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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97화 (97/238)

97화 좋은 소식이 있어요 (2)

드디어 절세신공인 불문사자신공을 수련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유진산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정말 사실인가?”

풍호가 흑야방에서 조사한 자료들을 그에게 내밀며 설명을 이어갔다.

“예, 사마현이라는 자입니다. 사학을 비롯해 천문, 율력, 복소 등 통달하지 않은 분야가 없다고 해요. 천축에서도 학문을 닦은 경험이 있어 범어 해독에도 능통하다고 합니다.”

“대단한 친구로구만. 그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이미 사천성에서는 천재적인 학자로 유명한 인물이니까요.”

사천성은 개봉에서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일반인들은 최소 한 달 이상이 걸리며, 경공술이 가능한 무림인들도 열흘은 잡는 것이 보통이다.

“……사천성이라.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그만큼 수고를 감내할 가치는 있는 일이지.”

“그런데 만나더라도 순순히 도와줄지는 확신할 수 없어요.”

“그게 무슨 의미지?”

“자세히 살펴보니 특색이 강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거짓말을 극도로 싫어하고, 별명이 사마우라고 합니다.”

“이름 뒤에 우(牛)를 붙인 것을 보니, 황소처럼 고집이 강한 모양이로군.”

“예, 틀림없이 무력에는 굴복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그의 호위무사 또한 무시무시한 고수라고 해요. 뭐 설이한테는 안 되겠지만.”

유진산은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생각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일단 어떻게든 부딪쳐봐야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번 기회에 사천의 아미산에도 한번 들러봐야겠군.’

목적지가 정해진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앞만 보고 달리기에도 가야 할 길이 너무나도 멀었기 때문이다.

“고맙네. 자네들에겐 매번 도움만 받는구만.”

“그런 말씀 마세요. 어르신이 아니었다면, 어찌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무엇이 말인가.”

풍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곳까지 오시는 길에 이상한 낌새는 없었는지요?”

“잘 모르겠군. 우리 설이가 누가 더 빠른지 내기하자는 통에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뭘 느낄 새가 없었어.”

“운이 좋았습니다. 소림사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음양쌍괴가 섬서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쫙 퍼졌거든요. 무림맹의 고수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고 있어요.”

어느 정도는 예측했던 상황이었다. 소림사에서 그 난리를 쳤었으니까.

오히려 조용하면 이상할 일이었다.

“어차피 이곳도 곧 떠날 텐데 무슨 상관이 있겠나.”

“그래도 좀 서두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길목마다 무림맹의 정보원들이 배치되는 게 포착되었어요. 정보로는 하남의 고수들이 모두 비상대기 상태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비록 손녀의 무공 수준이 절대자의 반열에 있다고는 하나, 강호는 넓고 고수는 많은 법.

중원의 중심부인 하남에도 내로라하는 절대고수들이 여럿 있을 터였다.

소림사의 혜광대사만 하더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적수가 아니던가.

“자네 말대로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잠시 후 바로 출발하겠네.”

“예. 그런데 수로를 이용하실 건지요?”

“배를 타고 이동하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함곡관을 넘어 섬서를 통과할 생각이네.”

“좋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거 받으십시오.”

풍호가 탁상 위로 작은 주머니를 내밀자, 유진산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오시면 바로 떠나실 수 있도록 여비를 좀 챙겨 넣었어요.”

“괜찮아. 뭘 이런 걸 다 주고 그래.”

“어르신은 괜찮으실지 몰라도 설이까지 굶길 수는 없잖아요.”

사실 유진산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차하면 손녀의 용돈까지 빼앗아야 할 정도였으니.

“뭐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일단 받아두겠네.”

묵직한 것을 보니 꽤 많은 은자가 들어있는 듯했다.

그가 전낭을 품속에 갈무리할 무렵.

방주의 집무실이 열리며 기다리던 인물들이 찾아왔다.

“할배, 나 예뻐? 현희 언니가 나 주려고 만들었대.”

유설이 현희의 손을 맞잡고 웃고 있었다. 머리에는 토끼 모양의 하얀 털모자를 눌러 쓴 채로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손녀의 머리를 모두 밀어버려서 마음이 불편했던 참이었다.

유진산은 흐뭇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주 예쁘구나. 달나라에서 토끼 선녀가 내려온 것 같아.”

“히히. 언니한테 할배 것도 만들어 달라고 했어.”

“……응?”

현희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할아버지. 금방 만들어 드릴게요”

유진산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마음은 고맙지만, 다음에 부탁하네. 급하게 떠나야 해.”

이곳에서 조금 더 머뭇거리다간 손녀의 등쌀에 토끼 모자를 쓰고 다녀야 할 상황이었다.

유설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벌써?”

“응. 우리 잡으려고 나쁜 녀석들이 몰려들고 있다니까, 바로 출발해야 해.”

유설의 얼굴에서 긴장감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작은 손으로 유진산의 어깨를 보듬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지 마, 할배. 내가 지켜줄게.”

유진산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어쩌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되었단 말인가.

자신 또한 명색이 어지간한 구파의 원로고수에게도 밀리지 않을 초절정고수였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 시간이 없으니 어서 작별 인사부터 하자꾸나.”

조손은 그들과 마지막 인사를 마친 후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유진산이 시무룩해진 손녀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설이, 삼장법사가 숨겨놓았던 절세신공을 빨리 배우고 싶다고 했지?”

“……응.”

“지금 그걸 해독하러 가는 거다. 이 무공을 모두 익히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몰라.”

당연히 모를 수밖에.

유진산이 진지한 표정으로 재차 속삭였다.

