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할배무사와 지존 손녀-60화 (60/238)

60화 경험이 곧 생존력이다 (1)

몰려든 사파 성향의 무림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더러운 정파 놈들이!”

“정말 뒤에서 그런 개수작을 부리고 있었단 말이오?”

“이런 쳐죽일 놈들…….”

사도련의 총사패까지 보여준 이상 유진산의 말을 의심하는 이가 없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그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우리 섬서의 사파인들은 호현에 집결하여 맞서 싸울 것입니다! 뜻을 함께할 분들은 호현으로 와주십시오!”

주변의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화웅방의 방주 이진광! 방도들과 함께 합류하겠소!”

“나도 형제들을 데리고 합류할 것이오!”

“와아아아!”

이곳에 있는 사파의 무림인들은 고작 이십 명도 넘지 않았다. 이자들이 모두 합류한다고 한들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로 인해 소문이 급속도로 퍼져나갈 터.

섬서 전체는 아니더라도, 주변 일대의 사파 세력에게 전달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지원군이 얼마나 올지는 예측할 수 없었지만, 조금의 희망은 걸어볼 만한 상황이었다.

유진산은 주변을 둘러보며 포권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무심히 지켜보던 유설은 영문도 모른 채 할아버지를 따라 양손을 모았다.

“고맙습니다~”

목적을 달성한 이상 더는 이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유진산은 손녀의 손을 잡고 객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결전의 날 호현에서 뵙겠소이다.”

밖으로 나온 유진산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배, 누구 찾아?”

“아까 먼저 밖으로 나갔던 녀석들 말이다. 이대로 사라질 놈들이 아닌데, 뭔가 이상하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설이 두 눈을 감고 고개를 슬며시 움직였다. 마치 정신을 집중해 무엇인가를 느끼는 듯한 모습이었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뜬 손녀는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쪽에 모여 있어. 마을 입구에.”

“고얀 놈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마을 밖에 매복해 있다가, 자신들이 지나가면 덮치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어떡해?”

어차피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피할 수 없다면 싸울 수밖에. 이제 더는 늙고 쇠약한 유진산이 아니었다.

“음양쌍괴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줘야겠구나. 다신 얕보지 못하도록 말이야.”

오히려 그 말이 반가웠던 것일까? 유설은 씩 웃으며 움켜쥔 죽봉을 어깨 위로 턱 올렸다.

“히히. 빨리 가보자.”

험난한 강호에서는 강하게 키우는 것이 상책이었다.

암중모략이 가득한 세상. 경험과 강함은 곧 생존력과 다름이 없었다.

유진산과 손녀는 마을 밖을 향해 산책하듯 걸었다.

“할아버지가 했던 말 기억하지?”

“뭐어?”

“우리 설이는 너무 강하니깐 언제나 힘의 반절은 숨겨야 한다고 말이다. 자신의 힘을 모두 드러낸 자는 강호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는 법이지.”

“알아쩌!”

잠시 후 마을 입구를 벗어나자 유진산의 표정이 굳어졌다. 유설의 예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폭이 삼 장에 이르는 오솔길. 좌우의 풀숲에서 십수 명의 살기(殺氣)가 느껴졌다.

이대로 도망쳐도 되었지만, 그럴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손녀가 경험을 쌓을 좋은 기회였으니까.

유진산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손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 지금부터 할아버지가 효율적으로 싸우는 방법을 알려주마. 첫째. 적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어 방심을 유도하는 것이다. 우선 모르는 척 지나가자꾸나.

유설의 연기는 생각보다 수준급이었다.

흥에 겨운 듯 어깨춤을 추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룰루~”

그야말로 완벽히 방심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유진산은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러길 잠시 후. 좌우의 풀숲에서 무사들이 동시에 튀어나오며, 길목의 앞뒤를 틀어막았다.

“음양쌍괴! 너희들의 악명도 오늘로써 끝이다.”

인원수는 열두 명. 객잔에서 보았던 자들이었으며, 기껏해야 일류고수가 몇 명 포함된 정도였다.

