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지금부터 수련할 무공은 (1)
설산표국의 뒷마당에는 미리 준비된 가마가 놓여 있었다.
내부의 모습을 살펴보던 유진산은 연신 감탄했다.
“감쪽같군. 가마에 이런 숨겨진 공간이 있다니…….”
가마 안에는 소림사에 시주할 불상이 있었으며, 그 아래로 숨겨진 공간이 존재했다.
어른은 들어가지 못할 만큼 작은 공간이지만, 유진산과 손녀가 몸을 눕히기엔 적당해 보였다.
풍호가 그에게 보따리를 건네며 말했다.
“소림사의 승려복이니 근처에서 갈아입으세요. 가마 안쪽에도 염주와 목탁 등 위장에 필요한 도구 몇 개를 매달아 놨습니다.”
“수고했네. 이 정도면 문제없겠어.”
“언제 출발하실 겁니까?”
“갈 길이 먼데 머뭇거릴 필요가 뭐가 있겠나.”
풍호가 손짓을 보내자 여덟 명의 가마꾼이 다가와 기립했다.
“발 빠른 애들로 꾸렸으니, 나흘이면 도착할 겁니다. 그리고 각 지부에 전달해서 중간에 쉬어갈 수 있는 휴식처도 준비해놨어요.”
그의 성의에 마음이 따듯해지는 유진산이었다.
“이거 어떻게 보답해줘야 할지 모르겠군.”
“지금까지 어르신께 받은 은혜에 비하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뭐 남입니까?”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고맙고.”
유진산은 어딘가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곳에선 출발 준비를 마친 손녀가 현희의 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었다.
승려들이 착용하는 법모를 이마까지 눌러쓴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할배도 이거 써봐. 부들부들하고 좋아.”
유진산도 손녀가 건네준 또 하나의 법모를 눌러썼다.
승려복으로 갈아입기만 한다면 영락없는 동자승의 모습이었다.
“음, 따듯하고 좋구나. 이제 출발해야 하는데, 준비 다 됐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설이 손바닥을 내뻗으며 다급히 소리쳤다.
“잠깐만!”
“……왜?”
짐작되는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까?
유진산은 다소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손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어진 한마디는 전혀 상상도 못 했던 대답이었다.
“나 간식 두고 왔어.”
어딘가로 부리나케 달려가는 아이의 모습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 * *
목적지까지 가는 여정은 몹시 안락했다. 흑야방의 안배로 가는 곳마다 쉬어갈 수 있는 장소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림사는 숭산의 일부인 소실산에 있으며, 사찰의 입구까지 가는 길은 공개되어 있다.
시주하기 위해 올라오는 일반인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외부의 침입으로부터도 자신이 있기 때문이리라.
나흘이 지난 후.
인적이 드문 소실산의 기슭에서 승려복을 착용한 두 명의 아이가 가마 안으로 숨었다.
“지금부터는 천천히 이동할 테니, 아무 소리도 내시면 안 됩니다.”
그 정도로 눈치 없는 유진산이 아니었다.
작은 공간에 손녀와 함께 누운 그는 가마 밖으로 나직이 답했다.
“알겠네.”
이곳부터는 보는 눈이 많았기에 가마꾼들도 경공을 펼칠 수가 없었다.
정적 속에 지루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유진산은 옆에 누워 있는 손녀로부터 전음을 들었다.
- 할배.
- 응?
- 나 심심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어둡고 좁은 공간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은 아이에게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에게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할아버지가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줄까?
- 응!
- 오냐, 지금부터 들려줄 이야기는 당나라의 고승인 삼장법사가 손오공을 데리고 불경을 찾기 위해 서역으로 순례를 떠나는 이야기다.
- 순례가 뭐야?
순례는 종교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방문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그러한 내용을 아이가 좋아할 리가 없을 터.
- 백성들을 쥐어짜고 괴롭히는 쳐죽일 놈들을 때려잡는 일이지.
- 와아, 재밌겠다. 빨리 듣고 싶어~
손녀가 흥미를 보이자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진산도 신이 났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는 원작에도 없는 얘기까지 보태가며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정신없이 얘기를 듣던 손녀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 그래서 오공이는 어떻게 됐어?
- 음. 손오공은 우리 설이처럼 아주 힘이 억세서 아무도 당할 수가 없었지. 결국, 그 녀석들을 모두 여의봉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유설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까르륵거렸다.
- 히히히. 재밌다.
- 그리고 말이야. 지금 우리가 가는 곳에 서역에서 돌아온 삼장법사가 숨겨놓은 보물이 있다더구나.
- 정말? 거기 보물이 있다고?
