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경험이 곧 생존력이다 (2)
백규와 유진산은 나란히 뒷짐을 지고 어딘가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침묵을 깨고 백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님, 설이한테 쌍창술은 언제 전수해준 거요?”
“나는 가르쳐준 적이 없네. 저렇게 할 수도 없고.”
둘은 지금 먼 곳에서 유설의 수련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 스스로 터득한 것이란 말이오?”
유진산은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문정파의 제자들도 실제로 수련에 집중하는 시간은 하루에 두 시진을 넘지 않는다. 무공을 연마하는 것은 체력과 심력의 소모가 대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설은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하루의 대부분을 수련장에서 보내고 있었다. 타고난 근골과 자질, 그리고 수련 자체를 좋아하는 독특한 성격 때문이리라.
두 자루의 목봉을 움켜쥔 채 날아다니는 아이의 모습은 마치 장판파를 질주하는 조자룡을 보는 듯했다.
“창술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기술이 바로 쌍창술이지. 우리 가문에서 저것이 가능했던 자는 오직 한 명뿐이었네. 창귀라는 별호로 불렸던 조상님이지.”
동시에 두 자루의 창을 다루는 것은 강인한 체력과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며, 창술에 정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두 자루의 죽봉이 휩쓸고 지나가는 자리로 연신 강풍이 휘몰아쳤다.
극강의 살상능력과 벼락처럼 빠른 움직임. 마치 묘기를 부리는 듯한 유설의 무예에 백규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지금껏 무림사에 저 정도의 재능을 가진 아이는 없었소. 이대로만 자란다면 전례 없는 무신(武神)이 탄생할 거요.”
“암, 틀림없지. 그 누가 저 나이에 화경에 도달할 수 있었겠는가.”
백규는 피식 웃으며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설이는 형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하오.”
“음. 무슨 의미인지 좀 더 말해 보시게.”
“형님이 병상에 누워있을 때 설이와 대련을 자주 했소. 뭐 일방적으로 당했지만, 합을 나누다 보면 깨닫는 것도 있었고. 어쨌거나 당시부터 설이는 이미 화경의 초입을 넘어서 있었다오.”
같은 화경의 경지에도 높낮이가 있는 법. 급성장하는 유설의 무공 수준은 이제 백규와 유진산이 판단할 수 있는 단계를 벗어나 있었다.
“아기 때부터 습득능력과 응용력이 남달랐네. 고작 두 살 때 제운종을 익혔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무(武)를 위해 태어난 아이일세.”
“그 말에 동의하오. 지금의 수준이면 아마 사파에서도…….”
백규는 말끝을 흐렸다. 유진산과 손녀를 사파라고 단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둘은 뭔가에 홀린 듯 유설의 움직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유진산이 소리를 차단하는 기막(氣膜)을 두르며 말했다.
“이제 이틀 남았군. 잔혹한 날이 될 걸세.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어렵지 않겠는가.”
백규는 유진산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모두의 명운이 걸린 운명의 날이 코앞이었다.
지금까지처럼 적당히 적을 제압하고 넘길 수 있는 전투가 아니었다. 목숨을 건 전쟁. 참혹한 현장에 아이를 참전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설이는 나에게도 가족이나 다름없소. 애초에 전력에 넣지 않았으니 괘념치 마오. 그것은 나도 원하는 일이 아니니.”
“이해해줘서 고맙네.”
“거 참, 신경 쓰지 마소. 흑묘파와 협상해주신 것만으로도 아우가 몸 둘 바를 모르겠으니. 눈엣가시였던 화산파가 빠지게 되었으니, 이제는 해볼 만하오.”
유진산은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사혈문과 마천회의 장로들이 다녀간 것을 보았네. 방어 준비는 다 끝났는가?”
“호현으로 들어오는 길목은 세 군데가 있소. 종남산으로 이어진 길목은 우리 패도문이 막고, 나머지 두 방향은 사혈문과 마천회가 각각 틀어막기로 했소.”
“음. 상대적으로 열세이니 좁은 길목을 막고 버티는 게 유리할 수도 있겠군. 하지만 셋 중 하나라도 뚫리면 전체가 무너지게 될 걸세.”
백규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가장 우려하던 일이었으니.
