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천벌을 내려주마 (2)
유설을 얼싸안고 덩실거리는 동운걸.
동가장의 가주가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은 식솔들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모두가 한눈을 판 사이. 동구와 유진산은 슬쩍 자리를 이탈해 구석으로 이동했다.
“아버지께서 저렇게 좋아하시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
“그렇겠지. 나도 저 마음을 잘 알아.”
“진실이 알려질까 봐 두려워요. 어르신과 설이가 자신의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충격이 크실 텐데…….”
“너만 입 다물고 있으면 그럴 일은 없어. 일이 마무리되면 수행을 핑계 삼아 떠날 거니까.”
유진산은 가주의 건강이 좋지 않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반로환동을 이루기 전 죽음을 앞뒀던 자신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의 수명은 길어야 오 년. 더군다나 동구에게 내공을 넘겨준다면, 그마저도 절반 이하로 줄어들 터.
유진산은 동가장의 가주가 있는 방향을 슬쩍 바라보았다.
사정이 비슷했기 때문일까? 왠지 모르게 그가 오랜 지우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 친구야. 그래도 자네는 모든 근심을 털어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지 않은가. 혹시라도 기회가 있다면 지나가는 길에 한 번 들려주겠네.’
동가장과의 인연으로 그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였다.
이 정도면 동구의 입장에서도 굉장히 만족스러울 일이었다.
“어쨌거나 정말 고맙습니다, 어르신. 분골쇄신(粉骨碎身)으로도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고마워할 필요 없다니까. 앞으로 너도 나를 여러모로 도와야 하니까.”
“무엇이든 말씀만 하세요. 어르신과 설이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제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뒷짐 진 유진산은 피식 웃으며 계속 걸었다.
“네 목을 요구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넣어둬. 그나저나 앞으로의 일이 문제로군.”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한 번에 두 아들을 죽였으니, 가주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시신도 이곳에 있고 말이야.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오겠지.”
동구가 그의 옆에서 양손을 모으며 굽실거렸다.
“아마 저 같아도 그럴 겁니다. 하후세가의 고수들이 죄다 몰려올 텐데, 어떡해요? 정말 설이가 전부 상대할 수 있는 겁니까?”
유진산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반문했다.
“왜? 못 미더워?”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여린 것이 그리 싸움을 잘한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
“음양쌍괴에 대해 들어보았으면, 음괴에 대한 소문도 들어봤을 텐데?”
“듣, 듣긴 했지요. 음괴가 모용성을 개 패듯이 때려죽였다는 소문이 섬서에 쫙 퍼졌는데요. 근데 정말 그 소문이 사실이었습니까?”
유진산은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될 수 있으면 내 선에서 끝내려 했지만, 이제는 방법이 없어. 우리 설이가 움직이면 상대가 누구든 지옥을 맛보게 될 게다.”
“저런…….”
유진산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먼 산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에 은은한 살기가 어렸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한참 후에 그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이곳으로 오는 놈들을 모두 죽여야겠다. 한 놈도 빠짐없이.”
“예에? 전부를요?”
“남의 목숨을 빼앗으러 오는 놈들이니, 본인들의 목숨도 잃을 각오가 되어있어야겠지.”
명분은 충분했다. 단지 동가장은 방어를 하는 것이었으니, 소문이 퍼지더라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화근을 남겨두지 않는 유진산과는 달리 동구는 마음이 여린 인물이었다.
“그래도…… 그건 조금 심한 거 아닐까요? 당한 것은 억울하지만, 우리는 복수보다 진심으로 사과를 받고 싶을 뿐입니다.”
동구의 표정을 보아하니 거짓은 아닌 듯했다.
그의 얼굴을 쓱 올려다본 유진산은 답답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이 미련한 녀석아. 지금 상황에서 놈들이 무릎 꿇고 빈다고 한들 그게 진심일 것 같아? 동가장이 살아남을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그게 뭡니까?”
“앞으로 강호에는 발도 디디지 못할 정도로 박살을 내버려야지. 적어도 네 다음 세대까지는 감히 동가장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후세가도 연줄이 있는 곳이 있을 텐데, 다른 곳에 도움이라도 청하면요?”
“강호는 네 생각처럼 그리 쉬운 세상이 아니야. 무너진 가문을 위해 불확실성을 무릅쓰고 나서줄 세력은 어디에도 없어. 무엇보다 명분도 없고.”
그것은 유진산이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사실이었다. 강호가 의리가 넘치는 세상이었다면, 유가장이 왜 그런 꼴을 당했으며, 어찌하여 억울함을 무릅쓰고 도망쳐 다녀야 했겠는가.
게다가 하후세가의 하는 짓거리를 보면 평판이 좋을 리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이러한 결정을 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지금의 행적이라면 정체가 탄로 나는 것은 시간문제나 다름없었다.
