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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98화 (98/238)

98화 너의 정의는 무엇이냐 (1)

삼 층 구조로 지어진 전각의 지붕 위.

두 개의 작은 그림자가 눈빛을 빛내며 어딘가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 안 왔나 봐.”

“그런 것 같구나. 다행히 때맞춰 도착했어.”

이곳으로부터 백여 장의 거리. 연등으로 꾸며진 휘황찬란한 장원은 홍화루가 분명했다.

홍화루는 재주는 팔되 몸은 팔지 않는다는 매예불매신(賣藝不賣身)의 원칙이 확실한 기루였다.

그래서인지 화원과 마당을 오가는 기녀들의 모습엔 기품이 있었고, 곳곳엔 차분함 속에 평온함이 녹아들어 있었다.

한 가지 특이점이라면 기루치고는 구조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 정도였다.

장원의 뒤편으로 용도를 알 수 없는 몇 채의 전각들. 아마도 그곳에서 흑야방의 일을 처리하고 있으리라.

그때 유설이 용화창의 뭉툭한 날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여기서 숨어 있다가 거지들 오면 가서 때릴까?”

“일 처리는 그렇게 무식하게 하면 안 돼.”

단호히 거절하는 유진산을 손녀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왜에? 우리 여기 도와주려고 온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무턱대고 나서면 음양쌍괴가 흑야방과 한패라는 소문이 퍼지지 않겠느냐. 그럼 우리를 싫어하는 녀석들까지 흑야방을 적으로 돌리겠지.”

“그럼 어떻게 하지?”

그렇지 않아도 고민하고 있던 유진산이었다.

“할아버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같은 편인 줄 모르게 도울 방법이.”

“궁금해~ 빨리 말해줘. ”

그는 독촉하는 손녀에게 작은 목소리로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듣던 유설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도 돼?”

“우린 나쁜 짓을 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도우려는 것이니까,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해야 해. 연기 잘할 수 있지?”

“응, 연기는 설이 전문이야.”

유진산은 흡족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구나.”

“응. 거지들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유설은 마치 재밌는 놀이라도 즐기는 듯 좋아했다.

반면 유진산은 망루 위의 병사처럼 주변을 둘러보며 긴장을 놓지 않았다.

“방심하면 안 돼. 할아버지가 전에 구파일방에 관해서 설명해준 거 기억나지?”

평소 유진산은 시간이 날 때마다 손녀에게 강호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협의를 가장한 모략과 이권 다툼이 가득한 세상.

이곳에서는 아는 것이 곧 생존력이었으니까.

“기억나. 일방은 구파에서 꼽사리로 끼워준 곳이라며.”

유진산은 순간 움찔하며 눈을 부릅떴다. 지나가며 해줬던 농담을 기억할 줄이야.

“내가 언제? 아무튼, 구파일방에 포함된 세력에는 쟁쟁한 고수들이 몇 명씩은 다 있다고 봐야 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알았어.”

아이의 무공 성장은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굳이 신경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빛의 속도로 크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경험으로만 얻을 수 있는 생존 법칙은 얘기가 달랐다.

“본디 무림인은 협의를 지켜야 하지만, 언제나 정의롭기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설이, 너는 정의가 무어라 생각하느냐.”

유설이 밤톨 같은 손을 꽉 움켜쥐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내 주먹이 바로 정의야.”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유진산은 골이 아프다는 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맙소사. 그건 누가 알려줬어?”

“백규 삼촌이.”

사도련의 총사이자, 패도문의 문주 백규.

오직 앞만 보고 돌진하는 백규 아우라면 그러고도 남을 만한 위인이었다.

이미 손녀의 성향은 정파와는 거리가 너무 멀어져 있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패도문에서 보냈으니, 사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수밖에.

“아무튼, 그 정의도 아무 때나 막 쓰면 안 된다는 얘기다.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객기 부리다가 큰코다친 놈들을 많이 봤거든. 때로는 방법을 우회하는 것도 좋은 작전이지.”

“…….”

“왜 대답이 없어?”

어리둥절한 유진산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손녀의 시선이 향한 방향에서 무엇인가 작은 점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기 왔어!”

“눈이 침침해서 나는 아직 안 보이는구나. 몽둥이 든 거지들이 확실해?”

“응, 맞아.”

“몇 명쯤 왔어?”

“잠깐만…….”

집중해서 살펴보던 유설이 등 뒤로 한 손을 활짝 펼쳐 보였다.

“다섯 명?”

이어진 손녀의 대답에 유진산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아니, 오백 명.”

세상 어디를 가도 거지는 넘쳐 나는 법. 무림의 모든 세력을 통틀어 가장 많은 인원을 보유한 세력이 개방이다.

그러나 설마 이 정도의 인원을 대동하고 왔을 줄이야.

