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할아버지가 할 말이 있어 (2)
개봉의 번화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거리를 누비는 유설은 입이 귓가에 걸려 있었다.
함께 연극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실컷 먹었으니 좋을 수밖에.
언제 이런 날이 있었단 말인가.
연등으로 꾸며진 돌다리에 올라서자 좌우로 수십여 개의 노점이 펼쳐져 있었다.
“할배, 우리 저거 먹어 볼래?”
손녀가 가리킨 노점에는 앵두전(花菜煎)이라는 주전부리를 팔고 있었다.
앵두즙을 듬뿍 짜서 설탕과 함께 졸인 후 응고시킨 것으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다과였다.
유진산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오늘 설이가 먹고 싶은 건 싹 다 먹어 보자꾸나.”
할아버지가 웬일이란 말인가.
유설의 얼굴에선 해맑은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히히.”
흑야방에서 은자 몇 냥을 지원받았기에 주머니 사정도 넉넉했다.
앵두전을 사서 건네준 유진산은 흐뭇한 표정으로 손녀를 지켜보았다.
아삭아삭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는 걸 보니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맛이 괜찮지?”
“응, 정말 맛있어! 할배도 한 입 먹어봐.”
그는 얼떨결에 한 입을 얻어먹으며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이윽고 그의 시야에 노점 하나가 포착되었다.
“잠시만 여기서 먹고 있거라!”
“응? 어디가?”
이미 유진산은 어딘가로 냉큼 달려가고 있었다.
그가 달려간 곳은 빙락(氷酪)이라 불리는 값비싼 음료를 파는 노점이었다.
대패로 갈아낸 얼음 가루에 꿀과 과즙을 듬뿍 담아내어 그 맛이 무척이나 달콤하다.
과거에는 얼음이 금값이었지만, 당대에는 초석을 이용해 얼리는 기술이 있었기에 돈만 있으면 누구든 먹을 수 있었다.
딱 한 잔을 구매한 유진산은 조심스럽게 움켜쥐고 손녀에게 달려갔다.
“자, 이거 한 잔 마셔보거라. 이게 바로 개봉에서만 맛볼 수 있는 빙락이지.”
알록달록한 빛깔은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무심코 빙락을 음미하던 손녀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안에서 눈처럼 녹아내리는 달콤한 얼음 가루. 이토록 상큼하고 시원한 음료가 있었다니.
그 맛은 눈물까지 핑 돌 정도였다.
“……너무 맛있어.”
“그렇지? 우리 설이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사주마. 쭉 들이켜봐, 쭉.”
그는 손녀가 빙락과 앵두전을 다 먹을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아이의 얼굴에 만족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잘 먹었어, 할배.”
유진산은 소매로 아이의 입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개봉에는 진귀한 상점들이 아주 많단다. 머나먼 타국에서 들어온 물품들이 넘쳐나지.”
“정말? 보고 싶어.”
“그래, 그럼 지금부터는 그곳으로 가보자꾸나.”
유설은 할아버지의 팔짱을 끼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너무 좋아서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반 시진이 지난 뒤.
손녀의 양손에는 선물이 한 보따리나 들려 있었다. 옷가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먹을거리였다.
설산표국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그런데 먹을 건 왜 이렇게 많이 샀어?”
“응, 이거? 현희 언니 줄 거야.”
“그러려무나. 그러고 보면 역시 세상은 공평하지가 않아.”
유설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에?”
“우리 설이는 얼굴도 예쁜데, 마음씨까지 착하니까 말이다. 할아버지 말도 잘 듣고 말이야.”
그야말로 유설에게는 최고의 날이었다.
오늘처럼 할아버지에게 온종일 칭찬을 받은 적도 없었다.
“나는 세상에서 할배가 제일 좋아.”
손녀의 기분이 최고조에 이른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잠시 아이의 눈치를 살피던 유진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할아버지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해도 될까?”
“으응? 뭐? 내가 다 들어줄게!”
* * *
설산표국 내 흑야방의 본부.
유난히 두상이 예쁜 아이가 의자에 앉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티끌 하나 없이 고운 피부에 반들거리는 머리. 그리고 큼지막한 눈동자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끄흑.”
물론 본인이 동의한 일이었지만, 막상 머리를 밀고 나니 후회되는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도 다리 사이에는 시장에서 챙겨온 보따리가 꼭 끼워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시원해서 좋은데 왜 울고 그래.”
