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소림사의 고인물 (2)
파계승이 유진산의 앞을 가로막으며 출수할 태세를 갖추었다.
절대로 그를 넘겨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두 눈에 이글거렸다.
그 모습에 혜광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깊게 탄식했다.
“도대체 왜 저자를 감싸는 것입니까?”
“우리 형이야.”
“이 제자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처음 보는 마두를 형님으로 삼으셨다는 말입니까?”
당대 소림사의 제일 고수 혜광.
드디어 그가 앞으로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저벅-!
고작 한 걸음이었지만, 마치 해일(海溢)이 다가오는 듯했다.
거대한 위압감은 파계승의 뒤에 숨어있는 유진산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또다시 그가 한 걸음을 내디딜 찰나. 돌연 파계승의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죽여버린다고 했다!”
더는 접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강호를 통틀어 혜광에게 이렇게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존재가 누가 있겠는가.
해일(海溢)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것을 막아줄 태산(太山)이 떡하니 앞에 버티고 있었다.
그 순간 파계승과 혜광의 전신으로 동시에 금빛 휘광(輝光)이 발출되었다.
쏴아아아-!
소림의 제일 고수에게만 전수되는 달마역근경. 세상에서 유일하게 이것을 익힌 두 명의 고수가 마주한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서로의 실력을 잘 알기 때문일까?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지만, 둘 중 누구도 쉽게 선공을 개시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지켜보던 유진산은 뒤로 슬쩍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이미 서로 여러 번 싸워본 모양이군.’
그는 침묵을 지키면서도 상황을 분석해 보고 있었다.
대화 내용과 정황으로 말미암아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동안 소림사에서 파계승을 잡으려고 무수히 많은 시도를 했을 터. 그 자리에 혜광이 없었을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서로를 제압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아직은 죽을 운명이 아니로구나.’
아니나 다를까. 혜광의 전신을 감싸던 황금빛 광채가 먼저 소멸했다. 싸움을 포기한 것이다.
그가 한발을 물러서자, 파계승이 양손을 번쩍 치켜들며 낄낄거렸다.
“으히히힛! 내가 또 이겼다!”
혜광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단지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불호를 읊조릴 뿐.
“아미타불. 언제까지고 이렇게 사부의 광기를 좌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파계승은 쌍심지를 켜며 어깨 위로 주먹을 잡아당겼다.
그의 경고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했다.
“빨리 우리 집에서 꺼져!”
“…….”
혜광대사는 그렇게 사찰이 있는 곳을 향해 유유히 사라져갔다.
위기를 넘겼지만, 유진산의 마음은 그리 편해지지 않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파계승과 불편한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 * *
산속에서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장작불 앞에 쪼그려 앉은 유진산은 토끼가 꿰어진 꼬치를 쉼 없이 돌려대고 있었다.
살생이 금지된 숭산의 소실봉에서 고기를 굽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가 직접 먹을 음식은 아니었다.
“형아, 다 익었어?”
유진산과 마주 앉은 파계승이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거의 다 되었어.”
잠시 후 그가 노릇노릇하게 돌려대던 꼬치를 조심스럽게 건네었다.
게걸스럽게 토끼 고기를 뜯어먹는 파계승의 모습에 심정이 착잡해졌다.
이걸 다 먹으면 또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낸단 말인가.
“맛있다. 형도 한 입 먹어봐.”
꾀죄죄한 손으로 다리 하나를 뜯어 내밀고 있었다.
입맛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 그냥 무시하기엔 너무나도 무서운 상대였다.
화를 내기 전에 유진산은 냉큼 토끼 다리를 건네받았다.
“고, 고맙다. 잘 먹을게.”
노릇하게 익은 고기를 한입 베어 물자 고소함이 가득했다.
맛이 꽤 괜찮았지만,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밥도 못 먹고 달리고 있을 손녀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 설이도 토끼 고기 한 번 먹여 줘야 하는데.’
유진산이 잠시 머뭇거리자 파계승이 손을 다시 내밀었다.
“안 먹을 거면 다시 줘.”
“그, 그래.”
다리를 돌려준 그는 파계승이 먹는 모습을 무심히 지켜보았다.
겉모습은 그저 미쳐버린 노승이었지만, 본능에 충실한 금수처럼 순수한 면도 있었다.
‘그래도 심성은 나쁘지 않은 자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딱하게 되었단 말인가.’
불도의 수행이 깊은 고승은 정신적으로 성숙하기에 심마에 빠지는 경우가 흔치 않다.
어떠한 사연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그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풍호라면 뭔가 알고 있는 게 있겠지.’