“현경(玄境)의 경지에 도달하며, 또 한 번의 환골탈태를 겪게 된단다. 그럼 더 예뻐지고, 머리카락도 한 번에 허리까지 새로 자라날 거야.”

“정말?”

유진산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아이의 흥미를 돌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환골탈태가 일어나면 전신의 머리카락과 눈썹이 모두 빠지고 새로 자라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단지 짐작일 뿐,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지고한 경지. 입신지경이라고도 불리는 현경이 되는 과정을 자신이 어찌 알겠는가.

“당연하지. 그럼 이제 우리 설이가 천하제일 미인이 되겠구나.”

“히히. 천하제일미인 설이?”

“그럼!”

어느 순간 아이의 얼굴엔 밝은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그때 유진산이 무엇인가를 말하려다 말고 어딘가를 응시했다.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풍호의 부하 중 한 명으로 안면이 있는 자였다.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응, 홍기로구나.”

“예, 그럼 나중에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다급히 포권을 건넨 그는 재빨리 방주의 집무실로 사라져버렸다.

“그 녀석 참…….”

유진산은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이동하려 했다.

그러나 유설이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고 있을 뿐이었다.

“쉿.”

“왜 그래?”

“지금 큰일 났대.”

흑야방에 무슨 사단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화경의 신체와 태생적으로 신선의 오감을 타고난 손녀가 들었다면 틀림이 없을 것이리라.

유진산도 조용히 벽면으로 다가가 귀를 가져다 대었다.

집무실 안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현지부가 당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전서구에 있는 내용이 전부입니다. 거지새끼들이 드디어 꼬리를 잡은 모양이에요.”

거지라면 아마도 개방일터.

정보장사를 하는 흑야방의 입장에서는 최대의 경쟁상대이자 천적이었다.

“이거 정말 골치 아프게 되었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방주님. 양현 쪽은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중요한 정보도 없을뿐더러, 총단의 위치도 모릅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양현이 털렸으면 남부지부의 위치가 노출될 텐데? 그곳만큼은 절대 안 돼.”

하남의 남쪽 지역을 총괄하는 곳이 남부지부였다.

유진산도 남부지부의 책임자인 은화린이라는 여인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머무르던 객잔으로 찾아와 이곳의 위치를 안내해준 장본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가 기억하는 그녀는 기품이 넘치고 수완이 대단한 인재였다.

‘그곳이 무너진다면 흑야방의 세력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겠군.’

짐작대로 집무실의 분위기는 더욱 어두워졌다.

“어떻게든 지켜야겠군요. 서둘러 지원군부터 편성하겠습니다.”

“개방이 마음먹고 움직였으면 우리 애들로는 어림도 없어. 이렇게 된 이상 일월문에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사도련에 소속된 일월문과 흑야방은 긴밀하게 협업하고 있었다.

무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정보와 자금을 지원받는 공생 관계.

단지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관계였을 뿐, 서로가 완전히 신뢰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럼……, 일월문에 그곳의 위치가 노출되어도 괜찮은 겁니까?”

“상관없어. 화강현의 홍화루가 남부지역을 총괄하는 중요한 지부였다고만 떠벌리지 않는다면.”

동업자에게 비밀지부 몇 개쯤 노출되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점조직처럼 구성된 흑야방의 약점까지 밝힐 필요는 없었다. 배신과 모략이 난무하는 강호의 세계였으니.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늦진 않았을지 걱정입니다.”

“시간을 제때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군. 하늘의 뜻에 맡겨야겠지. 발이 가장 빠른 녀석으로 보내.”

“예, 방주님.”

잠시 후 대화를 마무리한 홍기는 서둘러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 시점에서 유진산과 손녀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 * *

개봉성을 벗어난 조손은 손을 잡고 나란히 내달리고 있었다.

유진산의 얼굴에는 깊은 고민이 서려 있었다.

흑야방의 처지를 알게 된 이상 그냥 지나치기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가서 도와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림맹의 추적을 받는 음양쌍괴가 흑야방을 공개적으로 돕는다면, 오히려 일을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을 테니까.

‘화강현의 홍화루라…….’

마음만 먹는다면 섬서로 진입하기 전에 거쳐서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문제는 계획에 대해서 확신이 서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고민이 절정으로 치닫는 그때였다.

“할배, 우리 홍화루에 갈 거지?”

유설도 나름대로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요즘 들어 눈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홍화루가 뭐 하는 곳인지 알아?”

“아니, 나는 몰라.”

“거긴 술도 마시고, 기녀도……. 아니, 어쨌거나 애들은 못 들어가는 곳이야.”

“그래도 들어가야 해. 나는 들어갈 수 있어.”

쪼그만 게 뭘 안다고 하는 소리란 말인가.

유진산은 손녀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았다.

토끼 모자를 쓴 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너라면 힘으로 뚫고 들어가지 못할 곳이 없겠지. 도와주고 싶어?”

“응. 현희 언니가 모자도 만들어줬으니깐, 우리도 보답해줘야지. 할배가 그랬잖아. 받은 게 있으면 꼭 돌려줘야 한다고.”

유진산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언제부터 얘가 이렇게 논리적으로 말했지?’

모처럼 자기 주관을 또렷이 주장하는 손녀가 기특해 보였다.

방법이야 찾으면 그뿐. 애초부터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가주로서 손녀 앞에서 어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수 있겠는가.

“그래, 네 말이 맞다. 그것이 인지상정이고 사람의 도리이지. 우리 설이도 이제 다 컸구나.”

할아버지의 극찬에 유설의 입이 귀에 걸렸다.

“히히. 빨리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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