유진산은 다시 손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 둘째. 적을 앞에 두고 가장 멀리해야 할 것은 바로 자만이다. 겁먹은 척을 하여 저들이 자만심을 가지도록 유도해 보아라.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유설의 연기는 기가 막힐 정도였다.

마치 다리가 풀린다는 듯 죽봉에 몸을 기댄 채 오들오들 떨어댔다.

“할배, 나 무서워. 어떡해……?”

“이거 큰일이로구나. 하필이면 이런 고수들을 만나다니.”

당황하는 음양쌍괴의 모습에 정파의 무사들은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자신들끼리 쏙닥거리는 대화에서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그러게 내가 겁먹을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았소.”

“소문은 항상 과장되는 법이지요.”

“약속한 대로 현상금은 균등분할이오.”

대화를 엿듣고 있으니 그야말로 가소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디에나 성질이 급하고 무식한 인물은 하나씩 있는 법.

“목을 베는 자의 몫은 두 배라고 하지 않았소?”

백의 경장을 입은 중년의 검객이 단독 행동을 개시할 조짐을 보였다.

그것을 눈치챈 유진산이 재차 손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 셋째. 둘이서 공격하면 힘을 아낄 수 있으며, 더욱 빠르고 쉽게 적을 제압할 수 있다.

전음이 끝나기 무섭게 백의검객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현란한 보법과 절제된 움직임. 한눈에 보아도 일류의 수준이었지만, 음양쌍괴의 눈에는 우습기만 했다.

한 발 앞으로 나와 있던 유진산은 여유 있는 몸짓으로 자세를 굽혔다.

검날이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파앙-!

유설이 움켜쥔 죽봉이 바람을 가르며 그의 가슴을 타격했다.

퍼억-!

“크윽!”

뒷걸음질 치며 밀리는 백의검객. 지금의 상황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그의 표정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 순간 그의 무릎 뒤를 향해 유진산의 죽봉이 날아들었다.

뻐억-!

“윽!”

다리가 풀린 검객은 억울하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가지고 노는 듯한 움직임. 이제야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이, 이런 사악한 것들이…….’

후회가 막심했지만 되돌리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그를 향해 쏜살같이 다가간 유설이 지면을 도약하여 얼굴에 무릎을 틀어박았다.

쩌억-!

확실하고도 깔끔한 마무리였다.

쓰러지는 백의검객은 눈이 돌아가 흰자만 드러나 있었다. 정신을 잃은 것이리라.

공교롭게도 그자는 추룡검(追龍劍)이란 별호를 가진 검객으로 이곳에서 가장 강한 인물이었다.

어이없게 당한 그의 모습에 지켜보던 정파의 무사들이 움찔거렸다.

“이 비겁한 놈들이 감히!”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냐?”

유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 수작도 안 했는데요?”

그 모습이 도발로 보였던 것일까.

남아있는 무사들의 수는 열 한 명.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그들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앞뒤에서 자세를 잡는 것으로 보아 한 번에 공격을 개시하려는 듯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눈치챈 유진산이 다시 유설에게 전음을 보냈다.

- 넷째. 최선의 방어는 바로 공격이다. 할아버지가 앞쪽의 다섯을 맡으마. 너는 뒤에 여섯을 상대하거라.

- 알았어!

손녀의 대답을 확인한 유진산은 선공을 개시했다.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그의 신형은 마치 휘몰아치는 강풍과도 같았다. 가문의 보법인 선풍보법이었다.

스르르륵-!

순식간에 자신들의 중심에 파고든 유진산의 움직임에 모두가 놀랐다.

그는 적들의 중심에서 죽봉을 움켜쥔 채 팽이처럼 회전했다.

휘리리릭-!

당황한 무사들이 다급히 물러섰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두 명이 다리를 가격당했다.

퍼퍽-!!

“크윽!”

“컥!”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 게다가 단 일 합에 진형을 무너트리다니. 무사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두 명이 넘어지기도 전에 유진산은 이미 다른 상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부러질 듯 꺾이며 바람을 가르는 죽봉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그의 공격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인정사정이 없었으며, 누구도 이 합까지 버틸 수가 없었다.

쩌억-! 콰앙-!

“크악!”

