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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88화 (88/238)

88화 저 봉우리만 넘으면 되는데 (2)

유진산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씹어대던 나무줄기를 먹으라고 내밀다니.

‘아니 세상에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지……?’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목은 이미 파계승의 옆구리에 끼워져 있었고, 거부하는 순간 목뼈가 부러질 터.

“먹을 거야?”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유진산은 울상을 지으며 천천히 입을 벌렸다.

파계승이 낄낄거리며 손에 쥔 줄기를 가져다 대었다.

“으…….”

비참함을 무릅쓰고 입을 벌렸지만, 느껴지는 감촉이 없었다. 그의 손이 자신의 코앞에서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실없이 웃던 파계승의 얼굴이 돌연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우리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유진산은 슬쩍 고개를 돌려 길목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쫓아왔던 네 명의 승려가 그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당신은 승려의 자격을 잃었으니,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소.”

“방장스님의 경고를 잊으셨소? 어서 그자를 우리에게 건네고 숭산을 떠나시오.”

사대금강의 경고에도 파계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보물을 찾기 전까진 못 나가!”

믿을 수 없게도 그는 유진산을 옆구리에 낀 채로 출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단신으로 사대금강과 싸우려는 자가 무림에 얼마나 있겠는가.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그의 전신을 보며 금강들은 몹시 긴장했다.

“……역근경입니다.”

“어떡합니까, 사형?”

이마에 점 하나가 각인된 일 금강이 무기를 회수하며 한발 물러섰다.

“일단 철수한다.”

뒷걸음질 치던 승려들은 망설임 없이 뒤돌아 내달렸다.

그들의 등 뒤에서 파계승이 주먹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우리 집에 또 오면 죽을 줄 알아!”

무공이 얼마나 강하기에 명성이 자자한 사대금강마저 도주한단 말인가.

붙들려 있는 유진산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

인상을 쓰던 파계승이 다시 낄낄거리며 유진산을 바라보았다.

“형, 이제 우리 뭐 하고 놀까?”

나이가 지긋한 노승이 동자승에게 형이라 부르고 있었지만, 웃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신중히 대답해야 했다. 감정 기복이 심한 미친놈이었으니까.

자칫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하면 일거에 자신을 죽일 터.

‘까딱 잘못 말했다간 목이 꺾이겠구나.’

유진산은 심사숙고 끝에 그가 가장 흥미 있어 할 것을 제안했다.

“……보, 보물찾기할까?”

동공이 커지는 것을 보니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내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그,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형이 가져오마. 얼른 가서 찾아올 테니 잠시…….”

유진산은 말을 하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웃고 있던 파계승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거짓말쟁이, 나쁜 형!”

그의 손아귀가 빛의 속도로 움직이며 자신의 발목을 낚아챘다.

“으악!”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린 유진산은 속이 타들어 갔다.

예측이 어려운 만큼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토록 무기력한 상황이 언제 또 있었단 말인가.

“거짓말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미친 파계승이 자신의 얼굴 앞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거, 거짓말이 아니다. 나한테 찾을 방법이 있어.”

“또 거짓말!”

그의 주먹이 불끈 움켜쥐어졌다.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내가 이렇게 어이없이 죽을 운명이었다니…….’

단두대에 매달린 죄수의 느낌이 이러할까? 유진산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렇게 죽음의 문턱에 이른 순간.

돌연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의 외침이 들려왔다.

“우리 할배 놔줘!”

“……?”

먼 곳에서 한줄기 빛살이 벼락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먼저 보냈던 손녀가 되돌아온 것이다.

‘아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상대가 보통내기가 아니었으니.

반사적으로 쏘아져 나가는 파계승의 오른손.

마치 뱀처럼 움직이는 손아귀는 손녀의 목을 틀어쥐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를 너무 얕보았던 탓일까?

파계승의 손아귀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아이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파앙-!

찰나의 순간 파계승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상대가 자신의 손길을 피해낸 것도 모자라 허리춤에서 일장을 내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하기엔 너무나도 가까웠으며,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유가건곤장 절초 맹룡산격(猛龍山擊). 그야말로 필살의 초식이었다.

