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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79화 (79/238)

79화 정보의 가치 (1)

미행하던 이들 중 한 명이 돌아갔다는 것은 접선을 조율하기 위해서이리라.

만약 그를 역으로 미행한다면 조무래기가 아닌 윗선을 만날 수도 있을 터.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굳이 섣불리 움직일 필요는 없겠지.’

지금은 흑야뱡이 아니라면 기댈 곳이 없는 상황이 아니던가.

굳이 모험할 이유는 없었다. 혹시라도 변수가 생기면 거래가 시작되기도 전에 신뢰를 잃을 우려가 있었으니.

그때 갑자기 손녀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할배, 저기 봐!”

아이의 검지가 꼬물거리는 곳.

상의를 탈의한 채 가면을 쓴 누군가가 인파에 둘러싸여 있었다.

“음. 공연을 하는 모양이구나. 보고 싶어?”

하남성은 문화적으로 거리공연이 흔한 곳이다.

재밌는 구경거리를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호기심 가득한 유설이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끌며 애원했다.

“응, 궁금해~. 우리도 빨리 가서 구경하자.”

모처럼 의욕이 넘치는 손녀의 모습을 보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손을 맞잡은 셋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인파의 틈새로 합류했다.

“자, 다음은 누가 도전해보시겠습니까? 누구든 저를 때려서 원 밖으로 밀어내는 자에겐 은자 한 냥을 드립니다!”

이미 수많은 도전자가 거쳐 간 듯, 앞에 놓인 바가지에 엽전이 절반이나 차 있었다.

그때 우람한 체구의 근육질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절제된 걸음걸이로 보아 무예를 익힌 게 분명해 보였다.

“형씨, 엽전 한 닢에 한 대가 맞소?”

“예, 그럼요! 어서 도전해보십시오. 은자 한 냥이 눈앞에 있습니다.”

이어진 도전자의 행동에 구경꾼들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그가 자신의 전낭에서 엽전을 모두 털어내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땡그랑거리며 쏟아져 내리는 엽전은 세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어떡해…….”

“저러다 죽는 거 아냐?”

“세상에나.”

무식하게 비용을 투하한 그는 가면을 쓴 사내의 앞에 우뚝 섰다.

머리 하나 정도의 체구 차이. 겉모습만 보기엔 한 방에 상대를 으스러트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광대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이, 이건 반칙이잖아요, 대협!”

지금껏 도전한 자들은 기껏해야 엽전 두세 닢이 전부였다. 이렇게나 많은 돈을 쏟아부었으니, 기겁할 수밖에.

“사내의 말 한마디는 천금보다 무거워야 하는 법. 배에 힘이나 주시오.”

그가 거대한 주먹을 움켜쥐었다.

보기만 해도 위협적인 모습에 구경꾼들이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기어코 도전자가 자세를 잡고 힘차게 정권을 내질렀다. 그러자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이 매섭게 울려 펴졌다.

복부에 쑤셔박히는 무지막지한 주먹에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쩌억-!

“크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광대의 상체가 흔들거렸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의 복부를 향해 연달아 내질러지는 두 주먹은 마치 폭우와도 같았다.

퍼억-! 퍼퍼퍼퍽-!!

상대를 타격하는 자세가 굉장히 안정되어 있었다. 권법을 전문적으로 수련한 무인이란 말인가?

어찌나 빠른지 그가 주먹을 내뻗는 광경은 오직 유설과 유진산만이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나 맞았으면 즉사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죽을 듯이 휘청거리는 광대의 두 발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단번에 상황을 유추해냈다.

‘철포삼을 익힌 자로군.’

철포삼(鐵布衫). 몸을 단련해 맨몸을 철갑처럼 만드는 외문 무공이었다.

상대도 그것을 눈치챈 것일까?

한참이나 계속되던 그의 공격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헉, 헉! 내 주먹을 버티다니, 형씨 정말 대단하오. 포기하겠소.”

그가 실패를 시인하는 동시에 광대가 배를 움켜쥐며 소리쳤다.

“어이쿠, 이번엔 정말 죽을 뻔했구나! 아이고 배야!”

한발 늦은 반응이 웃겼던 것일까?

광대를 지켜보던 유설이 배꼽을 잡고 까르륵거렸다.

“히히히. 너무 재밌다. 할배도 한번 해봐.”

유설은 웃으면서 지켜보고 있었지만, 유진산의 입장은 달랐다.

