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저 봉우리만 넘으면 되는데 (1)
벽면을 뚫은 곳이 장경각의 뒤쪽이었기 때문일까?
유진산과 손녀가 들어간 곳은 은밀한 구조로 만들어진 방이었다.
가지런히 늘어선 백여 개의 작은 신장상(神將像)들.
무시무시한 모습의 좌불상들은 무릎에 서적을 한 권씩 올려둔 모습이었다.
“와아…….”
유설은 눈을 떼지 못했다. 신비롭고 웅장한 분위기에 매료된 모양이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으니, 어서 가자꾸나.”
유진산도 내심 서적들을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나하나가 만금의 가치를 지닌 상승무공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위망이 점점 좁혀지고 있었기에 잠시도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장경각의 정문에도 무승들이 지키고 있을 터.
유진산은 문으로 나가지 않고, 반대편으로 이동하여 벽면을 후려쳤다.
콰앙-!!
또다시 구멍을 뚫어내자 좀 더 큰 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곳에도 수많은 서적들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조금 전과 같은 웅장함은 없었다.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서적들이리라.
뭐가 어찌 되었든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지금은 탈출만 생각하기에도 바빴으니.
유진산은 계속해서 벽을 뚫고 나아갔다.
콰앙-!! 콰앙-!!
두 번의 벽을 더 뚫어내자 빛살이 들어오며, 외부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포위망이 계속 두툼해지고 있었기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여기부턴 네가 앞장서거라.”
“알았어.”
죽봉을 움켜쥔 유설이 앞에서 길을 뚫기 시작했다.
유진산이 뒤에서 보조를 맞추며 방향을 일러주고 있었다.
승려들의 집요한 추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집요한 녀석들.’
추격의 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가용 가능한 전력을 총동원한 듯했다.
잔챙이들이야 신경 쓸 것이 없었지만, 고강한 무공을 지닌 무승들도 상당히 많았다.
손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진즉에 쓰러졌을 터였다.
우여곡절 끝에 포위망을 겨우 벗어났지만, 상황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저 마두들이 장경각의 무공 비급을 훔쳤다!”
유진산은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장경각을 빠져나오면서도 서적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중놈들이 이제 우리를 도둑으로까지 몰아가는구나.”
그때 유설이 고개를 돌려 씩 웃어 보였다.
품속에서 서적 한 권을 쓱 꺼내어 보여주면서 말이다.
“내가 빌려왔어. 심심할 때 읽을 거야.”
“…….”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었다.
지금 상황에서 탓해봐야 의미가 없었기에, 손녀가 쥐고 있던 서적의 제목부터 확인했다.
‘……백보신권?’
백보신권(百步神拳). 권력을 발출하며 멀리 떨어진 적을 격타하는 상승무공이다.
소림에서 자랑하는 이 무공은 명불허전의 위력을 가지고 있으며, 금강의 칭호를 얻은 극소수의 승려에게만 수련할 자격이 주어진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가치로만 따진다면 제대로 된 물건으로 고른 것이다.
어쨌거나 승려들이 기를 쓰고 쫓아오는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된 셈이었다.
“이놈들, 당장 비급을 내놓지 못할까!”
뒤에서 돌려오는 호통으로 보아 확실했다.
자신들을 잡는 것보다 비급 회수를 우선시하고 있음을.
“어서 할아버지한테 건네주거라.”
“보고 싶어? 이따 다시 나한테 돌려줘야 해.”
“알았다.”
비급을 건네준 유설은 다시 앞장서서 전진해 나갔다.
그러길 잠시 후.
어느 순간 조손의 발걸음이 뚝 멈추었다.
탑림에서 삼황채로 이어지는 소로.
목적지로 향하는 뒷길이 이미 막혀있었기 때문이다.
네 명의 승려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마에 점이 한 개부터 네 개까지 찍힌 모습이 다른 나한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사대금강?”
달마동에서 참선 중이었던 그들이 방장스님의 허락을 받고 나온 것이다.
한명 한명이 초절정의 수준이며, 이들의 합격진은 화경의 고수도 제압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아미타불. 이곳으론 지나갈 수 없습니다.”
앞에는 사대금강이 버티고 있고, 뒤에는 수백여 명의 무승이 좁혀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지만, 유진산은 당황하지 않았다.
단지 무공비급을 양손으로 움켜쥐었을 뿐.
“물러서지 않으면 이 비급을 갈가리 찢어버리겠다!”
길을 막고 있던 금강들이 잠시 움찔거렸다.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야 할 장경각의 상승무공, 백보신권의 진본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설마 이런 식으로 협박하고 나올 줄이야. 승려들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어갔다.
“어찌 그리도 비겁한 짓을…….”
“비급을 어서 돌려주시오!”
유진산은 비급을 양손으로 움켜쥔 채 앞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어디 허튼수작 한번 부려봐라.”
자칫 비급이 소실되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을 터. 누구도 함부로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들이 주춤거리는 사이 유진산과 손녀는 금강들의 사이를 쓱 지나쳐 통과했다.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에 승려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러길 잠시 후.
“어서 쫓지 않고 뭣들 하는 게냐!”
먼 곳에서 나이든 노승이 달려오며 소리를 질러댔다.
다가오는 혜운대사를 향해 사대금강이 합장해 보였다.
“쫓아오면 장경각에서 훔쳐온 무공비급을 찢어버린다고 합니다.”
“서적이 없으면 무공이 영영 사라지는 것이더냐? 비급은 다시 제작하면 그뿐이니, 어서 쫓아!”
“하지만 이곳부터는 출입이 금지된 곳이지 않습니까?”