개방에서 얼마나 흑야방을 싫어하는지 온몸으로 확 와닿을 정도였다.

“뭐? 오백 명?”

“응, 그 정도 되는 것 같아.”

처음에는 일월문이 올 때까지만 시간을 끌어주다 철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개방에서 이 정도의 인원이 왔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놈들이 아주 작정하고 왔구나. 하지만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르겠군.’

개방 전체를 통틀어 유설과 맞수를 이룰 만한 존재는 많아야 한두 명.

저들 중에 그런 대단한 고수가 끼어 있다면, 뭐하러 이렇게 무식하게 몰려오겠는가.

대다수는 머릿수만 채운 일결과 이결제자들이리라.

숫자에 겁을 먹어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일단 작전대로 가자꾸나. 할아버지 먼저 출발할게.”

“응, 알았어.”

용살창을 움켜쥔 유진산이 높은 전각의 지붕에서 날아올랐다.

타앗-!

그의 신형은 개방도들이 몰려오는 방향이 아닌 홍화루로 향했다.

연등으로 꾸며진 장원의 입구.

건장한 체구의 장한 둘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문지기는 너희 둘뿐인가?”

장한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허리춤밖에 안 되는 꼬마가 이상하게 생긴 창을 들고 와 반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너 뭐야? 여긴 왜 왔어?”

“이거 완전 미친놈…….”

그들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유진산이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쏜살같이 움직이는 손가락이 지풍을 뿜어내며 그들의 혈도를 짚었다.

푹-! 푸푹-!

점혈을 당한 둘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눈만 끔뻑여댔다.

자신들이 어떻게 당했는지, 무엇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되질 않는 것이다.

“점혈은 반 시진이면 알아서 풀릴 테니, 그동안 누워서 좀 쉬고 있거라.”

찰나의 순간, 넓적한 창 면이 둘의 복부를 순차적으로 후려쳤다.

퍼퍽-!!

급소를 피한 가벼운 공격이었지만, 그들의 신형은 이 장 밖으로 미끄러지며 넘어졌다.

“……?”

쓰러진 장한들의 눈빛엔 의문이 가득했지만, 일일이 설명해줄 시간이 없었다. 앞으로 일각 정도면 개방도들이 도착할 터.

유진산은 그들을 뒤로한 채 홍화루로 들어갔다.

조금 전의 비명 때문이었을까? 마당에서 기녀와 오가는 손님들이 경직된 얼굴로 이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원인은 고작 한 명의 꼬마 아이.

“내가 좀 바빠서 말이야. 빨리 한잔 먹고 가야겠으니, 어서 술상을 내오너라.”

도저히 아이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 누구도 대꾸할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부자연스러움에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이다.

그때 어디선가 포주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이 뛰쳐나왔다.

기가 세고, 성깔이 대단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이 애새끼는 뭐야? 여기가 어디라고…….”

명색이 화강현 제일의 기루가 아니던가. 내막이 어찌 되었든 이러한 소란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유진산의 행동이 더욱 빨랐다.

다짜고짜 그의 손바닥이 섬전처럼 움직이며 포주의 아랫배를 후려쳤다.

쩌엉-!

그녀의 등 뒤로 기(氣)의 돌풍이 뿜어져 나왔다.

“끄어…….”

숨이 턱 막혀온다는 듯 배를 움켜쥔 포주의 모습에 지켜보던 모두가 경악했다.

그러나 진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조금 전 유진산이 내지른 공격은 속임수였음을.

유가건곤장 사초식 일후섬타(一後閃打). 공격을 상대의 몸 밖으로 통과시켜 등 뒤에 있는 자를 공격하는 기술이었다.

기녀 중 한 명이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빨, 빨리 삼촌들을 불러와요!”

어느 기루나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무사들이 대기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홍화루는 그 규모가 과할 정도였다.

장원에는 크고 작은 전각이 열 채가 넘었으며, 그중 한 곳에서 무사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뭐야!?”

“어떤 새끼들이 쳐들어 왔어?”

그들의 수는 무려 삼십여 명.

난데없는 소란에 기루 내부에 있던 손님들까지 밖으로 나와 두리번거렸다.

어느 순간 유진산이 외마디 외침을 토해냈다.

“나다, 이놈들아!”

용살창을 비틀어 쥔 그가 무사들을 향해 파고들며 선공을 개시했다.

대다수가 이류 정도의 수준이었으며, 일류고수의 숫자는 몇 명 되지도 않았다.

그들만으로 초절정고수를 막아낸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쩌억-! 콱-! 콰직-!!

둔탁한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다섯 명의 무사가 쓰러져 뒹굴었다.

그들의 중심에서 유진산이 창 날을 높이 치켜들었다.

“지금부터 노부에게 대드는 놈들은 목을 베겠다.”

