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천벌을 내려주마 (1)
손녀가 폭주하기 전에 미리 단속해둘 필요가 있었다.
유진산은 구석에서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아이에게 재빨리 전음을 보냈다.
- 참아라, 설아. 이깟 놈들을 상대로 네가 나설 필요는 없으니까, 할아버지한테 맡겨둬.
- 나쁜 아저씨들이야. 벌을 받아야 해.
- 할아버지도 같은 생각이다. 아주 천벌을 내려주마.
- 정말?
- 그래. 금방 끝낼 테니깐 잠시 다른 데 보고 있어.
목숨을 건 진검 대결.
비장한 표정의 동석이 앞으로 한 발자국을 내딛는 그 순간. 유진산이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타탓-!
동석을 제치고 후다닥 달려나가니,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이 애새끼는 뭐야?”
하후성이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대련 상대로 웬 꼬마가 나설 줄이야.
그러나 조금 전 아이가 보인 움직임은 예사로운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손에 들려 있는 검은 분명히 조금 전까지 동석이 들고 있던 것이었다. 짧은 순간 그의 무기까지 낚아챈 것이었다.
“내가 동가장의 장손 동산이다.”
동가장의 첫째와 둘째 아들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니, 동구의 아들역인 유진산이 장손이고, 유설이 장녀 역할인 셈이었다.
어린아이와 싸운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것일까? 하후성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그러나 하후천의 반응은 달랐다.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장손이라면 자격이 있지. 봐주지 말고 상대해.”
“둘째 형, 아무리 그래도 내가 저런 애새끼랑 싸울 수는 없잖아요?”
“어리다고 만만히 보면 네가 당할 수도 있어.”
“무슨 소리예요? 나 하후성입니다.”
“하여간 방심하지 마. 나도 지금 믿기지 않을 정도니까.”
하후성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최대한 빨리 끝낼 생각으로 자세를 잡았다.
“어린놈을 상대로 선공을 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지. 들어오너라. 하지만 두 번째 합이 시작되기 전에 너는 죽는다.”
유진산은 코웃음을 쳤다. 그의 모습이 가소롭기만 했다.
손가락이 짧았기에 검을 움켜쥐는 것이 영 불편하고, 손에 감기는 맛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맨손으로 때려잡기에도 충분한 상대인 것을. 단지 검선의 제자라 해두었으니, 적절히 연기만 해주면 그뿐이었다.
찰나의 순간 유진산의 신형이 벼락처럼 쏘아져 나갔다.
타탓-!
예상을 뛰어넘는 빠른 움직임. 화들짝 놀란 하후성이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방어했다. 초식을 펼칠 틈도 없었다.
카앙-!
일 합의 격돌.
유진산은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놓쳐버리고야 말았다.
허공으로 날아가는 검을 지켜보던 동가장의 식솔들이 움찔거렸다. 오직 유설을 제외하고 말이다.
유진산이 일부러 자신의 검을 놓친 것은 오직 그의 손녀만이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익숙하지 않은 검 대신 맨손으로 싸우는 것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하후성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자신이 잠시나마 놀랐다는 사실에 몹시 분노하고 있었다. 창피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씨…….”
진득한 살기가 그의 검날을 타고 검기와 뒤섞였다.
유진산의 목젖을 향해 다가가는 검 끝에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딘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할 아이의 표정이 어찌 이리도 평온할 수 있단 말인가?
잠시 후 그는 헛것을 보고 있다는 착각을 느꼈다.
스스슥-!
보법과 함께 두 명으로 늘어나는 아이의 신형.
손쉽게 공격을 회피한 유진산은 어느새 하후성의 옆구리에서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쩌엉-!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후성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지만, 비명이 나오질 않았다. 갈비뼈가 분쇄되었는지 숨이 턱하고 막혀왔기 때문이다.
넘어질 듯 상체를 휘청거리던 그는 유진산에게 머리채를 붙잡혔다.
동시에 밑으로 끌려오는 얼굴을 아이의 작은 손바닥이 후리고 지나갔다.
철썩-!!
찰진 소리와 함께 하후성의 입에서 이빨 몇 개가 후두두 쏟아져 나왔다.
이윽고 펼쳐져 있던 손바닥을 불끈 움켜쥔 유진산.
아이의 주먹이 상대의 얼굴을 계속해서 강타하기 시작했다.
쩍-! 퍽-! 퍼억-!