곧이어 푸른 강기에 휩싸인 앙증맞은 손바닥이 파계승의 허리에 정확히 꽂혔다.

쩌엉-!!

거대한 종이 울리듯 웅장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기(氣)의 파동에 바람이 휘몰아쳤다.

“아악!”

파계승의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온 한 줄기 신음.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쓰러지기는커녕 우뚝 서 있는 두 다리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던 것일까? 유설은 재빨리 거리를 벌리며 물러섰다.

천부적으로 싸움의 재능을 타고난 아이였다. 본능적으로 위험한 상대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역시나 자신이 적중시킨 부위에 황금빛 휘광이 맴돌고 있었다.

달마조사가 남긴 소림의 제일 무공, 역근경(易筋經)의 잔상이었다.

“…….”

유설을 살펴보던 파계승은 재밌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 기괴한 웃음을 뿜어냈다.

“비구니다! 소실봉에 꼬마 비구니가 왔어! 히히힛!”

비구니는 여자 승려를 뜻하는 말이다. 상대의 정체를 단번에 꿰뚫어 보는 그의 안목은 놀라울 정도였다.

몹시 화가 난 듯 유설이 쌍심지를 켜며 중얼거렸다.

“우리 할배 돌려줘……. 죽을 때까지 두들겨 맞기 전에.”

어설픈 협박에 겁먹을 파계승이 아니었다. 그는 왼손으로 붙잡은 유진산의 발목을 쓱 들어 올리며 웃어 보였다.

“흐히히히! 안 돼, 나랑 보물찾기할 거니까.”

보물이라는 말에 유설이 한숨을 내쉬었다.

“보물은 나한테 있어.”

“……?”

낄낄거리던 파계승의 웃음이 갑자기 뚝 멈췄다.

그의 시선이 품속을 뒤지는 아이의 손으로 향했다.

유설은 아깝다는 표정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할아버지에게 받은 선물을 꺼내었다.

영롱한 빛깔을 내는 구슬.

야명주를 보며 유진산은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우리 할배가 동굴에서 찾아준 거야. 이거 줄게.”

아니나 다를까.

파계승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소리쳤다.

“이건 보물이 아니야!!”

“……?”

유설의 시선이 거꾸로 매달린 할아버지의 눈을 마주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듯한 눈빛으로 말이다.

해명할 틈이 어디 있겠는가.

파계승이 폭주하기 전에 어서 그를 설득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으니.

다행히도 손녀가 시간을 벌어준 동안 유진산은 다음 수를 정리할 수 있었다.

“회염굴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입구가 진법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심술 가득했던 파계승의 얼굴이 탁 풀어졌다.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았어?”

부릅떠진 동공과 의문이 가득한 표정엔 진심이 가득했다.

유진산은 자신의 말이 먹혀들자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미친놈아. 수십 년이나 이곳을 뒤지고서도 입구를 찾지 못했다면, 그것 말고 뭐가 더 있겠느냐.’

물론 마음속으로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아까 형이 찾을 방법이 있다고 말했잖아. 우선 나를 내려주면 알려주마.”

파계승은 망설임 없이 유진산을 놓아주었다. 언제든 다시 잡을 수 있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가까스로 지상에 내려선 그는 거리를 조금 벌렸다. 그러자 손녀가 냉큼 달려와 허리를 끌어안았다.

“할배, 괜찮아?”

“응. 잠시 얘기 좀 해야겠으니, 방심하지 말고 잠시 물러서 있거라.”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유설이 한 발자국을 물러서며, 호위무사처럼 기립했다. 양손을 추켜든 모습이 여차하면 언제든 출수하겠다는 자세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산은 파계승의 설득을 이어나갔다.

“회염굴 안에는 훼룡이라는 영물이 절세신공의 비급을 지키고 있다. 잘 알고 있겠지?”

파계승은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계속 끄덕거렸다.