또다시 두 명의 무사가 쓰러지고, 홀로 남은 한 명은 도주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를 놓아줄 유진산이 아니었다.

제 자리에서 두 바퀴를 회전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죽봉을 있는 힘껏 던졌다.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비창술(飛槍術)이었다.

휘리리릭-!

풍차처럼 회전하며 나아가던 죽봉은 정확히 도망치던 무사의 등짝을 가격했다.

쩌억-!

“큭!”

철퍼덕 넘어진 무사를 끝으로 더는 서 있는 자가 없었다.

유진산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손녀를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속전속결로 끝마쳤기에 아직도 유설이 싸우고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쓰러져 나뒹구는 여섯 명의 무사들.

그리고 그들의 사이에서 유설이 쪼그려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끝났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는 손녀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헛웃음을 내뱉은 유진산은 죽봉을 찾아 쥐며 등 뒤로 답했다.

“수고했다. 이제 마무리를 짓자꾸나.”

“으응? 무슨 마무리?”

“다섯 번째, 마지막 교훈이다. 강호에서 쓸데없는 자비는 사치일 뿐. 쓰러진 상대는 반드시 죽…… 아니 기절시키거라.”

혼자였다면 죽였을 테지만, 아직 어린 손녀에게 그런 것을 시킬 수는 없는 일.

유진산과 손녀는 신음하는 적들의 혈도를 하나씩 누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마지막 한 명이 남았을 때였다.

“음양쌍괴……. 너희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유진산과 유설이 누워서 바동대는 그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았다.

“어이가 없구나. 먼저 공격한 것은 너희들이 아니더냐.”

유설이 옆에서 할아버지의 말을 거들었다.

“맞아요. 아저씨들이 먼저 우리 때리려고 했잖아요.”

“이런 씨…….”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곧이어 그는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이어서 말했다.

“이렇게 치욕스럽게 살아남고 싶은 마음은 없다. 농락하지 말고 어서 죽여라.”

유진산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이렇게 신념이 있는 녀석은 오랜만에 보는군. 아니, 미련하다고 해야 하나? 죽어서의 명예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다 부질없는 것이지. 이번 한 번만 살려줄 테니, 앞으로 마주치거든 알아서 피하거라.”

억울하다는 듯 핏대 선 눈동자. 그는 마치 자신의 분에 못이긴 다는 듯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냥 죽여, 이 개새…….”

더는 목소리가 듣기 싫었던 것일까? 그가 욕을 완성하기 전에 유설이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찰나의 순간 호두 같은 주먹이 그의 얼굴에 틀어박히며 바람의 파동을 뿜어냈다.

쩌억-!

단 한 방에 정신을 잃은 그는 몸이 축 늘어져 갔다.

“욕하지 마요!”

다소 호전적인 손녀의 성격이 조금 걱정되었지만, 이곳은 무림이었다.

약육강식이 바탕이 되는 강자 지존의 세상. 강인함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었다.

유진산은 손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잘했다. 이제 돌아가자꾸나.”

“벌써 집에 가?”

모처럼 나온 외출이 이대로 끝나는 게 아쉬운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손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대신 할아버지가 선물을 하나 사주마.”

언제 그랬냐는 듯 유설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히히. 정말?”

“오냐. 다음 마을의 시장에 잠시 들러 보자꾸나.”

선물이라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걸까? 유설은 돌아가는 내내 콧노래를 불러댔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순식간에 다음 마을에 도착한 둘은 시장으로 향했다.

장신구를 파는 노점상.

가락지와 노리개 등 여러 물품이 널려있었다.

“우와.”

“자,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고르거라.”

고민하던 손녀가 고른 물품은 예상외였다.

얼굴을 붉히며 집은 물건은 매화꽃이 장식된 비단 손수건이었다.

“손수건? 그건 뭐하게?”

“……그냥. 이게 마음에 들어.”

패도문의 부인들이 사용하던 것을 보았기 때문일까? 자신도 하나 갖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다소 의외의 물품이었지만 안될 것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곳까지 와서 손수건만 사기에는 뭔가 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리 설이 먹을 간식도 좀 사 갈까?”

기분이 좋아진 유설은 할아버지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응, 좋아! 히히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