노부라는 단어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자신들의 상대가 아님을 눈치챈 무사들은 무기만 겨눈 채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곳에서 행패를 부리는 것이오? 도대체 누구시오?”

아이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결코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양괴.”

유진산의 한마디에 무사들이 술렁거렸다.

최근 소림사에서 깽판을 치고 탈주한 음양쌍괴의 악명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맹이 그들에게 현상금을 걸었다는 것도 말이다.

그들 중 양괴라고 하니 놀랄 수밖에.

“술 한잔 먹고 간다는데, 왜 그리 말들이 많아? 조금 있으면 음괴가 도착할 거다. 그때까지 준비되지 않으면 너희들은 다 죽어.”

무사들의 얼굴이 공포에 질렸다.

최근 강호에서 가장 유명세를 떨치는 신진 고수로, 양괴보다 백 배는 더 무서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유진산은 대답 대신 지그시 장원의 입구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곳을 바라보던 모두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음, 음괴?”

토끼 모자를 쓴 여자아이가 창과 함께 양손을 뒷짐 지고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도 연약해 보이는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산(山)이 통째로 움직이는 듯한 숨 막히는 기세(氣勢).

아무도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때 정적을 깨고 음괴의 얇은 입술이 살며시 실룩거렸다.

“내 고기 어딨어.”

할아버지를 은근슬쩍 한 번 바라본 유설은 뒷짐을 풀었다.

그러고는 미리 점찍어둔 낡고 비어있는 전각을 향해 다짜고짜 정권을 내질렀다.

쏴아아아앙-!!

주먹에서 뿜어져 나간 돌풍이 전각의 한쪽 기둥을 후려치며, 통째로 무너트려 버렸다.

콰쾅-!!!

오 갑자의 내공으로 뿜어진 백보신권(百步神拳)이었다.

“내 고기 어딨어!”

“…….”

모두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양괴는 술을 요구하고, 음괴는 고기를 요구하는 황당한 상황이었다.

누구도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긴장감이 절정으로 치달을 무렵. 그때 어디선가 붉은 비단옷을 입은 기품 있는 여인이 나타났다.

무사들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곳의 책임자인 듯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여기서 먹겠다고 했네.”

유진산과 그녀는 서로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잠시 바라보았다. 마치 안면이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럼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열을 세겠다.”

열을 셀 동안 음식을 어찌 준비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홍화루로서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손짓에 기녀들이 미친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로 음식을 준비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다른 손님에게 전달될 음식들을 모조리 긁어모아 달렸다.

눈 깜짝할 사이 장원의 앞마당에 진수성찬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자, 먹어보자.”

음양쌍괴는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음식을 들었다.

둘을 둘러싼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긴장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이 모든 것이 기루로 위장한 흑야방의 지부를 지키기 위한 연기였음을.

그때 유진산의 시선이 은근슬쩍 장원의 입구를 향했다.

모두가 자신들에게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그곳에서 거지 몇 명이 기웃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진산은 술병에 내공을 실어 거지가 있는 곳을 향해 던졌다.

콰앙-!!

“도대체 누가 술에 물을 탄 거야! 음양쌍괴가 호구로 보였어!?”

“죄, 죄송합니다. 새로 대령하겠습니다.”

* * *

홍화루의 입구.

허리춤에 다섯 개의 매듭이 묶인 늙은 거지가 인상을 잔뜩 쓰며 호통쳤다.

“뭐야, 왜 안 들어가고 있어? 기루로 위장한 흑야방의 지부가 확실하니, 전부 박살 내버려!”

그의 앞에서 미리 탐색하고 나온 삼결제자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문제가 좀 있습니다, 당주님.”

“문제라니?”

“저 안에…… 음양쌍괴가 있어요.”

당주의 신분은 장로보다 한 단계 아래의 계급으로 개방에서는 어느 정도 권위가 있는 인물이다.

그는 체면도 잊은 채 놀란 두 눈을 부릅떴다.

“뭐? 그놈들이 왜 여기 있어?”

“확실합니다. 지금 전각이고 뭐고 다 때려 부수며, 행패를 부리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문지기들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누군가의 기습을 받은 듯 좌우에 널브러져 있었다.

개방의 당주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렸다.

“그 빌어먹을 놈들이 왜 하필이면 오늘 여기에…….”

“이대로 들어가면 음양쌍괴와 싸워야 할지 모릅니다. 놈들의 무공이 소문대로라면 우리만으로는 장담할 수 없어요.”

잠시 고민하던 당주는 이내 결심을 굳혔다.

“전부 대기시켜. 그놈들이 다 처먹고 떠날 때까지 기다린다.”

“예, 당주님.”

“그리고 지금 당장 발 빠른 녀석을 총타로 올려보내. 음양쌍괴가 이곳에 나타났다고 보고는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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