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하후세가의 망나니들 (2)
“그게 정말이야?”
“아버님이 깨어나셨다고?”
곳곳에 흩어져 있던 식솔들이 가주의 전각이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다섯 명의 아들이 죽었기 때문일까? 쇠약한 노인들과 아기를 안고 있는 여성들이 많이 보였으며, 젊은 장한은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털썩-!
가주 동운걸.
며칠 만에 정신이 돌아온 그는 문 앞으로 나와 마루 맡에 걸터앉았다.
“아버님, 정신이 드십니까?”
막내아들 동석이 그에게 물이 담긴 죽통을 건네었다.
받아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가주는 소매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꿈을 꾸었다.”
“예? 꿈이라니요?”
“우리 셋째 아들 동구가 호랑이를 타고 돌아와서 하후세가를 물어뜯는 꿈 말이다.”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듣기만 해도 통쾌한 내용이었다.
얼굴이 조금 밝아진 동석이 옆에서 기립하고 있는 동구를 쓱 바라보았다.
“호랑이 대신에 예쁜 손주들을 데리고 왔지요.”
가주는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맞은편의 작은 전각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지금 유진산과 유설에게 밥을 먹이고 있는 장소였다.
“……석아.”
“예, 아버님.”
“네가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느냐.”
“십오 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리도 보는 눈이 없느냐?”
동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우리 동구가 호랑이가 아닌, 용을 데려온 것이 네 눈엔 안 보이더냐.”
“무슨 말씀이신지……?”
어리둥절하기는 동구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알기로는 나루터에서 만난 착한 아이들일 뿐이었다.
그러나 방금 정신을 차린 아버지의 말에 토를 달 수도 없는 노릇.
“아버지가 용이라면 용인 것이지요.”
동운걸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내 손녀의 이름을 설이라고 지었다고? 예쁘장하니 나중에 크면 절세미인이 되겠더구나. 그리고 우리 손자는 한 시진 후에 내게 데려오너라. 직접 시험해 봐야겠으니.”
“예? 시험이라니요?”
“숨기려 해도 알고 있다. 이미 그 아이의 무공이 절정에 이른 것을 말이다. 우리 가문에 그런 자질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을 줄이야……. 아주 잘 키워냈다, 동구야.”
가주인 그는 이곳에서 가장 뛰어난 고수였다. 단지 오래전에 무림을 은퇴하여 뼈가 굳었을 뿐. 그렇기에 기를 감지해내는 능력과 눈썰미가 남달랐다.
그러나 유진산이 일부러 자신의 기를 흘려보내지 않았다면, 어찌 알아챌 수 있었겠는가.
그렇기에 그는 진실을 모르고 있었다. 유진산의 실력이 절정을 넘어선 초절정의 수준이라는 것을.
어쨌거나 동운걸의 말에 식솔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절정고수. 명문정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동가장처럼 작은 무가에서는 가주 정도는 되어야 오를 수 있는 지고한 경지였다.
그들은 가주의 정신이 조금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예에?”
“절정이라니요……?”
동운걸은 마당에 가지런히 놓인 관으로 다가갔다.
“우선 우리 철이 녀석의 장례부터 마무리하는 것이 순서겠지. 그리고 다음을 준비하자꾸나.”
언제까지고 슬픔에만 젖어있을 수는 없었다.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 참사가 아니던가.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었고, 나흘 뒤면 다시 하후세가에서 찾아올 터. 그 안에 빨리 무엇이든 대비를 해야만 했다.
* * *
시기를 고려해 장례는 약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일이 끝난 후 유진산은 할당된 방 안에서 손녀와 마주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며칠 머물러야겠구나.”
“나는 좋아. 할배는?”
“음. 우리 설이가 좋다면 할아버지도 좋지.”
할아버지가 동구 아저씨를 돕는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것일까? 유설의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히히.”
이곳에 며칠 머무른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차피 유진산도 동구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들이 있는 상황이었으니.
