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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72화 (72/238)

72화 하후세가의 망나니들 (3)

“제 몸은 내공을 받지 못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할아버지가 준다면 ‘고맙습니다’하고 냉큼 받아야지, 못 받는다니?”

“이미 단전이 가득 채워진 상태입니다.”

내공을 담을 수 있는 단전의 크기는 나이와 경지에 따라 다르며, 심법의 종류에도 영향을 받는다.

그렇기에 무한정으로 내공을 축적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이 나이에 단전이 가득 차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우리 산이가 할아버지를 놀리는구나.”

유진산은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그리고 동구가 시작한 거짓말에 조금 더 보태기로 작정했다.

“스승님께서 부상으로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게 내공을 좀 나눠주셨습니다.”

동운걸은 의아한 표정으로 유진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직접 확인해 볼 심산이리라.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아귀가 앙증맞은 손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단전의 크기를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내공의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대략적으로나마 알아챌 방법이 있었다.

유진산의 몸속으로 살며시 진기를 흘려보내던 가주는 놀란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이럴 수가…….”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도토리 같은 아이가 자신보다 내공이 월등히 많았으니.

노환으로 죽음의 문턱에 다다를 때까지 내공 수련만큼은 게을리하지 않았던 유진산이였다.

영문을 모르는 다른 식솔들은 몹시 궁금해했다.

“무슨 일이에요?”

“왜 그렇게 놀라세요?”

가주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내공이 삼 갑자가 넘는 것 같아.”

무림인들은 하루 평균 한 시진 가량 내공을 수련하며, 이러한 기준으로 육십 년을 쌓은 내공을 일 갑자라고 한다.

그런데 삼 갑자라니? 하루에 한 시진씩 백팔십 년을 쌓아야 하는 양이다.

간혹 유설처럼 내공이 쌓이는 속도가 수십 배나 빠른 특이 체질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수치였다.

놀란 동구가 자라처럼 목을 빼고 되물었다.

“예에?”

“검선이 네게 얘기를 안 해주었나 보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비로서 어찌 그리도 자식에게 무관심한 것이냐?”

“그, 그게…….”

“쯧쯧. 지렁이가 용을 낳았으니 어찌 감당할 수 있겠나.”

얼떨결에 아버지에게 무시당하는 동구였다.

그 또한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럼 아버지는 지렁이를 낳으신 겁니까?’

특출난 손자를 마주한 순간부터 진짜 아들인 자신은 뒷전이었다.

서운한 감정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속마음은 흐뭇한 동구였다.

“어쨌거나 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를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반드시 산이에게 물려 주고 싶거늘.”

내공을 전해주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전수하는 쪽은 죽을 만큼 큰 고통을 감수해야 하며, 조금의 문제라도 생긴다면 양쪽 모두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기에 큰 각오가 필요하다.

게다가 전이 과정에서 절반 이상의 내공이 소실되기에 효율도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흔히 사용하지 않는 수법이었지만, 지금처럼 가문의 흥망성쇠가 달린 경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어쩔 수 없잖아요, 아버지. 그러니까…….”

동운걸이 한 손을 올려 보이며, 막내아들의 말을 잘랐다.

“아니다.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손주한테 모든 것을 물려주고 싶구나.”

“어차피 방법이 없잖아요?”

“일단 동구가 대신 받아라. 그리고 훗날 우리 산이가 받을 준비가 되거든, 다시 전해주도록 해라.”

그야말로 황당함을 넘어 억지에 가까운 소리였다.

내공을 한 다리를 거쳐서 전해준다면 그 과정에서 팔 할은 소실이 될 터. 그런데도 그의 의지는 너무나도 확고했다.

완벽함을 갖춘 손자에게 하나라도 더 물려주고 싶은 것이 할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이미 아들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아버지…….”

어쨌거나 실제 핏줄인 동구가 내공을 받도록 하는 것이 유진산의 의도였다.

자신은 내공이 좀 더 생긴다고 해도 크게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내공의 양보다는 깨달음에 더욱 큰 영향을 받는 경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어디선가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사하게 무공을 익힌 손자만 예뻐하기요?”

백발이 무성한 할머니가 유설의 손을 잡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가주의 동생으로 가문에서 영향력이 상당한 인물이었다.

동운걸은 냉큼 달려가 유설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럴 리가 있는가? 세상에 우리 손녀보다 더 예쁜 아이가 있으면 나와보라 해!”

모처럼 기분이 하늘 높이 날아간 동운걸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이 손녀라고 생각하는 아이 또한 무공을 익혔음을.

그것도 모용성을 쓰러트리고, 정파의 고수들을 벌벌 떨게 만든 음괴라는 사실을 말이다.

* * *

한바탕 소란이 지난 후.

동구는 유진산과 유설을 데리고 장원 밖으로 이동했다.

아이들을 좌우에 끼고 걸어가던 그는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자 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 네가 어떻게 그런 고강한 무공을 지닌 거야?”

그는 아직도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듯했다.

이미 아버지한테 잔뜩 거짓말을 해놓았기에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하지만 이어진 아이의 반응이 그를 더욱 당황스럽게 했다.

갑자기 뒷짐을 지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진지한 표정까지.

“동구야.”

밤톨만 한 것이 감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다니.

동구는 마치 자신이 헛것을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어, 어른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 되지!”

“동구 이놈아. 너는 내가 아직도 애로 보이느냐.”

당황한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좌측을 바라보았다.

유설이 도와줬으면 했지만, 동생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말없이 웃고 있었다.

“너, 너희들 갑자기 왜 이래?”

