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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55화 (55/238)

55화 양괴와 음괴 (2)

호현으로 돌아가는 내내 유설은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할아버지가 옷을 잔뜩 사주었으니 좋을 수밖에.

패도문의 정문이 앞으로 다가오자 보따리를 둘러맨 유설이 깡충깡충 뛰기 시작했다.

“신나!”

덩실덩실 춤을 추며 좋아하는 손녀의 모습에 유진산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리도 좋으냐.”

“응, 너무 좋아. 히히.”

“할아버지는 백규 삼촌 좀 만나고 올 테니 먼저 들어가 있거라.”

“응, 빨리 와~”

유설을 거처로 보낸 유진산은 바로 백규의 집무실로 향했다.

왼손에는 아이에게 미리 건네받은 밀봉된 서찰이 들려져 있었다.

‘사도련에 전달해야 한다고 했나?’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서열 칠 위인 사도련의 간부가 코앞에 있었으니.

내용이 궁금했지만, 서찰이 밀봉되어 있었기에 굳이 뜯어보진 않았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를 알아본 경비무사가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오셨습니까, 어르신.”

우람한 체구의 무사가 아이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응, 백규 아우 안에 있는가?”

“예. 어서 들어오십시오.”

밖에서 나는 인기척을 들었던 것일까? 문이 자동으로 열리며 반가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리 늦으셨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걱정했잖소.”

“뭐 별일이야 있겠나. 몇 가지 일이 좀 있었네.”

“자세한 건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그리하지.”

큼지막한 손이 유진산의 등을 완전히 감싸며 안으로 이끌었다.

곧이어 백규가 그의 맞은편에 의자를 빼고 앉으며 물었다.

“가신 일은 어찌 되었소? 가문의 원수는 찾으신 거요?”

유진산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혹시 창룡대라고 들어보았는가?”

“생소한 이름이오. 사도련에서도 그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소.”

“무림맹의 내부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비밀조직이라더군. 몇 세대에 걸쳐 음지에서 활동해왔다는데, 지금까지도 강호에 알려지지 않았다니 놀랄 일이지.”

백규는 화가 난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럼 정파의 편에서 싸웠던 유가장을 공격했던 놈들이 바로……?”

“맞네. 최소한 무림맹의 짓임은 확실해진 것이지.”

“쓰레기 같은 정파 놈들, 그간 뒤에서 얼마나 더러운 짓을 해왔을지 기가 차는구려. 알고 보면 협객이 아니라 협잡꾼들이오.”

“나도 어이가 없네. 도대체 강호의 협과 정의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런 것 따위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소. 그런데 놈들이 왜 그런 짓을 벌인 것이라오?”

유진산은 감정이 격해지는지, 호흡을 고른 이후에 다시 말했다.

“그래서 알아보는 중이네. 원강대사란 자가 창룡대의 훈련 교관 중 한 명이었다더군.”

“음. 나도 그 소림의 땡중을 알고 있소. 생각보다 위험한 인물이니 조심하시오.”

“자네의 입에서 위험하다는 얘기가 나오다니, 상상이 안 되는군.”

“아마 나랑 싸우면 서로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오.”

초절정고수인 백규가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니. 생각했던 것보다 무서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유진산도 이제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방법을 찾아서 맞서봐야겠군.”

백규는 유진산의 표정에서 그가 떠나려 한다는 것을 짐작했다.

“설마 소림사로 떠나실 생각이오?”

하남성에 위치한 소림사는 이곳에서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약 없는 이별을 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야겠지.”

백규의 얼굴에는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이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유일한 존재가 떠난다니 아쉬울 수밖에.

하지만 식객의 신분인 그를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운하긴 해도, 사정을 다 아는데 어찌 형님의 발목을 잡을 수 있겠소.”

“이곳에서 패도문과 맺은 인연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걸세.”

“뭐 다신 안 볼 것처럼 그리 서운한 말씀을 하시오? 우리에게 형님과 설이는 가족과 마찬가지니, 고향 생각이 나시거든 언제든 돌아오시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잠시 헤어져야겠지만, 또 만나게 될 걸세.”

말을 마친 유진산은 밀봉된 서찰을 탁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건 무엇이오?”

“오는 길에 정파에게 쫓기는 사파의 무사를 한 명 만났네. 이걸 꼭 사도련에 전달해야 한다더군.”

