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전부 패도문으로 모여 (1)
거처를 나온 유진산은 어딘가를 향해 서둘러 이동했다.
경공을 펼치는 내내 손녀에 대한 걱정이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우리 설이가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영특한 아이였기에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자신이 병상에 누워있을 때 혼자서 먼 곳까지 경공 수련을 다녀오기도 했었으니.
게다가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가공할 무공까지 지니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끊임없이 걱정되는 것이 할아버지의 마음이었다.
‘후. 우선 눈앞의 급한 일부터 해결해야겠지.’
그가 도착한 곳은 태화각이라는 현판이 걸린 거대한 전각이었다.
패도문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문파의 간부들이 모여 대소사를 논하는 장소였다.
지금 이곳에 삼십여 명에 이르는 예비 전력이 모여 대기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어르신.”
유진산이 입장하자 모두가 일어서서 포권을 건넸다.
어른들이 어린아이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다소 어색했지만,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식객의 신분이었음에도 패도문의 문도들은 어느새 그를 의지하고 있었다.
“아우는 벌써 출발했나 보군.”
상석에 앉은 패도문의 총관 곽휘가 탁상 위로 호현의 지도를 내밀었다.
“예, 문주님께서는 바로 현장으로 달려가셨습니다. 상황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음.”
빈자리에 앉은 유진산은 깍지를 낀 채 지도를 지그시 응시했다.
종남산과 이어진 남쪽의 길목. 이곳이야말로 가장 격렬한 싸움이 예상되는 장소였다.
지금쯤이면 호현의 최강자인 패도문과 구대문파 중 하나인 종남파가 승부를 가리고 있을 터였다.
서쪽과 북쪽의 길목은 중소방파들이 몰려오는 곳으로 사혈문과 마천회가 각각 틀어막은 상황이었다.
지원군으로 참전한 사파의 무인들은 곳곳으로 나뉘어 배치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르신 덕분에 든든한 지원군도 얻었고, 가장 우려했던 화산파도 빠졌으니 우리가 불리할 게 없습니다.”
모든 문도들이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유진산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끝날 때까지는 방심해선 안 되네. 긴장의 끈을 놓지 말고 함께 상황을 지켜보지.”
“네, 어르신.”
장내는 침묵에 잠겼다.
정적이 계속되며, 시간이 흐를수록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두가 손에 땀을 쥔 채 소식을 기다리길 일식경. 드디어 기다리던 첫 번째 전보가 당도했다.
정보를 전하는 문도 한 명이 헐레벌떡 장내로 들어오며 소리쳤다.
“총관님!”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나 있었다.
“어떻게 됐어?”
모두가 기대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혈문이 지키는 북쪽 진입로의 상황이 정리되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예, 정파 놈들 꽁지가 빠지게 퇴각했습니다. 하하하!”
뜻밖의 소식에 모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와아아아!!”
“하하! 사혈문이 해낼 줄 알았어!”
“그것 봐. 우리가 이긴다니깐?”
이곳에 대기하던 패도문의 문도들은 이미 상황이 끝나기라도 한 듯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오직 유진산만이 여전히 깍지를 낀 채 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문주의 이름이 천수라고 했던가? 대단한 인물이긴 했지.’
약 오 년 전. 백규와 싸우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훤했다. 비록 팔 하나를 잃고 패배했지만, 초절정고수에 도달한 천수의 무공은 명불허전이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때 총관 곽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음. 무림맹에서도 우리가 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네. 그런데도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괜한 우려입니다. 사혈문이 나머지 두 곳을 지원하면, 이제 안정적으로 막을 수 있어요. 곧 있으면 상황이 종료될 것입니다.”
유진산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모략이 가득한 무림이 언제부터 우리의 생각대로만 움직이는 곳이었더냐.”
작은 체구로 내는 애들 목소리에 무게가 실릴 리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곽휘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르신. 저희는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화산파가 빠진 이상, 섬서에서 우리의 유일한 호적수는 종남파 뿐입니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자신의 우려가 기우이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장내는 고요에 휩싸이고, 다시 일각이 지났을 때였다.
불길한 느낌은 빗나가지 않는다고 했던가.
“총관님!”
또 한 번의 전보가 도착했다.
