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음괴의 각성 (1)
두 눈을 가린 이유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드디어 유설이 질주를 개시했다.
양손에 움켜쥔 두 자루의 죽봉은 마치 황소의 뿔처럼 곤두서 있었다.
시야가 보이지 않음에도 움직임에는 조금의 부자연스러움도 없었다.
타앗-!
벼락같은 움직임. 목표지점은 모용성이었다.
백여 명의 정파인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유설은 그들의 정중앙을 직선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앞을 막아선 무사들은 반사적으로 검을 움직여갔다. 그리고 그것은 유설의 감각을 여지없이 자극하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용수철처럼 솟구쳐오르는 죽봉이 가장 앞에 서 있던 자의 턱 밑을 가격했다.
쩌억-!
상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어느새 자세를 낮춘 유설은 재빨리 회전하며, 다가오는 두 명의 다리를 후려치고 있었다.
퍼퍽-!
“크윽!”
“컥!”
곧이어 넘어지는 그들의 안면에 죽봉 두 자루가 신의 징벌처럼 내리꽂혔다.
빠각-!
유설의 움직임은 잠시의 멈춤도 없었다.
빠른 속도로 전진하며 두 자루의 죽봉을 휘둘러대는 모습은 무쌍 그 자체였다.
쩌억-! 쾅-! 콰쾅-!!
“크헉!”
“큭!”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서너 명씩 쓰러져 나갔다.
마치 아이의 모습을 한 선인(仙人)이 두 자루의 죽봉을 들고 춤을 추고 있는 듯했다.
비록 손수건으로 시야를 가린 상태였지만, 그것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선음지체의 근골이 지닌 타고난 오감.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화경의 감지능력은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의 움직임조차도 포착할 정도였으니.
“막아!”
누군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벼락처럼 빠르고, 폭우처럼 몰아치는 쌍창술에는 적당히라는 것이 없었다.
쩍-! 쩌적-! 쾅-!
유설이 지나가는 자리엔 갈대처럼 쓰러진 정파인들만 널려있을 뿐이었다.
뼈가 부러지고, 관절이 꺾이는 정도는 오히려 그들에게 다행이었다.
누구든 죽봉에 적중당하면 단 한 방에 전투 불능을 면할 수가 없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정파인들 중 겁에 질린 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크악!”
“컥!”
멀찍이서 지켜보던 종남파의 현호 장로는 정신적인 발작이 찾아왔는지 경련을 일으키려 했다. 그냥 놔두면 주화입마에 빠질 정도로 그의 상세는 좋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놀랍게도 저항하지 않는 자는 공격을 받지 않았다.
선공을 개시하거나 앞을 막아서는 자만이 응징을 당하며 쓰러져 나갔다.
그리고 어느덧 유설의 앞을 가로막은 자는 단둘밖에 남지 않았다.
모든 것이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 그들의 틈새를 파고들며 죽봉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휘리리릭-!
풍차처럼 회전하는 죽봉은 정확히 모용성의 미간을 향하고 있었다.
비창술(飛槍術). 무지막지한 내력이 담긴 한 수였지만, 상대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카앙-!
모용성의 검날이 곡선을 그리며 죽봉을 튕겨내는 그 순간.
유설이 매처럼 날아들며 또 다른 죽봉으로 그의 얼굴을 후려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이었다.
‘어림없다.’
시퍼런 강기를 머금은 검날이 처음으로 죽봉과 일 합을 교환했다.
콰아앙-!!
거센 충돌과 함께 모용성의 신형이 후방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유설 또한 충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천근추와 죽봉을 사용해 버텨냈을 뿐.
둘 사이의 간격이 벌어지고, 대치가 시작되었다.
이제야 유설은 눈을 가린 손수건을 풀고는 옆을 슬쩍 돌아보았다.
방금 지나온 자리에 널브러진 수십여 명의 무사들. 그리고 자신의 발치에서 숨을 헐떡이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할배, 괜찮아?”