조손이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문을 열었다.
“이름이 산이라고 했지? 잠시 좀 나와 보거라. 할아버지가 찾으시는구나.”
“예.”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유진산은 유설과 눈빛을 교환하고는 홀로 중년의 부인을 따라 이동했다.
“음. 산이는 원래 그렇게 말이 없니? 설이 누이와는 반대로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구나.”
“……예.”
유진산은 최대한 말을 아꼈다. 아이들의 말투가 어색할뿐더러, 그리 유쾌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문을 모르던 부인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걸었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장원 뒤편에 있는 작은 연무장이었다.
백발의 노인이 검 하나를 움켜쥔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식솔들.
그중 두 아들의 얼굴엔 걱정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버님, 무리하지 마십시오.”
“그러다 허리라도 다치시면 어쩌시려고요.”
식솔들이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가주가 마지막으로 검을 잡은 적이 수십 년 전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데도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무너지는 가문을 직접 일으켜 세우겠다는 의지.
그를 눈앞에 마주한 유진산은 자신의 옛 모습이 떠올라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네가 우리 가문의 유일한 희망이다. 부디 할애비의 짐작이 적중했길 바라마.”
동운걸은 목검도 아닌 진검을 움켜쥐고 있었다.
게다가 그것을 어린 손자를 향해 겨누다니? 기껏해야 무공을 알려준다고 생각했거늘,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행동이었다.
“아버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손자한테 무슨 짓을…….”
“어서 좀 말려 봐요.”
막내아들인 동석이 다가가려 했지만, 곧이어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동운걸이 절정고수의 기세를 발출했기 때문이다.
“으윽!”
식솔들은 가주의 행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중에는 동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을 도와주려는 아이를 어찌 위험에 빠트릴 수 있겠는가.
“안 됩니다, 아버지!”
“시끄럽다!”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동운걸은 이미 행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유진산의 목을 향해 나아가는 검날.
단번에 아이의 수급을 잘라낼 것처럼 예리한 공격에 모두가 놀란 눈을 부릅떴다.
흔들림 없이 평온한 인물은 오직 당사자인 유진산뿐이었다.
그는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살기(殺氣)가 깃들지 않은 허초임을. 아마도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리라.
가만히 있어도 되었지만, 이제는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동구를 돕기 위해선 실력을 어느 정도는 드러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유진산은 상체를 슬쩍 비틀며 최소한의 동작으로 검을 피해냈다.
파앙-!
검 끝이 유진산의 코앞을 스쳐 지나가며 바람을 뿜어내는 그 순간. 동운걸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공격은 단발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다.
점점 더 빠르게. 그리고 더욱 강하게.
그런데도 유진산이 회피하는 움직임은 여유롭기만 했다.
연무장의 구석에서 지켜보던 식솔들은 마치 헛것을 보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반대로 동운걸은 환희에 휩싸여갔다.
“대단하구나! 정말 대단해!”
가주의 검술은 제법 훌륭했다.
절정의 수준을 의심치 않게 하는 속도와 날카로움.
하지만 뼈마디가 굳었기 때문일까? 움직임에는 유연함이 없었고, 한 손에 의지하며 휘두르는 공격이 대부분이었기에 피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잠시 후 공격을 멈춘 동운걸은 미친 사람처럼 껄껄 웃어댔다.
“허허! 허허허!!”
첫 번째 사건이 터진 날로부터 처음 보인 웃음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지금은 슬픔을 억누를 수 있을 정도로 기쁜 순간이었다.
식솔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이렇게 웃는 가주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우리 손자, 한 번만 안아보자꾸나.”
그는 아이를 번쩍 들어 왼쪽 가슴에 안았다.
동운걸의 품에 안긴 유진산은 심정이 착잡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아이 취급을 당하다니.
어색하고 적응이 되질 않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보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정도로 기구한 운명.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닮은 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 친구야.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나. 오늘만큼은 내가 다 양보할 테니, 하고 싶은 대로 해보시게나.’
