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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93화 (93/238)

93화 천하명인 철운비 (1)

유진산은 손녀를 데리고 반나절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양유현의 외각 인적이 드문 장원.

모루와 망치질 소리가 끊이질 않는 것을 보니 제대로 찾아온 듯했다.

“이곳인 듯하구나.”

“우아. 여기서 내 무기 만들어 줄 거야?”

호현의 대장간을 드나든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까? 유설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응, 일단 들어가 보자꾸나.”

“우리 할배가 최고야~ 히히.”

“그걸 이제 알았느냐. 할아버지는 네 동생인 척 가만히 있어 볼 테니, 이번엔 우리 설이가 나서서 한번 얘기해 보거라.”

험난한 세상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려면 많은 경험이 필요할 터.

그렇기에 이번에는 뒤에서 지켜보며, 손녀에게 협상의 경험을 심어줄 생각이었다.

“돈은?”

유진산의 시선이 아이의 허리춤에 매달린 전낭으로 향했다.

“일단 네가 먼저 계산해. 아마도 그거면 충분할 게다.”

물론 거짓이었다. 용돈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유설은 기분이 좋은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연신 흔들어댔다.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장원의 입구에 큼지막하게 각인된 문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철가장은 어떠한 경우에도 손님을 가려 받지 않는다.』

대가만 지급하면 군소리 없이 무엇이든 만들어준다는 얘기이리라.

그것은 곧 강호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고, 철저하게 중립의 원칙을 지키겠다는 의미였다.

무가(武家)가 아닌 이상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야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을 테니까.

입구에 들어서자 마당의 좌우에 길게 늘어선 풀무와 화로가 인상적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여 명의 장인들이 연장으로 메질을 해대고 있었다.

탕-! 타당-! 탕-!

“흠흠!”

인기척을 내자 머리에 천을 동여맨 장한 한 명이 망치를 움켜쥐고 다가왔다.

걷어 올린 소매 속에 꿈틀거리는 팔 근육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는 유진산과 유설을 귀엽다는 표정으로 훑어보았다.

“동자스님들이 시주받으러 오셨구나? 어느 사찰에서 오셨을까?”

“우리 스님 아니에요. 무기 만들러 왔어요.”

아이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일까?

장한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덕분에 모처럼 크게 웃는구나. 여기는 장난감을 만드는 곳이 아니니, 어서 다른 곳으로 가 보거라.”

“정말이에요. 여기 돈도 가져왔어요.”

유설이 허리춤에서 전낭 주머니를 열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엽전 수십 개. 간식을 사 먹기엔 충분한 돈이었지만, 이것으로 무기를 만든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전낭 안을 살펴보던 장한의 얼굴이 조금씩 시뻘게졌다.

“……킥.”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어진 유설의 말에 그는 정신을 놓아버리고야 말았다.

“이거 줄 테니깐 창 두 개 만들어주세요.”

장한은 손에 쥐고 있던 연장까지 떨어트리며 배꼽을 잡았다.

“푸하하하!!”

어찌나 웃었는지 그의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자신이 무시당한 것을 깨달은 유설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응시했다.

“씨이…….”

당연히 심술이 날 수밖에.

유진산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런 경험 또한 인생에서 뼈와 살이 될 소중한 밑천이었으니까.

무엇보다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셈이었다. 충분히 주의를 끌었으니 말이다.

“뭔데?”

“무슨 일이야?”

곳곳에 있던 대장장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온종일 연장과 함께 지루한 일상을 보내는 그들이었다. 소소한 재미를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하하! 형님들, 이 꼬마들이 무기를 만들러 왔대요.”

“푸하핫! 그게 정말이야?”

“장난감이라도 하나 만들어줘서 보내지그래.”

철가장의 이름이 각인된 무기는 강호에서도 명품으로 알아주며, 그 가치가 최소 은자 수십 냥에 이른다.

그런데도 그것을 비싸다고 평가하는 사람은 없었다.

의뢰를 받으면 한 번에 오십 자루를 만든 후, 가장 뛰어난 한 자루를 제외하고 모두 폐기하는 전통이 있었으니까.