동가장의 처지가 자신의 가문과 비슷했기 때문일까?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유진산의 손속은 무자비했으며, 인정사정이 없었다.
순식간에 피투성이로 변해가는 하후성의 얼굴.
충격적인 장면에 지켜보던 모두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
“이, 이럴 수가…….”
모두가 마치 헛것을 보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어느새 하후성은 두 다리가 풀려 주저앉으려 했다. 그런데도 유진산은 움켜쥔 머리채를 놓아주지 않았으며, 공격을 계속했다.
쩌억-! 퍽-! 쩌억-!
상황이 이쯤 되자 정신을 차린 하후천이 움직임을 개시했다. 동생의 죽음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유진산의 측면을 향해 돌진하는 그의 속도는 하후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절정이 초절정을 당해낼 수는 없는 법.
‘기다리고 있었다, 이놈.’
오히려 그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던 유진산이었다.
자신의 옆구리를 향해 다가오는 검 끝. 비겁한 일격이었지만, 살의가 가득한 공격은 멈출 기미가 없어 보였다.
유진산은 회피하지 않고, 움켜쥐고 있던 하후성의 머리를 검이 다가오는 곳으로 들이밀었다.
이대로라면 자신의 검이 동생을 꿰뚫을 터.
‘……안, 안돼!’
이미 공격을 회수하기엔 늦은 시점이었다. 그렇기에 다급히 검로(劍路)를 틀기 위해 손목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 또한 유진산의 예상대로였다.
무공에서도. 그리고 경험에서도 둘의 차이는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검 끝이 비껴나가는 방향으로 끝까지 하후성을 밀어 넣었다.
잠시 후 검 끝에 맺힌 검기가 그의 상체를 두부처럼 관통하기 시작했다.
푸우욱-!!
하후천의 동공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자신의 검으로 동생을 찔렀으니, 그 충격이 더할 수밖에.
“이놈!!”
분노의 화신. 지금 하후천의 모습이 그러했다.
이성을 잃은 그는 검을 뽑아내고는, 유진산을 향해 맹공을 퍼부어갔다.
정신을 집중해도 부족할 판에 흥분을 했으니, 이어지는 결과는 너무나도 당연했다.
쐐에엑-!
매서운 강기와 함께 가슴팍으로 파고드는 검 끝.
백학의 날개처럼 펼쳐진 유진산의 양손이 오히려 그의 공격을 끌어당겼다.
옆구리로 공격을 흘려내는 한편, 관절을 타고 오르는 양손이 하후천의 팔을 낚아챘다.
그곳으로 삼 갑자가 넘는 내공의 힘이 가해지자 경쾌한 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우두둑-!
기이한 각도로 꺾인 오른팔.
검을 놓친 것은 물론 단번에 전투 불능이 된 하후천이었다.
그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유진산의 발등이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콰직-!
자세가 무너지며 한쪽 무릎을 꿇는 그의 눈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일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또다시 움켜쥐어지는 유진산의 주먹.
퍽-! 퍼억-! 퍼퍽-!
조금 전 그의 동생처럼 하후천 또한 피투성이로 변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동가장의 식솔들은 몸속에 막혀있던 무엇인가가 뻥 뚫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쯤 되면 슬슬 하후세가의 후환이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들을 하나 죽였다고 이 사단을 벌였는데, 추가로 둘을 더 죽이게 된다면 어찌 감당하겠는가.
“그, 그만하면 되었다.”
“멈, 멈추거라!”
그들의 만류가 먹혀들었던 것일까? 유진산의 공격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동공이 풀린 하후천의 두 눈. 처참한 몰골과 함께 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어쨌거나 숨은 붙어있는 모습이었다.
“잘했다, 산아.”
“장하다. 어서 이쪽으로 오너라.”
이제 남은 것은 하후천의 목숨으로 하후세가와 협상하여 사태를 마무리하는 것뿐.
가문의 어른들이 타이르듯 유진산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그가 공격을 멈춘 것은 그를 살려주겠다는 의도가 아니었다.
모두가 안심하는 사이. 유진산의 두 손이 하후천의 머리와 턱을 움켜쥐었다.
“……?”
곧이어 들려온 경쾌한 소리가 모두를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우드득-!
“…….”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목이 돌아간 채 쓰러지는 하후천. 지켜보던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비단 동가장의 식솔들뿐만이 아니었다.
두 명의 형제가 대동하고 온 열두 명의 검객들.