백규는 말없이 서찰을 뜯어 읽어보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그의 표정을 보니 반가운 내용은 아닌듯했다.

“…….”

말없이 지켜보던 유진산도 영문이 궁금해졌다.

“무슨 내용인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잠시 머뭇거리던 백규는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라오, 형님. 별 내용이 없소.”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할 유진산이 아니었다.

위기라도 닥쳐온 것일까? 내용이 궁금했지만, 사도련의 내부 일을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

백규의 표정에는 이곳을 떠나려는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서려 있었다.

유진산은 심사숙고 끝에 이곳에서 좀 더 머무르며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바로 떠날 것은 아니니 나중에 다시 얘기함세. 우리 손녀가 기다리고 있어서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군.”

“알겠소, 형님. 내 조만간 따로 찾아뵙겠소.”

* * *

거처로 돌아온 유진산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손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얘가 어디로 갔지?”

짐작되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손녀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가는 곳. 아마도 수련장에 있을 것이리라.

친구라고는 유일하게 할아버지뿐이었던 유설에게 무공 수련은 곧 놀이였다.

수련에 중독이라도 되었는지, 하루라도 거르면 금단 현상을 보일 정도였다.

‘나도 게을리해선 안 되겠지.’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뒷마당으로 나왔다.

유설은 백규가 만들어준 전용 수련장에 있을 테지만, 괜히 가서 알짱거려봐야 방해만 될 터. 손녀의 앞길을 막고 싶지는 않았다.

죽봉을 하나 움켜쥔 그는 묵묵히 마당의 중심에 서서 자세를 잡았다.

가문의 절기인 유가살풍창의 기수식이었다.

‘실전에서 써먹으려면 육성(六成)까지는 도달해야겠지.’

현재 살풍창에 대한 그의 성취도는 고작 삼성(三成) 수준에 불과했다.

예전에는 건강 문제로 수련할 수가 없었지만, 반로환동을 이룬 지금은 달랐다.

‘반드시 해내야만 한다.’

정파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소림사가 아니었던가. 구파의 말석인 종남파와는 차원이 달랐다.

어설프게 움직였다간 낭패를 당할 수가 있었기에, 출발 전에 최대한 준비를 마칠 요량이었다.

살풍창의 창결에 따라 그가 움켜쥔 죽봉이 서서히 움직임을 개시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빨라지는 동작은 곧이어 파공음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파아앙-! 파아앙-!

그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죽봉은 바람을 가르며 돌풍을 일으켰다. 본격적으로 초식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결코 밝지 못했다.

초식이 일정 부근에 도달하면 마치 벽을 만난 듯 계속해서 막혀왔다.

새로운 무공을 수련해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살풍창의 난이도가 높아서인지 문제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진산의 의지는 흔들림 없는 태산과도 같았다.

어느 순간 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하압!”

우렁찬 기합과 함께 그의 신형이 왼발을 축으로 팽이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포위당할 때 사용하는 살풍창의 초식. 회룡살참(回龍殺斬)이었다.

휘리리릭-!

죽봉이 회오리를 만들어내며 그의 몸을 휘감으려 할 때였다.

찰나의 순간 그의 발목이 삐걱거리며 균형을 잃고야 말았다.

“아악!”

바닥에 볼품없이 쓰러진 그는 한참을 신음하고 나서야 다시 일어섰다.

이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다.

또다시 창을 어깨 위로 잡아당기며 자세를 잡는 유진산.

그는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무엇인가 자신의 등 뒤를 찔러왔기 때문이다.

쿡-!

고개를 돌려보자 어느새 다가온 손녀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자신의 허리를 누르고 있었다.

“심장 떨어질 뻔했다. 인기척 좀 내고 오너라.”

“히히. 할배, 여기 명문혈에 힘이 너무 들어갔어.”

“음……?”

유설은 쪼그려 앉으며 검지로 다시 그의 왼쪽 다리를 눌렀다.

“회전하는 순간 곡천혈에 내기(內氣)를 집중해야지.”

왠지 장난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밑져야 본전이 아니던가.

살풍창의 성취도가 팔성(八成)을 넘어 구성(九成)을 바라보는 손녀였다.

“알았다. 잠시 뒤로 물러나 보거라.”

다시 한번 자세를 가다듬은 유진산은 다시 한번 회룡살참을 펼쳐보았다.