동심이 발동한 것일까? 어둠 속에서 동공을 부릅뜬 손녀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 응. 지금 우리가 그것을 찾으러 가는 게다.
흑야방에서 들었던 허무맹랑한 전설을 손녀는 철석같이 믿는 모양이었다.
- 그 보물은 내 거야. 꼭 내가 갖고 말 거야.
유진산은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호두 같은 주먹을 움켜쥐고 각오를 다지는 손녀의 모습이 너무나 웃겼기 때문이다.
- 그리하려무나.
- 계속 듣고 싶어. 삼장법사와 손오공 이야기.
서유기 설화는 현장의 실제 경험에 허구가 더해져 만들어진 이야기로, 여든한 가지의 고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유진산도 기억하는 것은 그중에서도 극히 일부. 게다가 지어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도 손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그는 마지못해 수락했다.
- 그, 그래.
자신 있게 수락하긴 했지만, 급조한 이야기에 재미가 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야기는 점차 지루해졌고 손녀의 반응은 시들어갔다.
일각이 더 지난 후에는 유진산 혼자 뭔가에 홀린 듯 정신없이 떠들어댔다.
그렇게 일식경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 왜 이렇게 조용해?
“…….”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단지 신경질적인 코골이 소리만 들려왔을 뿐.
드르렁-!
그사이 잠이라도 들었단 말인가? 유진산은 다급히 기막(氣膜)을 둘러 소리가 가마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차단했다.
절대고수는 언제든지 자신의 의지로 잠을 조절할 수 있다고 한다. 잠을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고, 깨어나고 싶을 때 깰 수 있다는 의미였다.
‘고 녀석 참……. 한숨 푹 자두거라.’
자신의 얘기를 듣는 것보다 잠을 자는 것을 택하다니.
괘씸할 만도 했지만, 아이가 무엇을 하던 유진산의 눈에는 예뻐 보이기만 했다.
자신의 하나뿐인 손녀가 어찌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지금쯤이면 거의 도착할 때도 된 것 같은데.’
그는 어둠 속에서 가슴 위에 양손을 얹은 채 두 눈만 끔뻑였다.
양쪽 귀는 가마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향해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길 잠시 후. 가마가 멈추는 순간 유진산은 조심스럽게 아이를 깨웠다.
혹시라도 무공이 강한 승려가 있다면 기막을 눈치챌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 아가, 어서 일어나거라. 도착한 것 같구나.
밖에서는 가마꾼들과 승려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천양사에서 보낸 불상이라고요?”
“예. 주지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요즘 사찰에 도둑이 많아서 안전한 소림사에 기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미타불. 이곳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지요. 제가 절차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천양사는 하남의 최북단에 있는 작은 사찰이다.
흑야방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지만, 가마꾼들의 능숙한 거짓말은 거침이 없었다.
유진산과 손녀는 적당한 위치에 이르기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소림사의 승려들에게 인계된 가마는 어딘지 모를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잠시 후 승려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사형, 천양사에서 불상을 보내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사찰에 불상이 부족했는데 마침 잘되었구나. 내가 사부님께 보고할 테니, 안에 넣어둬.”
“예.”
벌컥-!
불빛 한 점 없이 어두워진 것으로 보아 어딘가의 창고로 이동된 듯했다.
인기척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유진산은 손녀와 함께 가마에서 기어 나왔다.
“이제 좀 살 것 같구나.”
“신난다. 빨리 가보자.”
유진산은 손녀의 팔에 염주를 끼워주며 말했다.
“여기서부턴 위험한 곳이니 조심해서 행동해야 해. 할아버지만 잘 따라오너라.”
“알았어.”
창고 밖으로 나오자 웅장한 전각들과 어딘가로 바쁘게 움직이는 승려들이 보였다.
유진산은 미리 외워둔 약도를 따라 손녀를 이끌고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처음 보는 소림사의 광경에 유설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와아, 스님들이 엄청 많아.”
“눈에 띄니깐 고개 돌리지 말고, 앞만 보고 걸어.”
“응.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참회동이란 곳이다. 도착하면 할아버지 혼자서 들어갔다 올 테니, 넌 밖에서 지키고 있어.”
“내 보물 가지고 나올 거야?”
“그래.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조용히 하는 게 좋겠구나.”
그러거나 말거나 유설의 얼굴에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할배, 나 손 잡아주면 안 돼?”
“쉿! 지금은 안 돼. 이따 돌아갈 때 잡아줄게.”
“힝…….”
경로를 따라 이동하길 잠시 후.
좌측으로 보이는 대웅보전을 슬쩍 바라본 유진산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활짝 열린 전각의 내부 모습 때문이었다.