“만약 한 곳이 완전히 무너진다면 모두 패도문으로 집결하여 일전을 벌일 생각이오.”
“내가 도와줄 곳은?”
“화산파가 없으니 형님까지는 나서지 않아도 되오. 정말 괜찮으니까 설이랑 함께 피해있으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혹시라도 형님이 잘못되면…….”
유진산은 피식 웃으며 백규의 말을 가로챘다.
“걱정하지 말게, 나도 우리 설이를 고아로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 여차하면 도주한 후 훗날 패도문의 복수를 해주겠네.”
“하하! 역시 형님답소. 그럼 예비 전력과 함께 패도문에 남아 있다가, 위급한 곳이 있다면 지원해주소.”
유진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
둘은 다시 침묵을 지키며 유설의 수련 장면을 지켜보았다.
날다람쥐처럼 재빠른 움직임. 그리고 시원시원하게 창을 내지르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잠시 넋을 놓고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문주님!”
뒤쪽에서 우람한 체구의 대머리 무사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짐작되는 바가 없던 백규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동천으로 무림인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 숫자가 이미 백 명을 넘었어요.”
백규의 왼손이 은연중 허리춤의 도를 움켜쥐었다.
“믿을 수 없군. 놈들이 벌써 쳐들어왔단 말인가?”
“정파 녀석들이 아닙니다. 음양쌍괴의 요청을 받고 도우러 왔다는데요?”
패도문의 총 전력이 백 명이 안 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매우 많은 인원이었다.
난데없이 지원군이라니. 백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유진산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씩 웃으며 설명했다.
“사도련에 소속되지 않은 섬서의 중소 방파들이지. 와줄지 확신이 없었기에 아직 얘기하지 않았던 것이네. 내 선물이 마음에 드는가?”
“형님…….”
뜻하지 않은 지원군에 감동한 백규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 명 한 명의 전력이 소중한 시점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무려 백 명이 넘는 지원군이라니. 내일까지 추가로 합류할 자들까지 고려하면 무척 고무적인 상황이었다.
비록 그들 중 고수가 얼마나 포함된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제는 머릿수에서도 크게 불리하지 않겠군.”
“오히려 놈들이 겁먹고 도망치지 않을까 걱정이오.”
“아마도 정파에서 작전을 취소할 일은 없을 걸세. 섬서뿐만이 아니라, 강호 전역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거사이니, 그러할 여유도 없었을 테고.”
조금 전과는 달리 백규는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는 큼지막한 손으로 유진산의 등을 따듯하게 감쌌다.
“내 평생에 가장 큰 행운은 바로 형님을 만난 것이오.”
그의 손길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유진산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털어내며 말했다.
“이거 남자끼리 왜 이러시는가. 바쁠 텐데 어서 가보시게. 작전을 지휘하려면 새로 합류하는 자들도 만나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하. 그럼 다녀오겠소.”
백규는 멋쩍게 웃으며 부하와 함께 멀어져갔다.
유진산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녀석 참.”
* * *
날이 어둑해지고 유진산은 손녀와 마주 앉아 있었다.
팔짱을 낀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옆에는 패도문의 무사 한 명이 양손을 모으고 기립한 채 침묵을 지켰다.
“이 아저씨를 따라가거라.”
“……왜?”
“근처에 볼거리가 많다고 하더구나. 며칠 따라다니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재밌는 것도 많이 보고 와.”
“할배는?”
“볼일이 좀 있어서 같이 못 가겠구나. 재밌을 터이니 어서 다녀오너라.”
말을 끝낸 유진산은 짐짓 놀라며 당황했다. 좋아할 줄 알았던 손녀가 의외의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고개를 푹 숙인 유설이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것이 아닌가.
“…….”
“아가, 왜 울어?”
고개를 들어 올린 손녀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울먹이는 목소리에는 서러움이 가득했다.
“……나 버리려는 거야?”
“누가 버린다고 그래? 할아버지가 우리 예쁜 설이를 왜 버린단 말이냐.”
“설이 버리지 마. 히잉…….”
뭔가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었다.
유진산은 손녀를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사실 삼촌들이 설이에게 줄 깜짝 선물을 준비하고 있단다. 그러니까 모르는 척하고 어서 다녀와.”
유설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 선물을……?”
거짓말을 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선물이야 거사가 끝난 후 손녀가 돌아오기 전에 적당한 것으로 준비해 놓으면 그뿐.