유설의 말대로 명문혈의 내기를 절반으로 줄이고, 왼쪽 다리의 곡천혈로 중심을 잡아 보았다.

휘리리릭-!

유진산이 움켜쥔 죽봉이 끝없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의 신형이 돌풍의 회오리에 갇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

그 속도가 절정에 이를 무렵. 응집된 한 가닥의 살풍(殺風)이 휘몰아치며 전면으로 쏘아져 나갔다.

파앙-!

내력을 담지 않았기에 별다른 위력은 없었지만, 실전이라면 어마어마한 위력을 뿜어낼 터였다.

초식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유진산은 몹시 기뻐했다.

“항상 이 부분에서 막혔는데, 역시 우리 설이가 최고로구나!”

유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마당의 가운데로 걸어갔다.

“옆으로 나와봐, 할배.”

뭔가를 보여줄 요량인 듯했다.

죽봉을 넘겨준 유진산은 구석으로 물러서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양손으로 창을 잡고 자세를 낮추는 유설. 완벽한 살풍창의 기수식이었다.

잠시 후 손녀가 움직임을 개시하는 순간 유진산은 입을 떡하고 벌렸다.

휘리릭-! 휘리릭-! 휘리리릭-!

한 호흡에 십수 번이나 자세를 바꿔가며 창을 내지르는 모습은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속도와 정교함. 그것을 지켜보는 유진산은 환희에 휩싸였다.

‘……이럴 수가. 벌써 구성(九成)의 화후를 돌파했단 말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손녀의 무공이 또 한 걸음을 나아간 것이다.

이제 한 단계만 더 오른다면 가문의 역대 제일 고수였던 창귀(槍鬼)의 수준에 이를 터였다.

유설의 동작은 무희의 몸짓처럼 아름다웠으며, 흩날리는 꽃잎처럼 수만 가지의 변화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죽음의 바람을 몰고 다니며, 극강의 살상력을 뿜어내는 초식들. 마치 세상에 현신한 제천대성(齊天大聖)을 보는 것만 같았다.

조금 전 자신이 펼쳤던 위력과 비교하면 천지 차이였다.

반각이 지난 후 드디어 손녀의 시범이 끝이 났다.

“훌륭하다! 아주 훌륭해!”

갈채를 보내는 유진산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가문의 유일한 핏줄이 놀라운 무예를 보여주었는데, 기쁘지 않을 조부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동안의 고생을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할배, 내일부터 나랑 수련장에 같이 가. 내가 알려줄게.”

손녀의 도움을 받는다면 수련의 속도가 열 배는 빨라질 것 같았다.

눈치는 조금 보였지만, 물불을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그래, 그리하마!”

* * *

유진산과 손녀는 대부분의 나날을 수련장에서 보냈다.

소림사로 출발하기 전에 무공 수준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을 때였다.

“어르신!”

우람한 체구의 대머리 무사 한 명이 수련장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패도문의 정찰대를 이끄는 광호라는 이름의 문도였다.

동작을 멈춘 유진산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큰일 났습니다. 진양현에 벽보가 붙었어요!”

“무슨 벽보?”

“무림맹의 수배전단이요!”

진양현은 사파의 영역인 호현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굳이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종남파를 휘젓고 나와서, 무림맹의 무사들을 공격할 때부터 이미 예견했던 부분이었으니.

과거에도 현상수배를 몇 차례 당해본 일이 있었기에 이제는 무섭지도 않았다.

“현상금이 얼마야?”

“한번 보시겠습니까? 별명까지 붙으셨던데.”

그가 건넨 전단을 살펴보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수배자: 음양쌍괴(陰陽雙怪)】

【특 징: 반로환동한 한 쌍의 노괴】

【죄 목: 종남파의 장로 두 명을 살해하였으며, 무림맹의 무사들을 기습함】

【수배등급: 양괴-일급, 음괴-특급】

【현상금: 양괴-은자 100냥, 음괴-은자 300냥】

【추 신: 무림맹 지객단】

한 가구의 일년치 생활비가 은자 세 냥인 것을 감안하면, 현상금의 규모가 작지 않았다.

인상착의와 함께 몇 가지 내용이 더 적혀 있었지만, 굳이 볼 필요도 없었다.

어이가 없다 못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음양쌍괴? 이런 미친놈들이 있나.”

무림의 마두에게나 어울릴 법한 별명이 자신과 손녀에게 붙다니.

유진산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수배전단을 찢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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