유진산은 말을 하는 것조차 힘든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겨우 쥐어 짜냈다.
“아가……. 위험한 놈이니 어서…… 피하거라.”
이대로 물러설 유설이 아니었다.
아이의 시선은 어느덧 몸을 겨우 일으킨 백규를 향했다.
“삼촌, 우리 할배 데리고 잠시 비켜있어.”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백규는 유진산을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곧이어 그를 부축하듯 옆구리에 끼고는 구석으로 이동했다.
전투는 잠시 정지되었고, 모두의 시선은 모용성과 음괴의 싸움에 집중되어 있었다.
둘의 승패가 모두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터. 지켜보는 자들은 자신들이 싸우는 것처럼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그때 모용성이 왼손을 뒷짐 쥔 채 오른손에 쥔 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드디어 만났군, 음괴. 지금부터 이 검으로 너의 죄를 묻겠다.”
그를 바라보는 유설의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감히 우리 할배를 때렸어? 두들겨 맞을 준비나 해.”
듬직한 지원군의 등장에 사파의 무사들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무신(武神)의 운명을 타고난 아이. 유설의 존재는 절망 속에 도래한 한 줄기 광명과도 같았다.
주변의 무사들이 거리를 벌리자 넓은 공간이 마련되었다.
유설과 친분이 있는 패도문의 문도들이 울먹이는 눈빛으로 응원을 보냈다.
“설아, 너는 할 수 있어.”
“너밖에 없다, 설아!”
“아주 묵사발을 내버려…….”
그러나 모용성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여유 넘치는 거만한 표정. 게다가 자신의 무공을 과시하듯 선공을 양보하려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의 자신감에 정파의 무사들이 선망의 시선을 보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조금 전부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인물.
종남파의 현호 장로를 발견한 유설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참나. 종남이 친구였네?”
의미를 알지 못하는 모용성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지인 중에 종남이란 이름은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
말을 이어가던 그의 미간이 급격히 좁혀졌다. 어느새 유설이 눈앞에서 죽봉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싸움의 기본에 충실한 기습. 게다가 섬전 같은 속도는 무시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모용성은 다급히 검을 잡아당기며 방어 동작을 개시했다.
까앙-!!
죽봉과 검날이었지만, 마치 뭉툭한 쇠몽둥이가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을 시작으로 유설의 연격이 시작되었다.
모용성의 접근을 완벽히 차단하며 몰아치는 공격이 일품이었다.
창술의 기본은 긴 타격거리를 이용해 공격으로 방어를 대신하는 것이다. 무기에 맺힌 강기를 포함하여 최소 일 장 이상의 공간을 지배할 수 있다.
카캉-! 카카캉-!!
작은 체구에서 어찌 저렇게 무지막지한 힘이 나온다는 말인가.
접근조차 쉽지 않은 창술이라니. 모용성은 곤욕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오래 가지 못했다.
철혈검객이 누구인가. 경험이 풍부한 모용세가의 제일 고수였다.
어느 순간 그의 신형이 활처럼 꺾이며, 기이한 각도로 미끄러졌다.
모용세가의 독문 기술인 유궁보법(流弓步法)이었다.
스르르르-!
눈 깜 짝할 사이 그는 어느새 유설의 측면을 파고들고 있었다.
정확히 급소를 노리며 파고드는 모용성의 검날. 회심의 일격이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죽봉에 비껴나가고야 말았다.
쩌엉-!
공격을 튕겨낸 유설은 반격을 시도하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모용성의 신형이 또다시 기이한 각도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모용세가의 기술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승기를 잡으며 여유가 생겨났기 때문일까? 모용성이 본격적으로 초식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마치 유성우처럼 눈부신 강기의 빛무리가 유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이잇!”
위기를 느낀 유설은 이를 악다물며 손에 쥔 죽봉을 전광석화처럼 흔들어댔다.
그러자 죽봉의 끝이 수십여 개로 갈라지며 다가오는 강기를 향해 다가갔다.