마치 강기가 가르고 지나간 듯, 거대한 와불상이 반으로 쩍 갈라져 있었다.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닌 무예의 성지인 소림사였다. 거기서도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대웅보전에서 누가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인가.
추측되는 자는 한 명밖에 없었다.
‘설마 정혜대사가 회염굴의 입구를 찾겠다고 불상이라도 부순 것인가?’
풍호가 말했던 미친 파계승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했지만, 지금 중요한 부분은 그것이 아니었다.
유진산은 표정을 관리하며 손녀와 함께 더욱 깊은 곳으로 이동했다.
어린 승려들이 어딘가로 바삐 지나가고 있었지만, 자신들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자는 없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등 뒤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너희들 여기서 뭐해?”
대략 열한 살쯤 되었을까? 자신들보다 키가 좀 더 큰 어린 승려였다.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히다니. 유진산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
“빨리 안 모이면 큰일 난다고. 혜운 사백조께서 노하셨으니까, 빨리 이동해야 해.”
목적지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어딜 간단 말인가.
유진산이 당황하며 머뭇거릴 찰나. 옆에서 유설이 큰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왜에?”
“지금 상황에서 왜라니? 여기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지? 너 이름이 뭐야?”
“……설이.”
눈앞의 어린 무승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할 정도로 곱상한 얼굴과 어딘지 모를 어색한 목소리.
그러나 소림사에 여승이 들어왔다는 것을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길게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유진산과 손녀의 틈새로 파고든 아이는 둘을 향해 양팔을 내뻗었다. 뒷덜미 부근의 승려복을 움켜잡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야단맞으니까, 빨리 따라와.”
마음 같아선 기절이라도 시키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너무나 많았다.
둘은 얼떨결에 어딘가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유진산은 주위를 둘러보며 아이에게 전음으로 행동지침을 당부했다.
- 네가 여자인 게 들통나면 여기서 바로 쫓겨날 테니, 지금부터는 최대한 말을 아끼거라.
- …….
-이곳엔 무서운 사람들이 많으니 항상 조심해야 해. 대신 일을 잘 마무리하면, 할아버지가 멋진 선물을 사주마.
선물이라는 얘기가 나오자 시무룩했던 손녀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소림사의 대연무장.
항렬이 가장 낮은 승려들만 소집된 것일까?
엄청난 수의 동자승들이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어림잡아 그 수가 최소 오백 명은 넘어 보였다.
“너희들도 어서 저쪽으로 합류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열의 가장 후미로 이동한 둘은 단상 위에 서 있는 노승을 바라보았다.
그의 이마에 힘줄이 불끈 솟아 있는 것으로 보아 잔뜩 화가 난 듯했다.
“어찌 이리도 동작들이 늦는단 말이냐. 내 이곳에서 이십 년이나 무공을 지도해왔지만, 너희들처럼 형편없는 항렬은 본 적이 없었다.”
작은 중얼거림이었으나, 마치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웅장한 목소리였다.
최소한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을 보유하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수법이었다.
뒷짐을 진 그는 분노 서린 음성을 연이어 토해냈다.
“수양이 부족한 너희를 보니 소림의 앞날이 몹시 어둡도다. 하여 방장스님의 허락을 구해 오늘부터 특단의 훈련을 시행하기로 하였다.”
말을 마친 그가 불호를 외치자 어디선가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오십여 명에 이르는 젊은 승려들. 무슨 이유에서인지 손에는 죽봉이 움켜쥐어져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동자승들은 술렁거리며 동요했다.
“사, 사숙?”
“사숙님들이 왜 여기에……?”
곧이어 이어진 노승의 한마디는 동자승들을 절망에 빠트리고야 말았다.
“지금부터 수련할 무공은 철포삼이다. 훈련을 돕기 위해 너희들의 사숙들을 불렀으니, 어디 최선을 다해 버텨보아라.”
철포삼(鐵布衫)이 무엇인가. 신체를 끊임없이 두들겨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외문무공이었다.
방법은 어렵지 않지만, 그 과정이 워낙 무식하여 제대로 연마한 자들이 많지 않다.
그리고 고역 끝에 철포삼을 완성한 무승에게는 소림의 상승무공인 금강불괴신공을 연마할 자격이 주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충격적인 상황에 주변이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
유설은 얼마 전 거리에서 엽전 한 닢에 한 대씩 맞아가며 돈을 벌던 광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그가 익힌 무공이 철포삼이라고 했던 말도 말이다.
- 할배, 이제 우리 큰일 났어.
손녀의 전음에 유진산은 안색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