겉으로는 그를 다루기 쉬어 보였으나 결코 허투루 대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반쯤 미쳐있음에도 보물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이었으니까.

“우리 가문에는 신수의 영단으로 만들어진 무림기보가 있다. 훼룡이 있는 곳과 가까워지면 이 기보가 어떻게든 반응을 할 게다. 청랑(靑狼)이라는 영물을 잡았을 때도 그랬으니까.”

유설이 자신도 그 이름을 기억한다는 듯 고개를 휙 돌리며 물었다.

“살인 늑대?”

“그래, 그 청랑의 영단을 네가 삼키지 않았더냐.”

유진산은 조심스럽게 파계승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는 넋을 놓은 채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전율하고 있는 것이리라.

결정타를 날려야 할 순간이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무림십대기보(武林十大奇寶)에도 이름을 올렸던 화룡신창이다. 창귀라 불리던 우리 조상님이 쓰던 무기지.”

“화룡신창? 어, 어딨어……?”

“집안의 가보인데 그냥은 못 주지. 날 죽여도 얻어낼 수 없다.”

갑자기 파계승이 유진산 앞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혀엉…….”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하는 것을 보니 진심으로 갖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냥은 안 돼.”

“그, 그럼?”

처지가 바뀌었기 때문일까? 팔짱을 끼는 유진산의 얼굴엔 여유로움이 넘쳐났다.

“그럼 너는 나한테 뭘 줄 수 있지?”

“잠, 잠깐만…….”

잠시 두리번거리던 파계승이 돌연 어딘가로 쏘아져 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 그는 이십여 장이 떨어진 나무 아래를 맨손으로 파내고 있었다.

“…….”

두더지 같은 그의 모습을 유진산과 손녀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러길 잠시 후.

무엇인가를 움켜쥔 파계승이 해맑은 모습으로 달려왔다.

투박하게 생긴 목함.

겉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대, 대환단?”

대환단(大還丹). 소림사에서 비전으로 내려오는 진귀한 보물이자 최고의 영약이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유진산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이거라면 화룡신창과 바꾸더라도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응, 정명이한테 뺏어온 거야! 이거랑 바꾸자! 응?”

정명이라는 법명을 가진 인물은 한 명밖에 없다. 그의 사제이자 소림사의 방장이었다.

그동안 눈앞의 인물이 소림에 얼마나 골머리를 썩였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너를 어떻게 믿고? 가보를 가져오면 네가 우리를 죽이고, 빼앗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 그럼 어떡하지?”

유진산은 손녀의 어깨에 한 손을 턱 올리며 말했다.

“일단 대환단을 먼저 얘한테 먹여.”

“안, 안 돼. 먹고 도망칠 거잖아!”

역시나 쉽게 넘어오질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포기할 유진산도 아니었다.

“우리 손녀가 가보를 가져올 동안, 나는 여기에 너와 함께 남아있을 거다. 이후에 그걸 너한테 전달해주고 우린 헤어지는 거다. 그럼 공평하지?”

뭔가 찜찜한지 파계승은 턱을 괴고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한다고 다른 방법이 나올 리가 만무했다.

“좋아, 형 말대로 할게!”

파계승은 대환단을 건네주고는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심마(心魔)에 빠져 광인이 되어서도 놓지 못했던 염원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좋을 수밖에.

그를 뒤로한 채 유진산은 목함을 움켜쥐며 손녀를 바라보았다.

“아가. 어서 이거부터 먹거라.”

대환단이 뭔지 모르는 유설은 별로 내켜 하지 않았다.

거무튀튀한 구슬 같은 것이 별로 먹음직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배가 먹으면 안 돼?”

유진산은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만에 하나 변수에 대비해서라도 손녀에게 먹여두는 것이 안전했으니까.

길게 설명할 틈이 없었다. 파계승의 마음이 다시 변하기 전에 먹여야 했다.

“개봉까지 뛰어갔다 오려면 배고플 텐데 든든하게 먹고 가야지. 이거 한 알만 먹어도 배가 부를 게다.”

“…….”

“자 어서 입부터 벌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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