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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78화 (78/238)

78화 불씨는 확실히 꺼야 하는 법 (2)

“바로 저곳입니다.”

동가장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장원이었다.

입구에 자리 잡은 두 개의 사자 석상. 그리고 활짝 열린 대문 너머로 보이는 앞마당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었다.

게다가 화사한 연못과 어우러진 화원까지. 곳곳에는 웅장함이 가득했다.

한쪽에 가지런히 이어진 무기 진열대는 하후세가가 무가(武家)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동가장을 잡겠다고 세가의 정예들이 빠져나갔기 때문일까? 내부는 다소 한적해 보였다.

“금방 끝내고 올 테니, 설이랑 밖에서 기다려.”

유설의 손을 맞잡은 동구가 유진산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정말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조무래기들밖에 없을 텐데, 충분하고도 남지.”

“……저 그런데 말입니다.”

“뭐가?”

“다 끝난 마당에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이미 하후극을 포함한 세가의 정예를 몰살시킨 상황이었다.

복수도 마쳤고 어느 정도 안전이 확보되었으니, 불필요한 살생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유진산은 답답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이 바보 녀석아. 지금 당장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십 년 뒤에도 괜찮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그건…….”

“불은 확실히 꺼둬야 하는 법이다. 작은 불씨가 큰불로 자라면 그때는 후회해도 늦어.”

그 말을 끝으로 유진산은 하후세가의 대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등 뒤로 자신을 재촉하는 손녀의 애교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배, 빨리 다녀와~ 우리 밥 먹으러 가야지~”

유진산은 어깨 뒤로 한 손을 흔들어 보이며 걸음을 계속했다.

그는 대문으로 들어가자마자, 왼손에 움켜쥐고 있던 보자기를 앞마당에 던져 버렸다.

콰앙-!

보자기에 쌓인 나무상자가 박살이 나며 주변의 이목을 끌었다.

마당을 기웃거리던 몇몇 여인이 그 모습을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당연히 놀랄 수밖에.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은 하후극의 수급이었다.

난데없는 소란에 곳곳에서 세가의 식솔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수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십여 명에 이르렀다.

“형, 형님!”

“할아버지!!”

가주의 수급을 본 세가의 식솔들은 눈이 뒤집혀 무기부터 찾아들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유진산은 진중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내 이름은 동산이다. 너희들이 무너트리려 했던 동가장의 장손이지.”

그들의 분노는 가주의 수급을 가져온 유진산에게 쏠렸다.

언월도를 움켜쥔 한 중년인이 성큼성큼 다가오며 소리쳤다.

“네 이놈! 우리 가족들을 어찌 한 것이냐?”

어찌 가주뿐이겠는가. 그와 함께 떠났던 무사들 하나하나가 이곳의 구성원이었다.

유진산은 품속에서 미리 준비해온 단도를 꺼내며 태연히 말했다.

“죽였다. 모두.”

그의 한마디에 식솔들은 이성을 잃고야 말았다.

무예를 익힌 모두가 사방에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야 이 새끼야!”

“우리 아버지 살려내!”

“뒈져!!”

고작 어린아이 하나를 죽이려 수십 명이 달려드는 꼴이라니.

유진산은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았다.

하후벽이나 하후무에 비교하면 하나같이 애송이들에 불과했다.

자신이 기세를 갈무리하지 않았다면, 감히 덤벼들 수도 없는 수준들.

‘이상할 것도 없지. 일평생 남들을 자신의 아래로 생각해왔을 테니.’

그의 고개가 우측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등 뒤에서 언월도의 날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파앙-!

눈앞으로 느릿하게 지나가는 손목.

유진산은 생각할 것도 없이 단도의 날로 그곳을 그어버렸다.

스팟-!

솟구쳐 오르는 핏줄기. 동시에 중년인은 쥐고 있던 언월도를 놓쳐버렸다. 손목의 근맥이 절단되었기 때문이다.

언월도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는 다시 왼쪽 발목이 화끈해짐을 느꼈다.

“윽!”

영문을 확인하기도 전에 유진산은 이미 눈앞에 없었다.

자세를 낮춘 그는 팽이처럼 회전하며, 다가오는 자들의 발목을 사정없이 베고 있었다.

스팟-! 촤악-! 스파팟-!!

사방으로 낭자하는 혈흔들.

이제야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자들이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우거진 숲을 통과하는 바람결처럼, 유진산이 그들의 틈새를 후비기 시작했다.

“크윽!”

“꺅!

“아악!”

동시다발적으로 메아리치는 비명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일각이 지난 후.

어느새 소란스러움은 사그라지고, 주변엔 주저앉아 신음하는 자들만이 가득했다.

손속에 자비라도 둔 것일까? 하나같이 손목이나 발목만 붙잡고 있을 뿐, 중상을 입거나 죽은 자는 없어 보였다.