음양쌍괴가 하남에 있다는 소문이 돌면 무림맹이 움직이게 될 터. 그러니 이번과 같이 유설이 신위를 드러낸다면 목격자들을 살려둘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소림사의 일이 끝날 때까진 정체를 숨기는 것이 상책이었으니.
“그럼 어르신만 믿겠습니다.”
“너는 식구들의 입단속이나 잘해둬. 나는 몰라도 우리 설이의 존재는 소문나지 않는 것이 좋아. 그리되면 오히려 동가장에 화가 불어닥칠 수도 있으니.”
“저만 믿으세요. 우리 가문은 다른 건 몰라도 입은 천금보다 무거우니까요.”
“내 지금까지 살면서 자기 입이 가볍다고 얘기하는 녀석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일단 접어두고, 잠시 바람이나 좀 쐬자꾸나.”
장원을 벗어난 둘은 동가장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단순히 산책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유진산은 주변의 지형을 살펴보고 있었다.
일식경이 더 지난 후에서야 둘은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설이는 지금쯤 아버지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어서 가보시죠.”
“아마도 그렇겠지.”
아니나 다를까? 가주가 머무는 전각에 접근하자, 달콤하고 구수한 음식 냄새가 코를 자극해왔다.
동구가 문을 열자 안으로 보이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탁상 위에 수북이 차려진 진수성찬들. 그 중심에는 유설이 앉아있었다.
입안 가득히 음식을 넣어 빵빵하게 부푼 얼굴이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를 마주한 유설은 음식을 삼키지도 못한 채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와떠? 빠리 와서 드러. 마이떠.”
손녀가 음식을 삼키기 무섭게 옆에서 백발의 노파가 찬을 떠먹여 주기 시작했다.
신줏단지도 이렇게 고이 모시진 않을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동운걸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동가장에서 오직 그만이 유설이 화경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눈으로 본 현실을 부정할 수도 없는 일.
이제 하후세가 따위가 무엇이 두렵겠는가. 동운걸은 마치 천하를 얻은 심정이었다.
“동구야.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구나. 꿈이라면 깨지 않아야 할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네게서 이런 보석이 나왔다는 게 도저히 믿기질 않아.”
“아버지도 참. 제가 뭐 어때서요…….”
동운걸은 대답 대신 유진산을 쓱 응시했다.
“산이는 잠시 이리 좀 와보거라.”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던 유진산은 정중히 거절하려 했다.
“저는 괜찮습니…….”
“아니, 이리 와서 네 누이 어깨 좀 주무르거라.”
“……예?”
유진산은 자신이 헛것을 들은 줄 알았다.
자신보고 손녀의 어깨를 주무르라니.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몸을 가볍게 하려면 안마로 기혈을 풀어주는 것이 최고지. 투박하고 거친 내 손보다는, 아담하고 작은 손으로 주물러주는 것이 효과가 크지 않겠느냐.”
“…….”
유진산은 마지 못해 유설의 등 뒤에 섰다.
어이가 없었지만, 자신의 손녀인데 못 해줄 것은 또 무엇이 있겠는가.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하자 유설의 표정이 나긋해졌다.
풀어진 동공과 조금씩 벌어지는 입술. 시원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길 잠시 후.
돌연 손녀가 눈을 감은 채로 왼쪽 팔을 살며시 내뻗었다.
“팔도 주물러줘.”
유진산이 머뭇거리자 동운걸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서 누이가 시키는 대로 하거라.”
이대로라면 발바닥까지 주무르라고 할 기세였다.
잠자코 팔을 주무르던 유진산이 마지못해 동구에게 눈짓을 보냈다.
“아버지. 그래도 우리 산이가 고생했는데, 좀 쉬게 해주시는 게 어때요?”
돌려온 대답은 더욱 가관이었다.
동운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동구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럼 너도 와서 같이 주무르거라. 딸인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유진산과 동구는 입을 꾹 닫고, 유설의 몸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몸이 나른해진 것일까?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은 손녀는 새근새근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동운걸은 한술 더 떠서 모두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손짓까지 해댔다. 유설이 편히 잘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리라.
알 수 없는 자괴감이 밀려왔지만, 지금 와서 못하겠다고 멈출 수도 없는 노릇.
그렇게 일식경이 지났을 때였다.
적당한 시점이 다가오자, 동구가 유진산의 전음을 받으며 얘기를 전달했다.
“빠르면 한 시진 뒤에라도 하후세가 놈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이제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렇지. 슬슬 그 몹쓸 놈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지.”
“아닙니다, 아버지. 제가 작전을 세웠으니, 그냥 여기서 쉬고 계십시오.”
“무슨 작전?”
동운걸은 네까짓 게 무슨 작전을 구상했냐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아버지에게 무시를 당하는 게 서러웠지만, 이것저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검선에게 전문적인 기술을 배운 아이들입니다. 그러니 정면 승부보다는 기습하는 게 유리해요.”
“동구야. 아무리 검선의 제자들이라 해도 그렇지, 어떻게 애들한테 일을 다 맡길 수가 있겠느냐. 내가 직접 상황을 지휘할 것이다. 여차하면 나도 함께 싸울 것이고.”