쾅-! 카카카캉-!!
막아내는 것은 성공했지만, 모용성의 공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번 시작된 초식은 끝이 없이 계속되었다.
폭포수처럼 퍼붓는 맹공.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진정한 고수의 위용은 놀라웠다.
카캉-! 카카캉-!!
오대세가 중 하나인 모용세가의 기술들은 유가장의 것을 압도하고 있었다.
게다가 끊임없이 펼쳐지는 허초와 속임수까지. 대련을 통해 살초를 구별하는 법을 터득하지 않았다면 버티지 못했을 정도였다.
조금씩 뒷걸음질 치는 유설은 방어가 위태로워 보였다. 쓰러지지 않는 것이 경이로울 정도였다.
어느 순간 초식의 연계가 한 차례 마무리되며 밝은 빛이 번쩍였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둔탁한 소리.
쩌엉-!!!
유설은 두 발로 지면을 끌며 주르륵 밀려났다.
그런데도 반사적으로 다시 자세를 잡는 모습은 기가 질릴 정도였다. 게다가 맹호처럼 빛나는 두 눈까지.
그 모습은 태생적으로 타고난 싸움꾼의 기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무리를 했는지 안색이 다소 창백해져 있었지만, 용케도 부상은 없는 듯했다.
간격이 벌어진 둘은 잠시 떨어져서 한 차례 호흡을 골랐다.
모용성의 얼굴에서는 감탄이 떠나질 않았다.
“놀랍군. 지금까지 나의 검을 이 정도로 버텨낸 상대는 단둘뿐이었다. 아니, 이제 셋인가?”
유설이 천부적인 무(武)의 재능과 감각을 타고났다면, 모용성에겐 노련한 경험이 있었다.
무엇보다 서로가 익힌 독문 무공의 위력에서도 비교가 불가능했다.
이대로라면 승패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아니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를 쥐어짜는 누군가의 고함이 들려왔다.
“도망쳐라, 설아! 너라도 살아야 사파의 미래가 있다!”
처참한 몰골로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는 백규였다.
어차피 끝난 마당에 유설이라도 내보낼 생각인 듯했다.
그리고 그의 허리춤에는 몸을 기대어 숨을 헐떡이는 유진산이 붙어 있었다.
“아가 어서…….”
죽어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자 유설의 두 눈에 다시 불똥이 튀었다. 이어서 나직이 실룩거리는 작은 입술.
“할배.”
“……?”
“할배, 나 힘 다 써도 돼?”
그 순간 무엇인가 번뜩 생각난 듯 죽어가던 유진산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러고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실전에서는 마지막까지 힘의 반절을 숨겨놓으라고 손녀에게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설마 그것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었다니.
유진산도 손녀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몰랐다. 단 한 번도 모든 힘을 쏟아부은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자신의 허락 없이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봉인해놓은 것이 있었다.
살상력이 너무 강하여 실전에서는 사용하지 못하게 했던 무공.
가문의 역대 제일 고수인 창귀(槍鬼)에 의해 다시 한번 향상된 살풍창(殺風槍)이 남아있었다.
아직 세상에 드러내지 않은 절세무공이었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지금은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유진산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살풍창도 허락하마.”
허락이 떨어지는 순간 유설의 기세가 돌변했다.
무형의 기(氣)가 휘몰아치며 돌풍을 일으켰다.
호흡을 옥죄는 중압감. 만인을 압도하는 기세는 절대고수의 각성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듯했다.
정파, 사파 할 것 없이 주변의 무사들이 기겁하며 더욱 거리를 벌렸다.
“뭐, 뭐야?”
“헉!”
“저, 저게 바로 음괴의 본 모습……?”
유설을 마주하고 있는 모용성은 안색이 굳어졌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것이리라.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자세를 바짝 낮춘 유설은 죽봉을 사선으로 치켜세우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종남이 친구. 이제 넌 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