“……?”
소식을 전하는 무사는 다소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확장된 동공과 떨림이 멈추지 않는 양손. 마치 무엇인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한 듯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소식에 모두가 충격에 휩싸였다.
“……서쪽 진입로가 무너졌고, 마천회의 회주가 사망했습니다.”
총관 곽휘는 마치 헛것을 들었다는 듯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뭐라고? 도대체 어떻게!?”
“진법까지 펼치며 대항해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그에게…….”
“‘그’라니? 마천회의 진법이 한 명에게 무너졌단 말이야? 도대체 누가!”
도대체 그 누가 혼자서 일개 세력을 무너트릴 수 있단 말인가.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다음 말이 이어지기 전까진 말이다.
“모용성……. 모용성이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모용성이 누구인가. 철혈검객(鐵血劍客)이란 별호로 통하며, 무림의 오대세가를 대표하는 최강의 고수 중 일인이었다.
“모, 모용성이라니?
“모용성이 왜 이곳에 나타나!?”
정보를 전달하는 일개 문도가 그것을 어찌 알겠는가.
모용세가는 섬서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무림맹의 섬서 지부에 몰래 들어와 대기라도 하고 있던 것일까? 그가 이곳에 나타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절대고수의 등장으로 인해 모두가 어쩔 줄을 몰랐다.
보다 못한 유진산이 죽창을 움켜쥔 채 자리를 박찼다.
“언제까지 머뭇거릴 거야? 이러다 다 죽어!”
유진산의 호통에 정신이 번쩍 든 곽휘가 문도들에게 다급히 지시했다.
“너희 둘은 문주님과 사혈문에 이 사실을 전하고, 나머지는 모두 따라와!”
서쪽 진입로가 뚫린 이상 흩어져서 싸우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패도문과 사혈문의 주력이 이곳에 한데 모여 일전을 벌여야 할 터. 그들이 모용성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줘야 했다.
태화각을 뛰쳐나온 이들은 머뭇거림 없이 질주를 개시했다.
선두에서 내달리는 곽휘의 옆으로 유진산이 따라붙으며 물었다.
“모용성이란 녀석, 얼마나 강하지?”
“화경에 도달한 자입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정도의 전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백규와 사혈문의 문주 천수, 그리고 자신까지 동시에 협공을 펼쳐도 장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럼 어쩔 생각인가?”
“물러서지 않고 싸워야지요. 그것이 우리 패도문의 방식입니다.”
곽휘의 말에 유진산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호통을 쳤다.
“미친놈아! 아무런 작전도 없이 그냥 가서 죽자는 거야?”
“패도문에겐 오직 직진뿐입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 그의 표정에는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었다.
중원에서 이들보다 무식한 문파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유진산은 이곳에서 개죽음을 당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내게 생각이 있으니 일단 멈춰 봐.”
곽휘가 한 손을 높이 올리자 모두의 경공이 동시에 정지했다.
“수단이 있는지요?”
유진산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을 주민들에게 미리 공표를 해두었기에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구조를 살피던 그의 시야에 적당한 건물이 잡혔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이 층 구조의 전각 두 채.
매복이 통할 상대는 아니지만, 지형지물이든 뭐든 가능한 것은 모두 이용해야만 했다.
“이 정도의 전력으로 근접전을 벌이면 잠시도 시간을 끌 수가 없네. 문도들을 반으로 나누어 전각 위에 분산 배치하게. 암기는?”
“인당 비도 두 개씩 소지하고 있습니다.”
“내가 방법을 찾아볼 테니 이곳에서 잠시만 버텨주게. 암기가 필요하면 돌멩이를 던지든 지붕을 뜯어 던지든, 근접전은 최대한 피하게.”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였다.
결심을 굳힌 곽휘가 문도들을 향해 손짓했다.
“좌우로 나뉘어서 매복한다. 어서 움직여!”
시간이 많지 않았다. 패도문의 무사들은 지면을 박차고 좌우의 전각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 시점에서 유진산은 어디로 자취를 감췄는지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적들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모두의 동공이 흔들렸다. 겁에 질린 얼굴로 쫓기듯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호현의 무사는 아니리라. 지원군으로 참전한 사파 성향의 무림인들로 보였다.
