사가 기어코 막다른 길에 몰리고야 말았다.
그는 왼손으로 복부의 상처를 틀어막은 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이런 빌어먹을…….”
비좁은 길목. 입구를 틀어막은 무림맹의 무사들이 살기(殺氣)를 뿜어냈다.
“청운대를 피해 이곳까지 도망친 점은 칭찬해주지.”
“내가 순순히 죽어줄 것 같으냐?”
굳이 전체가 움직일 필요도 없다는 듯 청운대원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이미 죽어가고 있는 주제에 입만 살았군. 어서 그것을 내놓거라. 그리한다면 편히 죽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마.”
잠깐 사이 사파의 무사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져 있었다.
계속되는 복부의 출혈과 흔들리는 눈동자. 그는 확실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절대 꺾이지 않겠다는 듯 강렬히 빛났다.
“입 닥치고, 어서 덤비거라.”
“웃기는군. 잠시 뒤에도 그리 말할 수 있는지 보지.”
말을 마친 청운대원은 그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최후를 직감한 흑의인은 비장한 표정으로 날이 부러진 도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들의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두 가닥의 음영.
그것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둘 사이를 쏜살같이 파고들었다.
찰나의 순간 앙증맞은 두 개의 발이 동시에 청운대원의 앞가슴을 강타했다.
콰직-!
“크헉!”
청운대원은 달려오던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후방으로 튕겨 날아갔다.
그리고 그가 있던 자리에는 두 명의 아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그렇게 핍박하면 쓰나.”
유진산의 한마디에 모두가 혼란스러워했다.
겉모습과는 달리 연륜이 묻어나는 말투와 여유로움.
이러한 노련함들은 결코 어린아이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림에는 알려지지 않은 기인들이 많은 법.
경험 많은 무림맹의 무사들은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두 명을 몹시 경계했다.
“감히 무림맹의 앞을 막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무림맹의 이름을 꺼낸 이상 적대세력이 아닌 이상 물러서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작정하고 온 유진산에게 그럴 일은 없었다.
“무림맹이니까 막은 게다.”
그의 한마디로 명백해졌다.
적대세력임이 확인되자 청운대원들의 얼굴에 긴장과 노기가 서렸다.
반대로 등 뒤에서 신음하고 있는 흑의인의 얼굴엔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혹시 사파인들이시오?”
등 뒤에서 힘겹게 들려온 한마디.
유진산이 청운대원들의 앞을 가로막은 사이 유설이 뒤를 돌아보았다.
“네, 맞아요!”
흑의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품속에서 밀봉된 서찰을 꺼내었다.
“이것을 반드시…… 사도련에 전달해주시오.”
서찰을 건네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생명이 꺼져가는 것이리라.
하지만 유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도년이 누구예요?”
사파인이 사도련을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 말은 정파가 무림맹을 모른다는 말과도 같았다.
흑의인은 여자아이의 모습을 한 반로환동 고수가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림맹의 무사들을 앞에 두고 어찌 이런 여유를 부릴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긴장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말일 터.
‘천운이로구나. 죽기 전에 사파의 고수를 만나다니.’
내공의 힘으로 버티던 흑의인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인생의 마지막 한마디를 토해냈다.
“당신의 손에 우리 사파의 미래가 달려있소. 어서…….”
죽어가는 사람의 소원인데 무엇인들 들어주지 못하랴.
유설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얼떨결에 서찰을 건네받은 유설은 그것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흑의인은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그때 등 뒤에서 청운대의 협박이 이어졌다.
“어서 그것을 내놓거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면.”
그들과 마주한 유설은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안 돼요. 아저씨랑 약속했거든요.”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것일까? 청운대원들이 동시에 검을 치켜세웠다.
“기어코 죽음을 택하는군. 우리를 원망하지 말거라.”
움직임을 개시하는 청운대원들. 그 순간 유진산과 유설의 양손이 동시에 백학의 날개처럼 펼쳐졌다.
유가장의 자랑인 건곤장(乾坤掌)의 기수식이었다.
둘은 마치 한 몸인 양 조금의 오차도 없이 일률적인 몸짓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랜 기간 함께 수련해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양손으로 태극을 그려나가는 유진산과 손녀는 물살을 밀어내듯 동시에 일장을 내질렀다.
순간적으로 빨라진 벼락같은 속도는 청운대원들이 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쩌엉-!!!
선두에서 달려오던 두 명은 복부를 중심으로 기(氣)의 파동을 물결처럼 뿜어냈다.
비명조차 없었다. 단번에 기절한 것이리라.
그리고 건곤장의 위력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들의 등 뒤를 빠져나온 강력한 장력. 돌풍처럼 변한 기의 무리가 뒤따라 오던 두 명의 대원을 연이어 강타했다.
콰쾅-!!
두 발이 지면에서 떠오른 두 명은 후방으로 튕겨 날아가며, 다시 후미에서 오던 동료들과 충돌해버렸다.
쿠쿵-!!
“크악!”
“큭!”
눈 깜짝할 사이 여섯 명의 청운대원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단 일 합에 모두가 무력화가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청운대원들의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