“그럼!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테니깐, 신나게 놀다 오너라.”
“…….”
유설은 할아버지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결심을 굳힌 것이리라.
유진산은 흐뭇한 미소로 미리 챙겨놓은 봇짐을 아이의 등에 메어주었다.
“혼자서 돌아다니다가 길 잃어버리지 말고, 아저씨만 잘 따라다녀.”
“알았어. 나 금방 다녀올게.”
유진산은 손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길 안내를 맡은 패도문의 무사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이윽고 그에게 은자 두 냥을 건네며 말했다.
“자네 이름이 홍기라 했지? 아이가 원하는 게 있다면 아끼지 말고 잘 챙겨주게.”
“어이쿠, 뭐 이렇게 큰돈을 주십니까?”
유진산은 그의 손에 강제로 쥐여주며 등을 밀었다.
“머뭇거릴 때가 아니니 어서 출발해.”
“예, 어르신.”
유진산은 멀어져가는 홍기와 손녀의 뒷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힐끗힐끗 뒤돌아보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했다.
‘잘될 게다. 할아버지 걱정은 말고 잘 다녀오너라.’
홀로 남게 된 유진산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단전에서부터 출발한 중후한 내기(內氣)가 전신의 혈도를 순회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잠을 이룰 수가 없을 터. 운기조식을 하며 날을 지새울 작정이었다.
무엇보다 다가올 일을 대비해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는 운기조식을 하면서도 계획에 대한 점검을 잊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호현의 방어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드러난 전력만 보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으리라 계산되었다.
문제는 호현이 아닌 다른 지역의 사파 세력들이었다.
무림맹의 주도하에 벌어지는 말살 작전에서 그들 중 얼마나 생존할 수 있을지 예측이 되지 않았다. 그것에 따라 무림의 판도가 달라질 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앞으로 강호는 무림맹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겠지. 그리고…… 그다음은?’
무림맹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이것일 리가 없었다.
강호가 존재할 수 있는 법칙은 완전한 평화가 아닌 균형에 있다. 그것을 무림맹이 모를 리가 없었다.
다소 무리해서라도 적대 세력을 서둘러 정리하려는 이유.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들의 속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그들에게 또 다른 강적이라도 생긴 것일까? 기존의 다른 적대 세력들을 미리 정리해야 할 정도로?’
그 무엇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현재로서는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유진산은 점차 시간의 흐름을 잊으며 무아지경에 빠졌다.
일주천을 반복하길 수십 차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꼬끼오-!
새벽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벌써 날을 지새운 듯했다.
그래도 그는 운기조식을 멈추지 않았다.
따스해지는 체온에 다시 한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또다시 밤이 찾아온 것이리라.
그리고 다시 아침의 온기가 드리워지는 그때. 거처로 누군가가 찾아왔다.
다급히 운기조식을 마무리한 유진산은 의아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왜 다시 왔어?”
손녀와 함께 떠났던 패도문의 홍기였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어, 어르신! 혹시 설이 못 보셨습니까?”
유진산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홍기는 다짜고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야화원에서 제가 한눈을 파는 사이 그만…….”
굳이 다음 얘기는 듣지 않아도 알아챌 수 있었다.
야화원은 인파가 바글대는 섬서의 관광명소 중 하나였다. 그곳에서 아이를 잃어버린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었다.
“어지간하면 우리 설이가 네 기척을 놓칠 리가 없었을 텐데? 일단 진정하고 자세히 얘기해 봐.”
그의 얘기를 다 듣고 난 유진산은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유설이 잠시 할아버지의 선물을 사러 가겠다고 했고, 그사이 홍기는 근처의 투전판을 다녀왔다고 한다. 그리고 약속된 시간과 장소가 엇나간 것이다.
죄책감이 극에 달한 홍기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눈물을 흘려댔다.
마음 같아선 호통을 치고 싶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마당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유진산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지. 신경 쓰지 말고 고개 들어. 금방 돌아올 거니까.”
“하지만…….”
“우리 설이는 섬서의 어디라도 두 시진 안에 달려올 수가 있어. 지금은 돌아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유진산은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거처에 또 다른 손님이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어르신, 시작되었습니다! 정파 놈들이 쳐들어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