혜운대사가 답답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았다시피 음양쌍괴는 지금 몹시 지쳐있다. 부처님께서 주신 기회를 어찌 이렇게 놓친다는 말이더냐.”
“……방장스님이 아시면 노하실지도 모릅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짊어지겠다. 어서 가서 놈들을 잡고, 도난당한 비급을 되찾아 오너라.”
* * *
한편 좁은 산길을 달리던 유진산과 손녀는 갈림길을 마주했다.
잠시 경공을 멈춘 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무리해서 움직였기 때문일까? 유설의 얼굴이 조금 지쳐 보였다. 그토록 무공을 남발했으니, 내력의 소모 또한 적지 않을 터.
“아가, 지금부터 할아버지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응?”
“여기서부턴 따로 가야겠구나. 개봉에 있는 풍호 아저씨한테 찾아갈 수 있지?”
유설은 한 번 지나온 길은 절대 잊어먹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두 시진 안에 그곳까지 달려갈 수 있을 터였다.
“왜? 같이 가면 안 돼?”
“쫓아오는 놈들을 분산시켜야 쉽게 도망치지.”
“…….”
손녀의 눈빛이 이유를 묻고 있었지만, 설명해줄 틈이 없었다.
유진산은 움켜쥐고 있던 백보신권의 비급을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들고 어서 가거라. 그리고 이건 네 선물…….”
이어서 그가 품에서 주섬주섬 꺼낸 것은 참회동에서 발굴해온 야명주였다.
알록달록하고 영롱한 빛깔에 아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와아……. 내 보물이 정말 있었네.”
“어두울수록 더 빛이 나는 귀한 구슬이지. 자, 시간이 없으니 빨리 가자꾸나.”
“할배, 정말 괜찮은 거지?”
유설은 뭔가 기분이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훑어보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더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럼, 당연하지. 우리 설이는 경공이 빠르니 좌측 길로 가. 할아버지는 우측의 지름길로 가마.”
“알았어, 할배. 꼭 도망쳐와야 해.”
“오냐. 중놈들이 다 네 쪽으로 쫓아갈 테니, 최대한 빨리 달리거라. 저녁에 설산표국에서 보자꾸나.”
“응!”
잠시 눈빛을 교환한 둘은 갈림길을 향해 각자 내달렸다.
손녀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무섭게 유진산이 경공을 멈추었다.
‘어서 내려가거라. 최대한 빨리.’
말과는 달리 손녀를 보낸 방향이 지름길이었다.
깎아지른 절벽에 비좁게 이어진 험로였지만, 허공답보를 쓰는 유설에겐 평지나 다름없는 길이였다.
긴장이 풀렸기 때문일까? 돌연 그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크윽…….”
유진산은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의 승려복을 젖혀보았다.
우측 가슴에 각인된 붉은 손바닥 자국. 도주하던 와중 누군가의 철사장(鐵砂掌)에 당한 상처였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 이미 그의 몸 곳곳에는 크고 작은 부상이 여러 개였다.
티끌의 상처도 없는 유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상처에 맺힌 핏물을 짜내어 바닥에 흔적을 남겼다.
극심한 통증에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지만,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엄청난 기운들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타앗-!
또다시 이동을 시작한 유진산은 체내의 기(氣)를 발출하며 적들의 주의를 끌었다.
“이쪽이다!”
“마두들이 이쪽으로 갔다!”
유진산은 상처를 움켜쥔 채 정신없이 달렸다.
호흡은 거칠어지고,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들은 조금씩 가까워졌다.
아마도 사대금강이리라. 한 명도 벅찬 마당에 네 명과 싸우면 승산이 없었다.
정상적으로는 도주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 유진산은 기억을 더듬어 지도의 위치를 되새겨보았다.
‘아마도 저 봉우리만 넘으면…….’
절벽 아래로 강이 이어져 있을 터.
그곳에서 뛰어 내린다면 추격을 따돌릴 수 있을 듯했다. 목숨을 건진다면 말이다.
그리고 목표지점을 얼마 남겨두지 않을 시점이었다.
돌연 죽기 살기로 질주하던 유진산의 경공이 갑자기 멈추었다.
“……?”
그의 동공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포위를 당했을 때도 긴장하지 않았던 그가 동요하고 있었다.
전면으로 십여 장.
나무의 틈새에 끼어 있는 거대한 바위 위에서 누군가 쪼그려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누더기처럼 찢어진 가사에 거지처럼 산발한 머리의 노인.
나무줄기를 질겅질겅 씹고 있는 모습이 정상적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설마?’
떠오르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소림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파계승 정혜대사.
흑야방의 정보가 기우이기를 바랐지만, 그가 확실했다.
“형아, 어디 가?”
다짜고짜 형이라니. 유진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벌써 내가 반로환동한 노인임을 눈치챘단 말인가?’
그가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사이. 돌연 쪼그려있던 파계승이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스스스슥-!!
유진산은 생각할 것도 없이 재빨리 상체를 비틀었다. 어느새 그가 자신의 측면에서 손을 내뻗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앙-!
앞가슴을 스쳐 지나가던 손아귀가 돌연 방향을 틀었다.
가공스러운 속도는 부상당한 몸으로 피하기에 너무나도 빨랐다.
“크윽!”
순식간에 제압당한 유진산은 이미 파계승의 옆구리에 끼워져 있었다.
힘이 어찌나 억센지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치 재밌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아이 같았다.
“흐히히힛. 형, 이거 먹어 볼래?”
고개를 올려 보자 파계승이 질겅질겅 씹었던 나무줄기를 내밀고 있었다.
자신을 시험하는 것일까?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이거 낭패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