“…….”
“머리는 금방 자라. 아마 열 밤만 지나면 다 자랄걸?”
옆에서 같은 모습을 한 유진산이 위로해 보았지만, 쉽게 넘어갈 유설이 아니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녀가 팔을 휘저으며 토라졌다.
“거짓말하지 마! 흐잉.”
유설의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동자승으로 위장하기 위해 머리를 밀었으니 그럴 수밖에.
비록 목적은 달성했지만, 손녀가 우는 모습을 보는 마음이 어찌 편하겠는가.
유진산은 속이 타들어 간다는 듯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길 잠시 후.
드디어 기다리던 지원군이 나타났다.
“어머, 어떻게 이렇게 두상이 귀여워?”
흑야방의 부방주인 현희를 필두로 한 다섯 명의 여인들이었다.
“너무 귀엽다 얘. 언니가 한번 안아봐도 되니?”
“어쩜 이렇게 피부가 고울까? 너무 부러워~.”
“어떻게 민머리가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있어요?”
“와~ 예쁘장한 얼굴이 훤하게 보이니까, 미모가 너무 눈이 부시네.”
아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함이었지만, 여인들의 말이 아주 거짓인 것도 아니었다.
환골탈태를 겪고 화경의 반열에 오른 유설의 피부는 결점 하나 없는 백옥이었다.
게다가 주먹만 한 얼굴에 삼 할을 차지하는 큰 눈과 또렷한 이목구비까지. 머리카락이 없더라도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칭찬 세례에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일까?
어느새 울음을 멈춘 유설이 울먹이며 물었다.
“……정말요?”
유진산이 반들반들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그럼! 세상에서 우리 설이보다 예쁜 미인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지켜보던 여인들이 한술을 더 뜨며 맞장구를 쳤다.
“나도 설이와 같은 미모만 가질 수 있다면, 당장 머리를 밀겠어요.”
“저도요!”
“호호, 우리는 두상이 못 생겨서 안 돼요.”
울음을 뚝 그친 유설의 얼굴에 살금살금 미소가 피어올랐다.
기분이 좀 나아진 것일까?
손녀는 다리 사이에 끼워놓고 있던 보따리를 집어 들며 물었다.
“……언니들, 나랑 같이 이거 먹을래요?”
“응? 그건 뭐니?”
보따리를 열자 온갖 주전부리가 잔뜩 들어있었다.
전통 과자와 당과, 말린 과일 등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간식들이었다.
“와, 맛있겠다!”
“언니들 주려고 사 온 거야?”
“역시 얼굴이 예뻐야 마음씨도 예쁘다니깐.”
언제 울었냐는 듯 유설은 해맑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히히. 이거 먹어봤어요? 엄청 맛있어요.”
흑야방의 여인들에게 둘러싸인 손녀를 보니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유진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슬쩍 빠져나와 풍호를 만나러 갔다.
지하미로 어딘가에 마련된 방주의 집무실.
그는 몇몇 부하들과 함께 탁상의 지도를 살펴보고 있었다.
“바쁜 것 같은데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군.”
풍호가 벌떡 일어서며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서 이쪽으로 앉으세요.”
흑야방의 방주인 풍호는 뭐가 좋은지 실실 웃고 있었다.
머리가 시원해진 유진산의 모습 때문이리라.
“왜 그렇게 웃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나저나 설이는 기분이 좀 풀렸습니까?”
“아주 큰 일이 날 뻔했어. 자기가 동의해놓고선 저리 울면서 난리 칠 줄 어찌 알았겠는가.”
“하하.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 애들도 몇 명 같이 머리를 밀어줘야 안 운다니까요.”
유진산은 한 손을 휘저으며 대꾸했다.
“멀쩡한 애들의 머리는 뭐 하러 건들려고 해. 그보다 그것은 뭔가?”
탁상 위의 지도에는 거대한 사찰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소림사의 구조를 축소한 약도입니다. 출발하기 전에 외워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잘도 이런 정보까지 가지고 있구만. 참회동은?”
풍호의 손가락이 지도의 어딘가를 가리키며 천천히 움직였다.
“공교롭게도 가장 깊은 곳에 있어요. 사찰로 들어선 후 대웅보전과 장경각을 지나 이쪽으로 이동하세요. 여기서부터 탑림의 뒤편으로 가시면 무승들이 지키고 있는 동굴이 있을 겁니다.”