그들이 가까워지자 전각 위에 숨어있던 곽휘가 소리쳐 물었다.
“이보시오! 어찌 된 일이오?”
사파의 무사들은 전각 위를 쓱 흩어보더니 그대로 달렸다.
겁에 질린 그들에게 호현의 무사들은 심적으로 도움이 되질 않았다.
“모용성이 오고 있소!”
“마천회도 전멸했으니, 살고 싶으면 어서들 도망치시오!”
곽휘는 이미 사기가 꺾인 그들에게 같이 싸우자고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그들의 등 뒤를 향해 소리쳤다.
“호현의 모든 사파인들이 패도문의 장원으로 집결할 테니, 그곳으로 가보시오!”
그들이 합류할지 이대로 잠적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당장 자신들의 처지가 한 치 앞을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잠시 후 사파인들이 나타났던 방향에서 거대한 무엇인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뚜렷해지는 흐릿한 음영. 분명 사람의 인영이었지만, 마치 거인(巨人)처럼 보였다.
‘……모용성.’
군자처럼 단정한 외모를 지닌 그는 백학이 자수된 백의를 입고 있었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검을 사선으로 내리깐 채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의 모습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마치 거대한 산이 다가오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백여 명에 이르는 정파의 무사들이 그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붙고 있었다.
‘오늘 살아남기는 틀렸구나.’
곽휘는 긴장한 얼굴로 부하들에게 대기하라고 손짓을 보냈다.
다가오던 모용성은 정확히 패도문이 매복한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더니 전각 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살기와 혐오가 담긴 깊은 눈동자.
그와 눈빛을 마주친 자들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버러지 같은 것들.”
그는 마치 사파인들을 혐오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총관 곽휘는 점차 다급해졌다.
이대로라면 부하들이 공격 의지를 상실하게 될 터. 곽휘가 먼저 비도를 던지며 소리쳤다.
“투척!!”
기다렸다는 듯이 모용성의 좌우에서 암기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파앗-! 파파팟-!
그가 움켜쥔 검이 마치 수십여 개로 늘어난 듯 보였다.
검날에 가로막힌 암기들이 연달아 튕겨 나가며 경쾌한 소리를 뿜어냈다.
텅-! 터텅-! 터터텅-!
단 하나도 그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공격이 통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었다. 단지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을 뿐.
암기는 빠른 속도로 소진되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모용성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지면을 박차고 하늘 높이 떠오르는 그의 모습엔 여유가 넘쳤다.
패도문의 무사들이 용기 내어 대항을 해보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콰앙-! 써컥-! 푸욱-!
전각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참살하고 다니는 그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가 지나는 자리마다 어김없이 패도문의 무사가 갈대처럼 쓰러져갔다.
그렇게 여섯 명이 쓰러졌을 찰나였다.
돌연 어디선가 거센 고함이 뿜어져 왔다.
“멈춰라!!”
쩌렁쩌렁하게 메아리치는 어린아이의 목소리.
그 안에 내포된 무지막지한 내공이 모용성의 흥미를 자극했다.
“……?”
모두가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놀랍게도 정파의 대열 후미 부근이었다.
“멈추지 않으면 이놈을 죽이겠다!”
놀랍게도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무림맹의 무사 한 명을 제압하고 있었다.
모두가 한눈을 판 사이 은근슬쩍 다가가 행동을 개시한 유진산이었다. 정파의 심법으로 내공을 수련한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그의 인상착의를 알아본 누군가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음양쌍괴!?”
음양쌍괴라는 말에 모용성의 미간이 꿈틀댔다.
전각의 지붕 위에서 뛰어내린 그는 유진산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유진산은 모용성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긴장하지 않았다. 정파의 습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높은 곳에 오른 자일수록 더욱 명예에 집착하는 법이지.’
정파인들에게 추앙받는 모용성이 인질을 무시하고 공격을 개시할 리가 없었다. 그러기엔 지켜보는 눈이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역시나 그는 예상대로 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네놈이 양괴로군. 소문대로 교활한 놈이구나.”
유진산은 코웃음을 치며 무릎 꿇은 자의 목에 창날을 밀착시켰다.
“교활한 놈들을 상대하려면 더 교활해질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