겉보기와는 달리 광대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의 정체가 궁금할 정도였다.

마음을 먹는다면 못 할 것도 없었지만, 굳이 무리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아니다, 설아. 우리는 그냥 구경만 하는 게 좋겠구나.”

하지만 아이의 고집을 어찌 말리겠는가.

유설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유진산의 옷깃을 붙잡고 늘어졌다.

“힝. 빨리 보여줘~ 응?”

지켜보던 동구가 조심스럽게 유설의 등 뒤로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타일렀다.

“그럼 네가 하지, 왜 자꾸 할아버지를 못살게 굴어?”

낯선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까? 유설은 얼굴을 붉혔다.

“나는 부끄러워…….”

“그럼 할아버지는 안 부끄럽겠어?”

“…….”

잠시 손녀를 바라보던 유진산은 깊은 고민에 휩싸였다.

무엇보다 여비도 떨어졌고, 이렇게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없지 않은가.

이내 마음의 결정을 내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다, 그리하마.”

결정적으로는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는 흑야뱡의 추적자를 의식해서였다.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선 무위를 어느 정도 보여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손녀의 모습을 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히힛. 잘하고 와. 설이가 응원할게.”

어느새 광대는 아픈 기색을 하며 다음 도전자를 유인했다.

“아아, 배야……. 몸이 안 좋아서 오늘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도전을 받겠습니다. 이번엔 제발 약한 분이 나와 주세요.”

온몸을 흐느적거리는 광대는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연기를 계속하던 광대는 구경꾼들을 쓱 훑어보다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웬 조그만 아이가 앞으로 나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도 재미 삼아 도전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기에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아이고, 살았다! 우리 꼬마 대협이 나오셨군요!”

광대가 춤을 추자 구경꾼들이 깔깔대고 웃었다.

유진산은 그들의 반응은 뒤로한 채 상대 앞에 우뚝 서며 물었다.

“원 밖으로만 내보내면 되는 겁니까?”

손을 비벼대던 광대는 다시 한 손을 바가지가 있는 곳을 향해 내밀었다.

“예, 예. 그렇습죠. 한 대에 엽전 한 닢입니다!”

유진산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엽전 두 닢. 흑산차를 계산한 이후 그에게 남은 모든 재산이었다.

땡그랑-!

‘어쩔 수 없지. 우리 애기를 굶길 수는 없으니.’

철포삼을 깨트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그러자면 상대에게 필살의 일격을 가해야 한다.

하지만 일면식조차 없는 광대에게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상대를 쓰러트리지 않고, 밀어내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철포삼을 깰 필요는 없었다.

새가 날개를 펼치듯 그의 양손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이어서 양손을 휘저으며 유가건곤장의 초식을 준비했다.

‘하남에서 이 무공을 알아볼 자는 없겠지.’

요동치는 기의 흐름을 느낀 것일까? 그동안 아무런 방어조차 하지 않았던 광대가 돌연 하체를 구부렸다. 밀려나지 않기 위해 자세를 잡은 것이다.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표정은 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유진산이 아니었다.

유가건곤장 일초식 일파무흔(一破無痕).

그의 손바닥이 파도를 밀어내듯 광대의 복부를 향해 다가갔다.

쩌억-!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기의 파동.

구경꾼들은 놀라 뒷걸음질을 쳤고, 유진산의 얼굴에는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천근추를 사용해 버티다니, 제법이군.’

손바닥을 슬쩍 잡아당긴 유진산은 손목을 반 바퀴 회전했다.

찰나의 순간. 그의 손바닥이 섬전처럼 움직이며 다시 광대의 복부를 타격했다.

유가건곤장 사초식 일후섬타(一後閃打)였다.

쩌어엉-!!

충분히 내기를 담은 일격이었다.

다시 한번 천근추를 사용한 광대였지만, 이번에는 버틸 수가 없었다.

두 발이 지면에서 붕 떠오른 그의 신형은 무려 일 장이나 떨어져 나갔다.

“크윽!”

그가 비틀거리고 있을 즈음 구경꾼들의 열띤 환호가 울려 펴졌다.

“와아아아!”

“우와아아아!!”

영문을 모르는 그들이었지만, 어쨌거나 모두에게 아주 멋진 구경거리였다.

어느새 다시 다가온 광대가 은자 한 냥을 꺼내며 연기를 이어나갔다.

“아까 그만했어야 했는데! 아이고 내 돈!”