“어찌어찌 이곳까지 간다고 해도 빠져나오는 게 쉽지 않겠군.”
“네. 참회동의 죄수가 탈출하는 경우엔 사찰 전체에 경종이 울리고, 입구에 나한진이 펼쳐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전에 빠져나오셔야 해요.”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원강대사를 만나면 물어볼 것이 많았다.
참회동을 지키는 무승들을 쓰러트리고, 그를 추궁하기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를 터. 아무래도 탈출이 쉽지 않을 듯했다.
고민하던 유진산은 지도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손으로 짚었다.
“이쪽은 어디로 이어져 있지?”
“삼황채로 이어진 뒷길입니다. 하지만 이 방향은 엄두도 내지 않는 게 좋아요. 소림사에서도 배분을 막론하고 출입이 금지된 곳이니까.”
“무엇 때문에?”
지도상으로는 어떠한 특이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참회동과도 멀지 않은 방향이었다. 아무리 봐도 사찰의 정문이 아닌, 이쪽으로 퇴각하는 게 훨씬 수월해 보였다.
“산길이 험한 것은 둘째치더라도, 그 지역에는 미친 파계승이 돌아다니고 있답니다. 오래된 일이라 하남에서는 꽤 유명한 얘기에요.”
“파계승이라니?”
“방장스님의 사형인 정혜라는 인물이에요. 주화입마에 빠진 이후 수십 년간 숭산을 떠돌며, 곳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놨다고 합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던 유진산은 그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오래전 자신이 강호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절.
화경의 깨달음을 얻고, 천하십대고수에 포함될 정도로 고강한 무공을 소유한 무승이었다.
“그토록 강한 자가 미쳐 버리다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소림사에서도 꽤나 골머리가 아프겠어.”
“네. 몇 번의 포박 시도가 있었지만, 소림의 무공은 통하지도 않는 데다가 워낙 신출귀몰해 번번이 실패했다고 합니다.”
유진산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아직도 그곳에 있을까?”
“절대 숭산을 벗어나지 않는다네요. 입으로는 쉴 새 없이 보물을 찾는다고 떠들어 댄다는데, 정신이 완전히 나간 것 같아요.”
“무슨 보물……?”
도대체 뭐가 숨겨져 있길래 미쳐가면서까지 포기를 모른다는 말인가.
연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풍호가 탁상에서 오래된 고서를 집어 펼쳐 보였다.
“벌써 수백 년도 지난 전설입니다. 오래전 천축국을 방문한 현장(玄奘)이 밀교의 한 계파에서 절세신공을 훔쳐왔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현장의 이름은 유진산도 알고 있었다.
수나라 말기에서 당나라 초기에 걸쳐 활동한 고승으로, 세간에는 삼장법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인물이었다.
목숨 걸고 천축으로 넘어간 그는 수많은 불경을 가지고 돌아와 전파했으며, 그의 업적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크게 회자되고 있다.
“당시 그에게도 무엇인가 사연이 있었던 모양이군. 아무튼, 그 절세신공이 숭산 어딘가에 있다는 말인가?”
“기록으로는 그래요. 숭산의 회염굴에 그것을 지킬 훼룡(虺龍)과 함께 봉인해놓았다네요.”
훼룡은 영험한 능력을 지닌 사악한 뱀으로 알려진 영물이다.
유진산도 전설로만 들어봤을 뿐이었다.
그냥 웃고 넘길 소문이었지만, 그는 왠지 흥미롭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만약 수백 년 전에 봉인된 영물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엄청 강해졌겠군.”
풍호는 피식 웃으며 고서를 천천히 덮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지금쯤 신수급으로 성장했겠죠. 물론 믿을 사람조차 없겠지만.”
“한 명이 있지 않은가.”
“미친 파계승이요? 수십 년간 숭산을 그렇게 헤집고 다녔는데, 아직 회염굴의 입구도 찾지 못했다는데요.”
유진산은 팔짱을 끼고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화제를 돌렸다.
우선 눈앞의 일부터 고민하는 게 순서였다.
“그런데 소림사에 잠입할 방법은 찾았는가.”
철통같은 소림사의 입구를 통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동자승으로 위장한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풍호의 얼굴에는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이미 준비해 놓았어요. 어르신은 그냥 출발 시점만 정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