“근맥만 잘랐으니, 살아가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분노를 집어삼킨 공포.

자신들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쥐고 있는 그의 심기를 어찌 거스를 수 있겠는가.

“또다시 동가장을 넘본다면 그때는 근맥이 아닌 목을 잘라주겠다. 다시는 하후세가의 이름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도록 모조리 씨를 말려주마.”

“…….”

“…….”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영향력이 있는 세가의 고수들이 모두 죽었으니 그들을 지휘할 수 있는 인물도 없었다. 당연히 기가 죽을 수밖에.

그들을 쓱 둘러보던 유진산은 피 묻은 단도를 휙 던져 버렸다.

덩그렁-!

다시 등을 돌려 유유히 장원을 빠져나가는 유진산.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유진산이 고민 끝에 내린 처분이었다.

외부에 있는 세가의 일원들도 있을 터. 만약 저들을 몰살시킨다면, 잃을 것이 없는 생존자들이 동가장으로 복수하러 올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세가 전체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도록 지켜야 할 존재들을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 * *

“어떻게 된 겁니까? 정말 다 죽이신 거예요?”

유진산은 뒷짐 진 채 그를 쓱 올려보았다.

“동구야.”

“예?”

“너는 나를 살인귀로 보았더냐?”

“그, 그건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목숨은 소중한 법이지. 내게도 기준이 있어.”

멋쩍어진 동구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유진산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한 번 저었다.

“내가 살검을 휘두르는 순간은 상대가 죽을 만한 죄를 지었거나, 꼭 필요한 상황일 때뿐이다.”

“그럼 왜 들어가셨어요?”

“그냥 나오진 않았다. 근맥 한두 개씩은 잘라놓았으니 다시는 무공을 펼칠 수 없겠지. 앞으로는 동가장을 넘보지 못할 게다.”

“고생하셨습니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려야 할 일을 어르신께서…….”

유진산이 그의 말을 자르며 이름을 다시 한번 불렀다.

“동구야.”

“예?”

“너는 매사에 너무 구멍이 많아.”

그 순간 잠자코 듣고 있던 유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동구가 의아해하며 자신의 손을 맞잡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왜 웃어?”

“히히히. 그래서 아저씨 이름이 동구예요?”

동구는 유설을 번쩍 들어 왼쪽 어깨에 걸쳐 올렸다.

“그래, 요 개구쟁이 녀석아. 구멍이 많아서 아버지가 나를 동구라 이름 지었다.”

“근데 나는 아저씨 이름이 좋아요. 동구 아저씨~”

“때찌 해줄까?”

“히히. 아니요~ 우리 빨리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요!”

말을 돌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동구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흔들어댔다.

“오냐! 오늘 구멍 많은 아저씨가 거하게 한턱내마.”

“동구 아저씨, 최고!”

유진산과 동구는 동시에 웃음보를 터트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 * *

정체를 숨기기 위해 당분간은 동구를 데리고 다닐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나이에 맞지 않게 순수한 녀석이라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손녀도 즐거워하니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았다.

이틀간의 이동 끝에 도착한 곳은 백화현의 시장.

이향(二向)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찻집이었다.

“찻집치고는 규모가 상당하군.”

대부분의 찻집이 노점으로 이루어진 구조지만, 이곳은 전각이었다.

동구가 앞장서서 유진산과 손녀를 이끌었다.

“그렇죠?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어르신.”

밖에서 보이는 것처럼 내부도 넓었다.

탁상의 개수만 이십여 개. 각양각색의 손님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행이 자리를 잡자 점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하하. 아이들이 너무 귀엽네요. 차는 무엇으로 준비해 드릴까요?”

“음…….”

이곳으로 온 목적은 단순히 차를 마시기 위함이 아니었다.

동구가 잠시 머뭇거리자 점원이 능숙하게 제안했다.

“요즘 아이들은 산사차를 좋아한답니다. 산사나무 열매와 꿀이 들어간 차라 아주 달콤하지요.”

“그럼 산사차 두 잔. 그리고……. 흑산차를 한 잔 주시오.”

미소를 띠고 있던 점원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흑산차를 주문한 것이 맞는지요?”

정상적으로는 이 차를 찾는 손님은 없다.

오직 이곳에서만 파는 이색 차로 가격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야방과 접선하기 위해선 반드시 이것을 마셔야만 했다.

“확실하오. 가격도 잘 알고 있소.”

“잘 알겠습니다, 손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유진산은 점원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지만, 어떠한 특이점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흑야방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인물인 듯했다.

‘점조직처럼 운영되는 조직이라더니 틀림없는 것 같군.’

이곳에서 벌어들인 수익금이 흑야방으로 흘러가기까진 아마도 여러 중간단계를 거쳐 가게 될 터.

알선책이 아닌 그들의 간부와 직접 만나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선 방도가 없었다.