은자 한 냥을 건네받은 유진산은 재빨리 자리를 이탈했다. 자신에게 쏠린 시선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자리에선 보조개를 피어 올린 손녀가 물개처럼 양손을 계속 부딪쳐댔다.

“그리도 재밌더냐.”

유설이 그의 귀에다 입술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멋있었어, 할배. 최고야.”

손녀가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모처럼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유진산이었다.

“흐흠! 뭐 내가 소싯적에 그런 소린 많이 듣긴 했지.”

“근데 우리 그걸로 뭐 할 거야?”

“……뭘?”

“그거.”

상금으로 받은 은자를 얘기하는 것이리라.

갑자기 손녀가 좋아했던 진짜 이유가 아리송해지는 유진산이었다.

아무래도 관계는 없었다.

지금은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설이 맛있는 거 사줘야지. 어서 가자꾸나.”

유진산이 눈짓을 보내자 동구가 앞장서서 길을 틀기 시작했다.

“잠시 지나가겠습니다!”

볼일을 마치고 서둘러 자리를 이탈하는 일행들.

인파를 빠져나오는 그 순간, 돌연 유진산의 귀가 쫑긋거렸다.

뒤쪽에서 전음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 내 하남의 고수들을 거의 꿰차고 있지만, 당신 같은 인물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정체가 무엇입니까?

광대의 목소리였다.

말투로 보아 자신이 반로환동한 자임을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유진산은 고개를 슬쩍 돌려 뒤쪽을 살펴보았다.

인파에 둘러싸인 광대가 자신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 알고 싶으면, 자네 정체부터 밝히는 것이 순서 아니겠는가. 그저 사연이 있는 노인이라고 해두세.

- 혹시 다음에 또 마주치게 된다면 한 수 청해도 되겠습니까?

- 자신이 있다면, 언제든지.

* * *

이제 남은 것은 흑야방에서 접근해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여비도 생겼겠다, 일행은 투숙이 가능한 고급 객잔을 잡고 시간을 보내었다.

따분한 일상 속에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이날도 셋은 방 안에 틀어박혀 뒹굴고 있었다.

“계십니까?”

동구가 문을 열어주자 푸근한 인상의 점소이가 보였다.

“무슨 일이세요?”

“조금 전에 누가 이것을 전해주라고 하면서 맡기고 갔습니다.”

꾸깃꾸깃하게 접힌 쪽지였다.

드디어 흑야방에서 접선 준비를 마친 것이리라.

점소이가 돌아간 후 동구는 그것을 바로 유진산에게 건네었다.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내일 아침 객잔 앞에서 마차를 타라는군.”

“마차요?”

유진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살펴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적하기만 했다.

“정말 피곤하게 구는군. 접선하기가 뭐 이리 힘들어?”

“어쩔 수 없죠. 위치가 노출되면 개방의 습격을 받을 수 있다잖아요.”

그것을 모를 유진산이 아니었다.

배고픈 거지들이 흑야방에 몰래 정보를 팔아넘긴다는 소문까지도 나돌 정도였으니.

정말로 정보 유출까지 되고 있다면, 밥줄을 위협받는 개방이 흑야방을 노리는 것은 당연했다.

“어쨌거나 내일은 만날 수 있겠군.”

지금으로선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일행은 채비를 마치고 객잔의 문을 나섰다.

벌컥-!

역시나 마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순수한 인상의 마부가 문을 열어주며 안으로 안내했다.

“어서 타십시오, 계산은 다른 분이 먼저 하셨습니다.”

마부도 흑야방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리라. 캐물어도 나올 게 없을 터.

“일단 타자꾸나.”

“할배, 나 마차 처음 타봐!”

유설은 처음 타보는 마차에 신이 난 모양이었다.

그때 동구가 객잔에서 챙겨온 육포를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마차 여행에서 간식은 필수지.”

“히히. 잘 먹을게요, 아저씨.”

다행히도 손녀와 동구는 마차에 있는 게 즐거운 듯했다.

팔짱을 낀 유진산은 두 눈을 감은 채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마차를 타고 이동한 지 반나절.

해가 질 때쯤에서야 다시 마차의 문이 열렸다.

“자 도착했습니다. 어서 내리시지요.”

마차에서 가장 먼저 내린 유진산은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는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강가로 이어진 너른 모래밭. 그곳에 정박해 있는 나룻배 위에서 사공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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