이처럼 자부심이 높은 명가(名家)에 꼬마 둘이 엽전을 들고 찾아왔으니 웃길 수밖에.

그때 묵묵히 지켜보던 유진산이 손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 이제 이놈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줄 차례로구나. 우리 집안의 가보를 꺼내서 진정한 명품이 무엇인지 보여주거라.

할아버지의 전음에 유설이 등 뒤에 메고 있던 봇짐을 냉큼 풀러 냈다.

붉은빛이 감도는 창날.

어른의 팔뚝보다도 거대한 화룡신창을 꺼내 드는 순간, 대장장이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단번에 증발했다.

“…….”

그들이 가장 먼저 놀란 것은 아이의 힘이었다.

어른들도 무거워할 거대한 창날을 쪼그만 아이가 나뭇가지를 움켜쥐듯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창날을 살펴보던 그들은 하나둘씩 입을 떡 벌리기 시작했다.

무기를 다루는 그들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할 수가 없는 현철의 재질임을.

그들의 반응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유설의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이런 거 본 적 있어요?”

대장장이 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자가 얼른 창날을 받아 들었다.

조심스럽게 감정을 해보던 그는 곧이어 양손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이미 현철로 만들어진 무기임은 모두가 눈치채고 있었다.

그의 감정이 점점 격해지고 있다는 것은 뭔가 다른 이유가 또 있기 때문이리라.

“왜 그러세요, 철웅 삼촌?”

“형님, 어디 아프세요?”

철웅이라 불린 자는 마치 뭔가에 홀린 듯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내 평생 진규의 작품을 만져 보게 되다니.”

옆에 있던 장인들은 마치 헛것을 들었다는 듯 목을 빼고 되물었다.

“예에?”

“진, 진규라니요?”

진규가 누구인가. 비록 수백 년 전의 인물이지만, 지금까지도 명성이 회자되고 있는 역사상 최고의 명인이었다.

대장장이들의 세계에서는 지존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일평생 단 열 자루의 무기만을 만들었는데, 그중 세 자루가 무림의 십대기보에 포함될 정도였다.

분명 창날의 뿌리 부분에는 화룡신창(火龍神槍)이라는 문자와 함께 제작자인 진규의 이름이 각인되어 있었다.

“빨, 빨리 가서 아버지를 불러오너라!”

“예, 형님.”

역시나 이들은 보는 눈이 남달랐다. 무기의 제대로 된 가치를 아는 것이다.

묵묵히 그들을 지켜보던 유진산이 손녀에게 무어라 전음을 보냈다.

그 순간 유설의 두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이제 다시 돌려줘요.”

“……?”

갑작스러운 반응에 철웅이 당황하여 멈칫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아이의 힘이 억지나 억센지 반항 한 번 못하고 바로 빼앗겨 버렸다.

그리고 이어진 반응에 모두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안녕히 계세요.”

창을 회수한 유설이 등을 돌리자 철가장의 장인들은 난리가 났다.

“……어, 어디가?”

“잠, 잠깐만!”

그들은 볼 수가 없었다. 등을 들린 유설이 소리 없이 웃고 있는 모습을.

“제발 부탁한다!”

누군가의 울먹이는 외침이 들려오고 나서야 유설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왜요?”

“……아버지의 소원이었다. 그의 물건을 직접 보는 것이 말이다. 그러니 제발 잠시만 기다려다오.”

잠시 고민하던 유설은 은근슬쩍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진산이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가로로 한 번 내저어 보였다. 그냥 무시하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매몰차게 거절하기에는 유설의 마음이 너무 여렸다.

“한 번만 보여주면 돼요?”

“그, 그래. 제발 부탁하마.”

“알았어요.”

창을 다시 건네받은 철웅은 묵묵히 어딘가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길 잠시 후.

장원 어디선가 백발의 노인이 옷도 제대로 추슬러 입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행색을 보아하니 철가장의 가주이리라.

“진규의 작품이 어디 있어?”

“여기 보십시오, 아버지. 확실한 진품입니다.”

가주는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창날을 쓰다듬는 손길에는 만감이 담겨 있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화룡신창에만 쏠려 있을 뿐, 무기를 가져온 아이들이 누구인지, 어떠한 사연이 있는지는 관심조차 없었다.