잠시 후 점원이 차를 가지고 와 슬쩍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어진 의미심장한 한마디.

“모두 마셔야 합니다.”

점원이 등을 돌린 순간 셋의 얼굴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후각이 가장 발달한 유설은 참지 못하고 코를 틀어막았다.

“으엑!”

원인은 흑산차에 있었다.

무엇으로 만든 차이길래 냄새가 이리 역하단 말인가.

마치 오물과 상한 음식을 섞은 것 같은 지독한 향이 정신을 혼미하게 할 정도였다.

이것을 다 비워야 흑야방을 만날 수 있다니. 쉽지 않겠지만 누군가는 이것을 들이켜야만 했다.

경쟁이라도 하듯 탁상으로 재빨리 향하는 세 개의 손.

그중 동작이 가장 빠른 유설이 산사차 하나를 얼른 집어 들었다.

휘익-!

남은 잔은 단 두 개.

동구의 동작이 유진산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그의 손이 탁상에 접근했을 때는 흑산차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

이미 호흡을 멈춘 유진산과 유설이 산사차를 음미하며 그를 슬쩍 바라보았다.

“자, 그럼 들지.”

“잘 먹겠습니다~”

울상을 지은 동구는 눈물을 찔끔거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흑산차를 입안에 단번에 털어 넣었다.

그 순간 독약이라도 마신 듯 그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끄으으으…….”

“아저씨,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없었다.

유진산은 흑산차의 성분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살수들이 주로 사용하는 추혼향(追昏香)을 포함해 추적술에 사용되는 여러 향이 뒤섞인 것이리라.

“……죽, 죽을 것 같구나.”

“히히. 내가 마셔주려고 했는데.”

“거짓말하지 마!”

“정말이에요. 빨리 이거 마셔요.”

눈물을 닦아낸 동구는 유설이 먹다 남긴 산사차를 단번에 들이켰다.

달콤한 찻물이 입안과 목구멍을 씻어내자 그의 표정이 조금 편안해졌다.

목적을 이룬 이상 더는 이곳에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유진산과 손녀도 빨리 나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한참 전부터 숨을 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만 나가지.”

계산을 마친 셋은 서둘러 전각 밖으로 나왔다.

흑산차의 가격은 무려 은자 다섯 냥. 산사차의 천 배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겨우 마음이 진정이 된 동구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유설이 멀찍이 거리를 벌린 채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떨어져서 걸어?”

유설은 어깨를 으쓱하며 시치미를 뗐다.

“그냥요.”

이유를 어찌 모르겠는가. 자신의 온몸에 진득이 밴 역겨운 향내 때문인 것을.

그는 한숨을 내쉬며 유진산을 바라보았다.

“아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틀림없이 그랬을 것 같군. 그것만으로도 너는 은혜를 다 갚은 것이나 다름없어.”

“어휴, 어르신도 참. 저희 가문을 구해주셨는데, 겨우 이걸로 어떻게 다 보답을 해요?”

유진산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놈 참, 그래도 의리는 있군. 네 역할은 흑야방에서 정보를 얻을 때까지만 동행해주는 것으로 충분해.”

“더 도울 건 없어요?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몸으로라도 때울 테니깐.”

“되었다, 이 녀석아. 너도 가문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돌아가면 아버지의 진전을 이어받고, 실력이나 키워둬. 그러다 보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게다.”

“예, 어르신. 저도 반드시 고수가 되어 못다 한 은혜를 꼭 갚을 것입니다.”

“그리하던지.”

동구의 무공 실력이 지금은 보잘것없었지만, 기본기는 제법 탄탄했다.

가주의 내공을 이어받은 후 수련에 매진한다면, 절정고수까지는 충분히 성장할 여력이 있어 보였다.

“근데 말입니다, 어르신. 흑산차는 단순히 접선 비용인데요. 정보를 사려면 돈이 더 필요할 텐데, 괜찮아요?”

“나한테는 은자 다섯 냥이 가진 전부였어. 외상이 안 된다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봐야겠지.”

“맙소사……. 그런데 정말 흑야방에서 접촉을 해올까요?”

유진산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한 놈이 따라오고 있더구나.”

자신조차 쉽게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감쪽같은 미행이었다.

틀림없이 은신과 추적술을 전문적으로 익힌 녀석이리라. 지금도 어렴풋이 느껴졌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유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명!”

“응? 두 명이라니?”

“두 명이 따라왔어.”

유진산은 놀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거리가 멀다고 한들, 자신이 한 명의 기척을 놓쳤다니.

흑야방이 그 정도로 대단한 세력이었단 말인가? 그들에 대한 의문이 점점 더해져 갔다.

“한 명은 삼십 장 뒤의 전각 지붕에 있는 것 같구나. 다른 한 명은 어딨어?”

유설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어딘가를 향해 검지를 내뻗었다.

“방금 집에 갔어. 저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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