이어진 아이들의 대답에 그는 걸음을 휘청거렸다.

“너도 섬서에 있었으니, 이름은 들어봤겠지. 우리가 바로 음양쌍괴다.”

“내가 음괴예요.”

섬서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든 음양쌍괴를 어찌 모르겠는가. 무림맹으로부터 수배령까지 내려진 무시무시한 마두들을.

“그, 그게 무슨…….”

당연히 쉽게 믿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보여줄 수밖에.

유진산이 눈짓을 보내자 유설이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을 쓱 들어 올렸다. 그러자 동구의 신형이 지면에 붕 떠올랐다.

“으, 으악!”

허공에서 바동거리던 그는 다시 지면에 내려서서 비틀거렸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그리고 흔들리는 동공은 정신적인 충격이 몹시 큰듯했다.

유진산은 뒷짐을 진 채로 손녀를 쓱 바라보았다.

“연기하는 게 참 어렵더구나. 우리 설이는 참 대단해.”

“히히. 난 다 잘해~”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할아버지와 손녀가 남의 가문에 와서 손주 행세를 한 셈이었다.

동구는 머릿속이 정리되질 않았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내가 지금 우리 가문에 뭘 끌어들인 거지?’

작정하고 정체를 밝히기로 마음먹은 유진산이었다. 그가 계산하기로는 지금이 가장 적정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무서워할 필요 없다.”

이미 동구의 마음속엔 공포라는 감정이 조금씩 솟아나고 있었다.

어찌 무섭지 않겠는가. 음양쌍괴에게 당한 정파의 고수가 한둘이 아니라는 소문을 익히 들었거늘.

“…….”

이대로라면 대화가 되지 않을 터. 유진산은 그를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너에 관한 얘기를 다 알게 되었으니, 이제 내 얘기도 좀 들려주마.”

그는 동구에게 어느 정도 자신의 사정을 솔직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유가장의 가주이며, 이곳까지 오게 된 사연을 말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정확히 들어맞는 정황들.

그리고 세부적인 내용은 지어낼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모습으로 사근사근하게 얘기하는 그의 모습에 공포가 좀 누그러진 것일까? 동구의 호흡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갔다.

“아마도 네 아비의 연배가 나랑 비슷하겠구나. 어쩌면 내가 더 많은지도 모르겠고.”

“예, 어르신……. 정말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조용히 얘기를 듣던 유설이 옆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며 씩 웃었다.

“히히. 깜빡 속았죠?”

천진난만한 얼굴과 순수한 미소. 이런 아이가 사파의 신예고수로 급부상한 음괴라니? 동구는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쓱 숙여 보였다.

“예, 할머니. 정말 몰랐습니다.”

“나 할머니 아니에요~”

당연히 오해할 수밖에. 유진산이 옆에서 설명을 거들었다.

“얘는 정말 여덟 살이야.”

“예에?”

“소문이 이상하게 났지만, 실제로 반로환동한 것은 나뿐이다. 우리 설이는 바로 내 손녀지.”

황당함이 끝이 없었다. 모용성을 쓰러트린 음괴의 정체가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라니. 음양쌍괴가 자신에게 장난이라도 치는 것일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으나, 지내다 보면 알게 될 터.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저 혹시…… 앞으로도 계속 비밀로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희 아버지가 만약 두 분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아마도 졸도하겠지. 걱정하지 말게, 굳이 말할 생각은 없으니까.”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도와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굳이 거짓을 말할 필요는 없었기에 유진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너도 우리를 도울 것이니까.”

“어르신은 우리 가문의 은인이십니다. 무조건 도와야지요. 근데 저 같은 게 도울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유진산은 잠시 손녀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간 자신보다 잘 먹었기 때문일까? 어느새 키 차이가 조금 더 벌어진 것 같았다.

“이 지역의 강호는 그리 익숙하지가 않아. 하남의 정세가 어떤지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다.”

“그런데요……?”

“우리가 활동하기에 앞서서 정보 수집이 필요하다는 얘기야. 그래야 계획을 짜지. 그런데 이런 몸으로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본격적으로 정체를 밝히지 않는 이상, 어린아이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다못해 객잔에서 귀동냥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손과 발이 되어줄 존재가 하나쯤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동구였다.

“하지만 저라고 정보들을 수집할 방도가…….”

“너한테 거기까지는 기대도 안 해. 우선 이곳에 정보 상인이 있는지와 접선 방법 정도만 좀 알아봐줘.”

드넓은 강호에서 정보의 가치는 무척 귀중하다.

그렇기에 정보를 사고파는 집단 또한 어디에나 존재한다.

대표적으로는 개방이 있지만, 무림맹의 소속인 그들을 이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예,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그래. 그리고 하후세가에 고수가 얼마나 있는지도 확인해 봐야겠지. 만에 하나 일이 커지는 경우 내가 전부 상대할 수 있을지 판단이 필요해.”

“알겠습니다. 그놈들에 대해선 이미 집안에서도 정보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유진산은 흡족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이틀 후 이곳에서 다시 보자고. 집에는 적당히 핑계 좀 둘러대고.”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

“몸 좀 풀 수 있는 한적한 곳으로. 대결이 다가오고 있는데 나도 준비 좀 해야지.”

그의 예상으로 하후세가와의 문제는 쉽게 해결될 부분이 아니었다. 동가장과는 달리 세력이 있는 거대한 가문이었기에 미리 대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몸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던 손녀 때문이었다.

이미 피가 끓어오른 것일까? 유설이 할아버지의 손을 부여잡고 잡아끌었다.

“빨리 가자, 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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