동구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몸이 굳어 뛰는 것조차 힘겨울 노인네가 어찌 싸운단 말인가.
어차피 아무래도 관계는 없었다.
단지 형식적인 예의를 갖추었을 뿐, 그의 허락을 받아야 할 이유는 애초부터 없었으니까.
“아버지는 그냥 여기 계세요. 결과만 확인하시면 됩니다.”
“뭐라고? 이 녀석이 아버지에게 무슨 말버릇이…….”
동구는 아버지의 말을 무시한 채 유진산의 전음을 받아 소리쳤다.
“시간이 없으니, 어서 가거라! 어서!”
기다렸다는 듯이 유진산과 유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둘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문밖을 향해 빛의 속도로 사라져갔다.
후다닥-!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당황한 것일까?
등 뒤로 동구를 꾸짖는 가주의 호통이 들려왔다.
“이 미친놈아!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순식간에 장원 밖으로 빠져나온 유진산과 손녀는 담벼락 아래서 얼굴을 맞대었다.
“어떡해? 동구 아저씨 혼나.”
“괜찮을 테니, 걱정 말거라. 설마 아들을 때리기라도 하겠느냐.”
유설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양쪽 어깨를 돌려댔다. 마치 뻐근함이 풀렸다는 듯이 말이다.
“시원했어. 다음에는 내가 할배 안마해줄게.”
“됐다, 요 녀석. 할아버지를 잘도 부려먹더구나.”
반로환동을 하기 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의 유진산은 쾌적해진 몸 상태를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히히.”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손녀의 모습이 귀여웠기 때문일까? 유진산도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이제 슬슬 준비하자꾸나.”
“응, 난 뭘 준비해?”
“할아버지한테 다 계획이 있으니까, 시키는 대로만 하거라.”
* * *
동가장에서 남쪽으로 십여 리.
오솔길을 따라 일단의 무리가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하나 같이 날랜 움직임. 최소한 일류고수가 아니라면 낼 수 없는 속도였다.
선두에서는 검을 움켜쥔 백발의 노인이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이를 뿌드득 갈고 있었다.
“내 오늘 너희들의 사지를 모두 끊어주마.”
하후세가의 가주인 하후극이었다.
그의 뒤로는 가문의 최정예 고수들이 대열을 맞추어 뒤따르고 있었다.
하나 같이 일그러진 얼굴들. 그들은 몹시 분개한 모습이었다.
잠시 후 먼 곳으로 동가장의 장원이 작게나마 시야에 들어올 찰나였다.
그들은 경공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웬 꼬마가 날선 죽창을 움켜쥔 채 길목을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
선두에 있던 가주가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 유진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못난 놈들이로구나. 자기 새끼가 소중하면, 남의 새끼도 소중한 줄 알아야지.”
무사들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마음 같아선 단번에 다가가서 베어버리고 싶었으나,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들의 걸음을 붙잡았다.
뒤쪽에서 붉은 경장 차림의 무사가 앞으로 나서며 검지를 내뻗었다.
“저놈입니다. 저 애새끼가 바로 도련님들을 죽인 녀석입니다.”
“오냐, 노부가 그랬다! 똥 묻은 놈들이 되레 성을 내는 꼴을 보니,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구나!”
하후극의 눈동자에 짙은 살기가 어렸다.
파르르 떨리는 눈 밑과 입술. 그의 분노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감히 내 아들들을 죽인 게 네놈이렷다?”
겁을 먹을 만도 한 상황이었지만, 유진산은 오히려 상대를 더욱 도발했다.
“오호라. 네가 그 망나니들의 애비로구나. 자식 교육을 그따위로 시켜놓고 뭘 잘했다고 성을 내느냐!”
“지금부터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보여주겠다. 우선 네놈의 혀부터 뽑아주마.”
하후극은 검을 움켜쥐고 유진산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가히 일개 세가의 가주다운 기세. 그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뿜어내는 위압감은 명실상부 초절정의 수준이었다.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강적. 게다가 스무 명이 넘는 그의 수족들까지.
혼자서는 당해낼 수가 없는 전력이었지만, 아무래도 관계는 없었다.
유진산은 뒷걸음질 치며 다급히 소리쳤다.
“지금이다, 설아! 어서 나와서 이놈들을 다 때려눕히거라!”
뭔가 이상함을 느낀 하후세가의 무사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상대가 갑자기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어리둥절하던 그들은 곧이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
믿을 수 없게도 자신들의 바로 등 뒤에 누군가가 우뚝 서 있었다.
몹시 화가 난 듯 두 눈에 힘을 주고 있는 여자아이였다.
도대체 언제 다가왔다는 말인가. 바로 지척에 있었음에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잠시 후 아이가 손아귀에 움켜쥔 죽봉을 천천히 치켜세우며 물었다.
“……지금 우리 할배 혓바닥을 뽑는다고 했어? 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