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나 너무 무서워 (1)
살고 싶다는 의지가 분출되었기 때문일까? 화운개는 개방에 관한 정보를 제외하고는 아는 대로 술술 털어놓고 있었다.
유진산은 반 시진에 걸쳐 그에게 많은 정보를 얻어냈다.
아미파의 문주이자 무림맹주인 화령사태.
그녀를 포함한 무림맹의 핵심 인사들에 대한 신상 등이었다.
그리고 가장 가치가 있는 정보는 지금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를 잡으려고 무림맹이 덫을 만들고 있다고?”
“그렇소. 소림사의 정혜대사를 포함해서 무림십대고수 중 세 명이 하남에 와있소.”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중원에서 가장 강한 열 명 중 셋이 움직임이기 시작한 것이다.
무림맹이 이 정도까지 맹추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아직은 손녀가 그들을 상대하기엔 무리라 판단되었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상책이겠지. 설이가 불문사자신공을 익히기 전까지는.’
유진산은 흑야방에서 얻어온 하남의 지도를 꺼내 펼쳐 보였다.
군부의 것처럼 세부적이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장소와 대략적인 지형이 잘 표시되어 보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그들의 위치를 이곳에 표시해줘.”
고개를 끄덕인 화운개는 손바닥에 침을 뱉고는 피 묻은 손가락을 비벼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설이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피했다.
“앗, 더러워.”
“원래 우리 개방의 거지들은 다 이렇게 하오.”
화운개는 신경 안 쓴다는 듯 붉은 침을 지도의 몇 군데에 떨어트렸다.
위치를 유심히 살펴보던 유진산은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세 군데에서 함정을 파두고 있었나?”
“맞소. 이 세 곳에 무림맹의 임시지부가 설치되었소. 어느 곳이라도 당신들이 다가오기만 하면 천라지망(天羅地網)이 펼쳐질 것이오.”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필요한 정보를 모두 얻어냈기 때문이었다.
“잘 알겠네. 이제는 서로 갈 길을 가면 되겠군.”
왠지 모를 찜찜함에 화운개는 잠시 머뭇거렸다.
악명높은 음양쌍괴가 이렇게도 자신을 쉽게 보내주다니. 설마 도망치는 자신의 등을 노리려는 것일까? 온갖 추측이 그의 머릿속에 난무했다.
“……정말 이렇게 그냥 가도 되오?”
“내가 비록 좋은 놈은 아니지만, 아무나 막 죽이는 살인귀는 아니야.”
“……?”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음양쌍괴와 마주치고 살아남은 자들이 이상하게도 너무 많았다.
오히려 그 때문에 그들의 명성이 강호 전체에 급격하게 퍼진 것이다.
화운개는 문득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소문은 언제나 과장되는 법이지. 지금까지 음양쌍괴에게 죽은 놈들은 두 부류뿐이었네. 누가 봐도 죽을 만한 죄를 지었거나, 우리의 목숨을 노리는 놈들이었지.”
“그럼 나는 왜…….”
유진산의 고개가 슬쩍 갸우뚱했다.
“뭐가? 우리는 너를 죽인다고 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나, 나를 고문하지 않았소?”
“상처를 치료해준 것도 고문이라면 뭐 할 말이 없군.”
“그럼 내가 협조하지 않았더라도 그냥 보내줄 생각이었다는 얘기요?”
유진산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녀가 보는 앞에서 아무나 막 잡아서 고문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스스로가 겁먹고 실토했을 뿐.
화운개는 뭔가 자신이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억울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는 것을.
“어서 가봐. 너희 애들이 목 빠지게 찾아다니고 있을 테니까.”
“……오늘 있었던 일을 비밀로 해줄 수 있겠소?”
“내가 누구에게 말을 하겠나. 어서 가봐.”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린 화운개는 어깨가 축 늘어졌다. 자괴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개방의 당주가 스스로 겁을 먹어 목숨을 구걸하고, 정보를 술술 털어놓았으니 그럴 수밖에.
만약 이 소문이 강호에 퍼진다면 그의 생명은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힘없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아저씨, 잘 가요! 비밀은 꼭 지켜줄게요. 히히.”
등 뒤에서 음괴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왠지 그 모습이 더욱 불안했지만, 최대한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화운개는 음괴를 향해 최대한 간절한 눈빛으로 두 손 모아 포권했다.
* * *
유진산과 손녀는 어딘가를 향해 경공으로 반나절을 달렸다.