짐작하건대 동가장의 가주는 자신의 실제 나이와 비슷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묘한 동질감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머릿속을 비우고 그냥 멍하니 상황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가주의 품에 안긴 자신은 어느새 동구의 눈앞에 이르러 있었다.
“우리 동구가 정말 장한 일을 했구나. 내 핏줄인 덕도 있겠지만, 네가 잘 키우지 않았으면 불가능했겠지.”
“…….”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동구는 지금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방금 본 광경이 마치 헛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산이의 무공이 어떻게 이리도 급하게 성장한 것이냐. 네 실력으로 키웠을 리는 없고.”
동구는 다급해졌다.
상황이 잘 정리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빨리 결정을 내려 대꾸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이미 자식이라고 말한 사실을 다시 거짓말이었다고 번복할 수도 없는 노릇.
게다가 사실대로 말하면 아버지가 실망감에 다시 쓰러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차피 한번 시작된 거짓말. 조금 더 보탠다고 달라질 것은 없겠지.’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결심을 굳힌 동구는 비장한 표정으로 나직이 말했다.
“기연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훌륭한 스승을 만났습니다.”
“역시 그렇겠지. 정상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래, 스승이 누구였더냐?
동구도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그는 자신이 소문으로 들어봤던 가장 강한 고수 중 한 명을 골라 둘러댔다.
“검선(劍仙)이라는 별호를 가진 분이십니다. 들어보셨는지요?”
“뭐, 뭣이? 그 말이 사실이더냐?”
어찌 모르겠는가. 검술의 경지가 신선에 도달했다는 고수를 말이다.
또한, 무림을 대표하는 십대고수 중 한 명인 것으로도 유명했다.
“정, 정말입니다. 겨우 세 살 때 그분의 눈에 띄어 제자가 된 후 외진 산속에서 오 년 동안 진전을 이어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애가 말수가 없어진 것이고요.”
동구는 당황한 나머지 횡설수설 떠들어댄 자신을 원망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인 거지?’
정신이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아버지는 쉽게 수긍하는 눈치였다.
“암. 검선이 우리 손자의 근골을 보고 탐이 났던 모양이로구만. 그래야 말이 되지. 그래, 그분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검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하후세가 따위 걱정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기대는 기대일 뿐. 이어진 동구의 말에 그는 실망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검후와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어차피 수십 년 전에 강호에서 은퇴한 아버지였다. 아무렇게나 지어낸다고 한들 어찌 알겠는가.
강호의 어딘가에 있을 검선이 들었다면 까무러칠 일이었지만.
“그렇구만. 역시 우리의 힘으로 해결해야겠지. 하지만 이 아이가 있는 이상 문제 될 것은 없다.”
“……무슨 생각이신지요?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도 경험이 부족한 이상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가주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동구를 바라보았다.
“동구야.”
“예, 아버님.”
“너 같은 수준은 백 명이 모여도 이 아이를 당해낼 수가 없다. 네 자식에 대해서 잘 모르면 자신의 주제라도 알아야지, 어찌 그리도 경솔한 소릴 하는 게냐.”
“그래도…….”
“걱정하지 말거라. 이미 결정했으니까.”
“……예? 무엇을요?”
지켜보던 식솔들이 가주의 입으로 시선을 모았다.
“우리 산이에게 나의 내공을 전해주겠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뭉개줄 수 있도록 말이지.”
너무나도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남에게 자신의 내공을 전해주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며,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안 됩니다, 아버지!”
“그러시다가 돌아가실 수도 있어요.”
동운걸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는 듯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어차피 나는 얼마 못 살아. 놈들이 무너지는 것만 볼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
가주가 고집을 부렸지만, 정작 당사자인 유진산은 지금의 상황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동가장의 핏줄도 아닌 자신이 어찌 그의 내공을 받는다는 말인가.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조심스럽게 첫 말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