나중에 흑야방에서 좀 더 알아볼 생각이었다.
유진산은 잠시 생각에 잠긴 채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러길 잠시 후.
돌연 파계승이 남은 고기를 한입에 욱여넣으며 벌떡 일어섰다.
“와따!”
“……?”
자신들이 기다리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화룡신창을 가지러 흑야방으로 떠난 손녀일 터.
하지만 떠난 지 두 시진도 안 되었는데 벌써 돌아왔다니? 거리로 보아 세 시진은 걸리리라 예상했었다.
대환단의 영향 때문인지 경공이 굉장히 빨라진 듯했다.
“할배!!”
산속 어디선가 반가운 음성이 메아리쳐왔다.
“오냐, 나 여깄다!”
유진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사찰이 아닌 삼황채로 이어진 뒷길에서 오고 있을 터.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그는 파계승의 시선을 확인해 보았다.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가 바라보는 절벽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작은 그림자 하나가 깎아지른 절벽에서 전광석화처럼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타타타탓-!
절벽을 달리는 아이는 유설이 분명했다.
그가 입을 떡하니 벌릴 찰나.
어느새 도착한 손녀가 아래에서 솟구쳐 오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는 그대로 유진산을 덮치듯이 와락 끌어안았다.
“나 많이 기다렸어?
“장하다, 우리 설이. 아주 수고했어!”
“히히.”
칭찬을 받은 유설은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아이의 등 뒤를 보자 보자기에 싸인 무엇인가가 매어져 있었다.
“어서 그것부터 건네주거라.”
주섬주섬 보자기를 풀러 내자 붉은빛이 감도는 창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뿐 아니라 말린 고기도 몇 덩이 보였다.
“현희 언니가 육포도 같이 챙겨줬어. 할배랑 같이 먹으래.”
“오냐. 이따 가는 길에 같이 먹자꾸나.”
유진산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화룡신창을 파계승에게 건네주었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영기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파계승은 무척 흥분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무림기보! 무림기보!”
“그래. 그게 바로 우리 유가장의 가보인 화룡신창이다.”
창날을 살펴보던 파계승은 그것을 다시 유진산에게 돌려주었다.
화룡신창이 자신을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창날을 움켜쥔 유진산이 은은한 기를 불어넣자, 창끝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신기했던지 지켜보던 유설이 손을 내밀었다.
“나도 해볼래.”
유진산은 무심코 창날을 아이에게 넘겨주었다.
역시나 유가장의 핏줄이기 때문일까? 화룡신창이 반응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경우와는 반응이 확실히 달랐다.
우우우우웅-!
창명(槍鳴). 주인과 무기가 하나가 되어야만 나타난다는 창의 울음소리였다.
“화룡신창의 창명을 듣게 될 줄이야……. 아무래도 나보다는 우리 설이가 들고 있는 게 더 낫겠구나.”
파계승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는 이곳에서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셋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숭산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경공까지 펼쳐 돌아다니길 반 시진.
우거진 나무숲을 뚫어가며 길잡이를 하던 유진산의 걸음이 갑자기 정지했다.
“흐으으응.”
어디선가 들려온 이상야릇한 소리.
유진산은 가장 후미에서 따라오는 손녀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장난칠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쉿. 조용히 하고 있거라. 빨리 입구를 찾아야 우리도 돌아가지.”
“내가 그런 거 아닌데.”
아이와 입씨름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파계승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그가 폭주하기 전에 무엇이든 성과를 올려야 할 터.
그렇게 얼마 가지 못했을 때였다.
“흐으으응.”
또다시 들려온 야릇한 소리에 그의 걸음이 다시 멈추었다.
“……?”
할아버지의 눈짓에 유설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아니야. 얘가 그랬어.”
아이의 손가락이 창날을 가리키고 있었다.
창이 스스로 소리를 내며 반응했다는 말일까? 과거에 살인늑대인 청랑을 만났을 때는 약간의 광채를 발한 것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이렇게 거짓을 말할 손녀가 아니었다.
“그거 천천히 돌려보거라. 아주 천천히.”
파계승은 넋을 놓은 표정으로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유설이 창날의 끝을 조금씩 움직이는 과정을.
어느 지점에 이르렀을 때 돌연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흐으으응-!
지켜보던 파계승과 유진산이 동시에 움찔거렸다.
창에서 토해져 나온 소리가 분명했다.
일정 지점을 가리킬 때 반응한다는 것은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것은 파계승도 눈치채고 있었다.
“으히히히!! 찾았다!!”