낙양의 서쪽 방면 어딘가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할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섬서로 가서 다시 사천으로 갈 거야. 네가 익힐 불문사자신공을 해독하러 말이다.”
“섬서성? 그럼 우리 또 배 타는 거야?”
유설은 배를 타는 것을 좋아한다. 해적을 물리쳐준 대가로 귀빈실에서 호화롭게 지냈던 기억 때문이리라.
하지만 선착장으로 가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게다가 느린 이동수단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그리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배는 너무 위험해서 안 돼. 늑대 같은 녀석들이 우리를 찾고 있으니, 은밀히 넘어가야지.”
“그럼 어떻게 가?”
그렇지 않아도 유진산이 계속 고민하던 부분이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함곡관을 통과할 생각이었으나, 그 근처에도 무림맹의 임시지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저기 먼 곳으로 큰 산이 하나 보이지?”
“응. 근데 왜?”
“우리가 저길 넘어야 해.”
하남과 섬서의 경계에 있는 금양산이었다.
이곳은 산세가 험하고, 가팔라 일반인들은 넘는 것이 불가능하다.
어지간한 무림인들도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험했지만, 음양쌍괴라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귀찮은 것만 제외한다면.
“힝…….”
끊임없이 산을 타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유진산은 시무룩해진 손녀의 등을 토닥이며 설득을 시도했다.
“이 산 너머에 뭐가 있는 줄 알아?”
“뭐가 있는데?”
“아무도 가보지 못한 신비로운 장소가 있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유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신비로운 장소?”
“응. 어쩌면 거기에도 보물이…….”
이미 결심을 굳힌 유설은 할아버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그, 그래.”
손을 맞잡은 둘은 거침없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구름을 뚫고 솟아 나온 거친 산맥을 향해서.
타타타탓-!!
순식간에 다가가 절벽을 타고 오르는 날랜 몸짓은 호랑이도 울고 갈 정도였다.
쏜살같이 산을 오르고, 수십여 개의 산등성이를 넘어가며 둘은 끝없이 달렸다.
계획대로 되고 있었지만, 유진산에게는 한 가지 고민거리가 남아있었다.
‘신비한 장소를 무엇으로 둘러대지?’
당연히 손녀에게 말한 것은 거짓이었다.
지도상에는 괴이한 모양의 숲이 그려져 있었고, 단지 물음표만 하나 찍혀 있을 뿐이었다.
산을 넘어 그곳을 통과하면 드디어 섬서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한 시진을 헤맨 끝에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마지막 산등성의 정상.
광활하게 펼쳐진 산 아래의 풍경을 보며 유설이 물었다.
“할배, 보물이 있는 장소가 어디야?”
민가 십수 채로 구성된 부락이 하나 보였고, 그 앞으로는 광활한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몸이 녹초가 된 유진산은 허리를 움켜쥐며 딴청을 피웠다.
“이런……. 길을 잘못 들어온 것 같구나.”
물론 제대로 넘어온 것이 확실했다. 단지 약속했던 신비한 장소만 없을 뿐.
유설이 의심의 눈초리로 할아버지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럼 다시 돌아가자.”
“거길 어떻게 다시 돌아가? 아이고 허리야. 오랜만에 무리했더니 죽겠어.”
“그럼 업혀. 내가 다시 돌아가 줄게.”
여기까지 와서 어찌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간다는 말인가.
유진산이 은근슬쩍 앞장서서 중얼거렸다.
“어서 내려가자. 아마 저 숲 어딘가에 있을 거야.”
“확실해?”
“그럼! 할아버지 직감이 빗나간 적 있어?”
“아니, 없어~”
손녀의 말투가 다시 부드러워진 것을 보니 잘 속아 넘어가는 듯했다.
순식간에 산 아래로 내려온 둘은 곧장 숲을 향해 다가갔다.
해가 지기 전에 통과해야 했기에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다.
그때 유설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저기.”
아이의 검지가 가리키는 곳에는 지팡이를 움켜쥔 백발의 노인이 자신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길조차 보이지 않는 부락에 낯선 아이들이 찾아왔으니 의아해할 수밖에.
노인의 모습에 무공을 익힌 흔적이 보였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강호는 넓고, 은거한 기인들은 많은 법이지. 마침 물어볼 것도 있었는데 잘되었구나.’