하후세가의 정예들이라 이름난 자혈검단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싸우겠다는 의지보다는 살아남아 이 소식을 가문에 전한다는 것이 그들의 선택이었다.
누군가가 호각을 불었다.
삐이익-!
자혈검객들은 시체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는 동가장의 식솔들은 참담한 표정이었다.
저들이 돌아간다면 하후세가의 대대적인 보복이 이어질 터.
하지만 흩어지며 도주하는 그들을 어떻게 모두 다 잡아들인단 말인가. 절대고수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때 유설이 할아버지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 할배, 내가 다 잡아 올 수 있어.
정상적으로라면 그게 맞는 일이지만, 유진산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상황 또한 자신이 의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 그냥 보내줘.
유설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 왜에?
- 쓰레기들은 한 번에 치워야 속이 시원하니까. 저놈들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자꾸나.
앞으로의 갈 길이 멀었다.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하후세가와 푸닥거리를 할 수도 없는 노릇. 유진산은 일거에 모든 상황을 정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의 속내를 모르는 동가장의 식솔들만 발을 동동 굴렀다.
비록 유진산이 놀라운 신위를 보여주었지만, 혼자서 하후세가를 상대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아버님, 이제 어떡합니까?”
“하후세가에서 곧바로 보복을 가해올 것입니다.”
“이제 우린 끝장이에요.”
식솔들과는 달리 예상외로 가주 동운걸은 차분해 보였다.
그는 뒷짐 진 채 먼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내 살면서 가장 통쾌했던 순간이었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구나.”
“하지만…….”
“경거망동하지 마라. 우리 동가장은 최선을 다했으니,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지키겠다.”
가주의 확고한 의지에 식솔들도 더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무예를 익힌 자들은 하나같이 비장한 얼굴로 무기를 챙겨 들었다. 그중에는 동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동구야.”
“예, 아버님.”
“이곳은 신경 쓰지 말고, 너는 아이들을 데리고 어서 떠나거라.”
가지 않는다면 쫓아낼 기세였다. 그러나 어찌 이렇게 식구들을 놔두고 떠난단 말인가.
그때 머뭇거리는 동구의 귀에 유진산의 전음이 들려왔다.
동구는 그가 시키는 그대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도망칠 필요가 없으니, 여기 남겠습니다.”
“우리 산이가 살아야 가문의 미래가 있거늘, 그걸 어찌 모른단 말이냐? 호기 부릴 때가 아니니, 어서 빨리 떠나!”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동구는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그러고는 유설을 쓱 바라보았다.
“비록 산이가 검선의 제자 중 한 명은 맞지만, 절기를 이어받은 후계자는 아닙니다.”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지인이라도 있다는 말일까? 그 전에 동운걸은 기분이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감히 자신의 손자보다 뛰어난 제자가 있었다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산이가 정식 후계자가 아니라니?”
“검선의 제자가 한 명 더 있다는 얘기입니다. 산이의 재능을 뛰어넘는 천재적인 아이가.”
“그게 누군데?”
“바로…… 산이의 누이인 동설입니다.”
한번 시작된 거짓말.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동운걸도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놀림 받는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무공을 익힌 흔적조차 없는 손녀가 검선의 진전을 이어받은 정식 후계자라니. 화가 나는 것이 당연했다.
“이놈이 나를 가지고 놀려고 작정을 한 모양…….”
동운걸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떡하니 벌렸다.
바닥을 뒹구는 한 자루의 검이 날개라도 돋친 듯 쏜살같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터업-!
유설이 검을 움켜쥔 순간 검 끝에서 눈부신 빛살이 솟구쳐 올랐다.
찬란하게 빛나는 푸른 빛무리는 결코 검기(劍氣) 따위가 아니었다.
검강(劍剛). 그것도 어설픈 수준이 아닌 완성된 형태였다.
동운걸은 재빨리 자신의 눈을 비벼보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동가장의 가주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동구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사실을 왜 지금 얘기하냐는 눈빛이었다.
“말씀드리지 못한 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검선이 죽기 전에 당부했던 말들이 있었으니까요.”
지금 상황에서 사연 따위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동운걸은 다시 배시시 웃고 있는 유설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껏 아이에게서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 그것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경지였기 때문이었음을.
“걱정하지 마요. 설이가 있잖아요.”
엉거주춤 아이에게 다가간 동운걸은 조심스럽게 안아 들기 시작했다.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나는 찬밥 신세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