화룡신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그가 먼저 앞장서서 내달렸다.
유진산과 손녀도 조용히 뒤따랐다. 결과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 후.
도착한 곳에는 거센 물살이 떨어져 내리는 폭포와 함께 절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유설이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폭포 안으로 들어가래.”
벽으로 어떻게 들어간단 말인가.
흥분한 파계승이 그 주변으로 장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쾅-! 콰콰콰쾅-!!
낙뢰가 꽂히듯 요란한 폭음과 함께 곳곳이 터져나갔다.
잠시 후 그의 행동이 정지하는 순간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마치 아지랑이가 치듯 자연경관이 일그러지며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났다.
“저곳이로구나. 역시 환영기문진이 입구를 가리고 있었어.”
폭포의 안쪽으로 보이는 깊은 동굴.
안쪽에서는 무엇인가 기분 나쁜 기운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이미 파계승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회염굴의 입구를 찾아냈으니 좋을 수밖에.
흥분이 절정에 달한 그는 다짜고짜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이히히히! 찾았다, 내 보물!!”
유진산과 손녀는 멀찍이서 그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대로 되돌아가려니 왠지 모를 허무함이 느껴졌다.
“여기 무슨 보물이 있어? 궁금해.”
“당나라의 고승이었던 현장이 숨긴 보물.”
“삼장법사?”
“응.”
유설이 품속에서 빛나는 야명주를 주섬주섬 꺼내어 물었다.
“그럼 이건 뭐야? 왜 설이한테 거짓말했어?”
“그것도 무척 귀한 게다. 돈 주고도 못 사는 보물이야.”
“나도 삼장법사 보물 갖고 싶은데…….”
“진정한 보물은 인연이 닿는 사람만 얻을 수 있는 게다. 우린 아닌 듯하니, 어서 돌아가자꾸나.”
그렇게 떠나려던 조손은 잠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파계승이 들어간 폭포 내측의 동굴.
그곳에서 거센 굉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꽈아앙-!! 콰쾅-! 콰콰캉-!!!
폭포수의 소리가 묻힐 정도로 엄청난 폭음이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인가.
유진산과 손녀는 긴장한 얼굴로 말없이 입구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일각이 지났을 때였다.
“크악!!”
목소리로 보아 파계승의 비명이 분명했다.
곧이어 그가 폭포수를 뚫고 튀어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완전히 달라진 모습에 유진산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파계승은 넘어질 듯 비틀거렸다.
풀썩-!
그가 힘없이 쓰러지자, 유진산과 손녀가 냉큼 달려가 살펴보았다.
역근경이 아니었다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세상에 그 누가 이자를 이렇게까지 만들 수 있단 말인가.
“……형, 나 너무 아파.”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쁜 교룡이 날 때렸어.”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교룡이라니? 기록상에는 분명 훼룡이었는데?’
영물인 훼룡이 성장해 신수가 되면 교룡(蛟龍)이 된다는 설화가 있었다.
훼룡이 거대한 뱀의 형상이라면, 교룡은 눈썹과 팔다리를 가진 전설상의 신수였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몸을 돌리려던 그때, 그의 뇌리에 한 줄기 불안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유설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화룡신창의 창날을 움켜쥔 아이의 손아귀에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삼장법사의 보물은 내 거야!”
다짜고짜 동굴의 틈새로 들어가는 유설의 모습에 유진산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안돼!”
도무지 말릴 틈도 없었다.
파계승도 못 당한 신수를 자기가 어찌 상대한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손녀 혼자 사지로 보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었기에 유진산도 동굴 안으로 몸을 날렸다.
잠시 후 교룡의 모습을 보게 된 그는 긴장감이 탁 풀어졌다.
‘아니, 이게 웬 횡재란 말인가.’
파계승이 일방적으로 당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흉측하게 생긴 교룡이 벽에 몸을 기대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곳곳에 움푹 파인 살점에서는 핏물이 냇물처럼 흘러내렸다. 치명상을 입은 상태가 확실했다.
파계승과 교룡의 싸움. 그 결과는 양패구상이었다.
그때 창날을 움켜쥔 손녀가 죽어가는 교룡 앞에 우뚝 서서 자세를 잡았다.
‘녀석 참. 이 상황을 알고 들어온 것이군.’
유설이 혼자 이곳으로 들어온 것은 나름대로 계산된 행동이었다.
화경의 감각과 선음지체의 오감으로 상황을 꿰고 있던 것이다.
출수 준비를 마친 유설은 고사리 같은 왼손을 내밀어 교룡을 도발했다.
“빨리 내 보물 내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