곧이어 가주가 기(氣)를 발출하자 창끝에서 붉은 기류가 솟구쳐 올랐다.

쏴아아악-!!

창기도 아닌 기이한 성질의 기운이었다. 그러나 느껴지는 기세는 강기에도 버틸 정도로 강렬해 보였다.

기를 소멸시킨 그는 다시 창날을 더듬거리며 살펴보기를 계속했다.

한참 뒤에야 가주의 입에서 나직한 한마디가 토해져 나왔다.

“지금까지 나는 쓰레기를 만들어 왔구나.”

“아버지……."

건장한 장한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숙연해졌다.

“이러한 무기를 만들어내지 못한 우리 가문이 어찌 중원 제일의 명가라 할 수 있겠는가…….”

“…….”

콧대 높았던 철가장의 장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위기가 묘해질 찰나, 유설이 정적을 깨고 물었다.

“그럼 지금 새로 만들면 안 돼요?”

“……그러고 싶어도 불가능하단다. 재료를 구하기가 별을 따기보다 어렵거늘, 어찌 그것이 의지만으로 가능하겠느냐.”

지금껏 재료를 구하지 못해 시도조차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때 지켜보고 있던 유진산이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 창을 녹이십시오. 그것을 다시 재료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

진규의 무기를 녹이겠다니? 이보다 미친 짓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유진산에겐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아무리 훌륭한 명창이라도 손에 맞지 않으면 죽창만도 못한 법이었으니까.

그때 유진산이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자 모두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교룡의 영석입니다.”

영롱한 빛을 발산하는 알록달록한 구슬.

세상에 그 어떠한 보석도 이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을 듯했다.

유설이 할아버지를 휙 쳐다보았다. 왜 자신에게 얘기 안 했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거 어디서 났어?”

“나중에 말해줄게, 일단 의뢰부터 하고.”

일단 눈앞의 일부터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영석을 받아든 철가장의 가주는 전율하고 있었다.

“정말…… 정말 이 창을 녹여도 된다는 말이더냐.”

유진산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자루를 의뢰하고 싶습니다. 자루 길이 다섯 자, 날의 길이는 한 자 다섯 치. 두 자루 중 하나는 날이 없는 것으로.”

일반적인 창과 비교해 길이가 다소 짧은 편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철가장의 가주는 속내와는 달리 답변을 망설이고 있었다.

의뢰자들이 너무 어렸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만약 집안의 가보를 몰래 가져나온 명문세가의 자제들이라면? 무턱대고 진규의 창을 녹였다가 고수들이 찾아와 따진다면 그 후환을 감당할 수가 없을 터였다.

유진산도 그러한 속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철가장의 가주에게 전음을 보냈다.

- 내가 사연이 있어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가주로서 집안의 가보를 녹일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이오. 당신 또한 내 의뢰를 수락할 권한이 있을 듯하오만.

연륜이 녹아든 말투와 정기 어린 눈빛에 흐르는 여유로움.

이것은 결코 어린아이가 흉내 낼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유진산을 살펴보던 가주는 마음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맏아들 철웅이 그의 심정을 눈치채고 만류했다.

“거절하십시오, 아버지. 설사 의뢰를 받게 되더라도 제가 하겠습니다.”

“너는 나서지 말거라. 내가 아니면 해낼 수가 없는 일이다.”

이미 몸이 노쇠하여 은퇴한 가주가 다시 연장을 들겠다니.

철웅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후. 지금의 체력으로 현철을 제련하시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러다 돌아가실 수도 있어요.”

무기를 만드는 것은 기력을 많이 소모하는 일이다. 더군다나 현철을 제련하는 일은 수십 배나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감내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일이기도 했다.

명인의 입장에서는 세상에 길이 남을 신병이기를 만드는 것이 최고의 명예였으니.

결심을 굳힌 가주는 양손을 모아 유진산과 손녀를 향해 포권했다.

그것은 철가장이 정식으로 의뢰자에게 대하는 예우였다.

“화룡(火龍)과 교룡(蛟龍). 거기에 내 마지막 혼을 불태워 두 자루의 쌍룡창(雙龍槍)을 제작해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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