유진산과 손녀가 손을 잡고 다가가자, 노인이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뭐야? 이 마을은 어떻게 들어왔어!?”
유설의 검지가 뒤쪽의 산맥을 가리켰다.
“저기 산을 넘어왔어요. 지금요.”
노인은 고개를 들어 산을 쓱 올려보더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길 사람이 어떻게 넘어와?”
“정말이에요, 할아버지. 근데 저 숲에 가면 보물이 있어요?”
숲 얘기를 꺼내자 갑자기 노인의 눈빛이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공포에 질린 사람처럼.
“저, 저 숲에는 절대 들어가면 안 돼!”
“왜요?”
노인은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좌우로 털어댔다.
초점이 풀린 동공까지. 분명 정상적인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귀신숲에 들어가면 다 죽어. 절대 들어가지 마!”
유진산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귀신숲이라니요? 조금 더 자세히 말해 주십시오.”
“저곳에 들어간 자들은 다 죽었어……. 전부다……. 귀신숲에 들어가면 백골마녀가 너희들을 죽일 거야.”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노인은 그대로 멀어져갔다.
뭔가 오싹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유진산은 귀신을 믿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무림고수들이 무서울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섬서로 진입하기 위해선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만 했다.
조손은 망설임 없이 귀신숲이라 불리는 곳으로 들어갔다.
안개가 내리깔린 빼곡한 나무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
이상하게도 유설은 조금 전부터 아무 말이 없었다.
노인을 만나고 기분이라도 안 좋아진 것일까? 빨리 숲을 빠져나가 섬서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다시 나아질 터.
“서두르자. 숲에서는 밤이 되면 방향을 잃게 되거든. 그래서 해가 지기 전에 빠져나가는 게 좋아.”
“…….”
“왜 말이 없어?”
“나 너무 무서워.”
“무섭다니?”
뒤를 돌아보자 아이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백만 대군을 눈앞에 둬도 눈 한 번 깜빡이질 않을 자신의 손녀가 말이다.
“귀신 나오면 어떡해…….”
유설은 다리와 양팔을 흔들며 오들오들 떠는 시늉을 했다.
사람은 안 무서워도, 귀신은 무서운 모양이었다.
“세상에 귀신은 없어. 있다면 흉내를 내는 사람이겠지.”
“정말……?”
“그렇다니까.”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자 뭔가 공기가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으스스함까지.
그때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유설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할배, 여긴 왜 동물이 하나도 없어?”
상당히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는데, 짐승의 울음소리는커녕 발자국 등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이 드넓은 세상에 오직 둘만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 찰나였다.
“이런, 벌써 해가 지는 모양이구나. 아무래도 야영을 해야겠어.”
어둠이 짙게 깔린 깊숙한 숲은 무림고수조차 발이 묶일 수밖에 없다.
낮에는 해와 그림자를 보고 이동하면 되지만, 밤에는 방향을 찾을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유진산이 나무 앞에 쪼그려 앉자, 손녀가 옆에 찰싹 달라붙어 팔짱을 꼈다.
“……나 육포 줘.”
유진산은 챙겨온 육포를 아이에게 건네준 후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먹고 한숨 자둬. 날이 밝는 대로 금방 빠져나갈 거니까.”
“……응.”
날이 어두워질수록 희뿌연 숲속의 안개는 더욱더 짙어져 갔다.
유진산은 잠시 두 눈을 감고, 아침이 오길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옆에서 다급히 꿈틀대는 아이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할, 할배, 빨리 일어나봐.”
“……왜?”
“저기 귀신이 있어.”
유설의 검지가 가리키는 곳에 뭔가 희뿌연 게 차츰 보이는 듯했다.
곧이어 안광에 내력을 집중한 그는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
오십여 장 밖.
찢어진 흰 천 옷을 입은 여인이 나뭇가지 위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다리 밑으로 내려오는 긴 머리칼.
그리고 무엇보다 새빨간 눈동자가 너무나도 괴이했다. 본디 사람이라면 검은자와 흰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가장 소름 돋는 것은 깡마른 얼굴이었다.
무척 화가 난 듯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괴이하게도 입은 웃고 있었다.
“걱, 걱정하지 마. 할아버지가 지켜줄 테니까.”
이미 유설은 할아버지의 등 뒤로 숨은 이후였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유진산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심장이 쿵쾅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용살창을 움켜쥔 그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갔다.
그때 어디선가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나타나 숲속을 휩쓸었다.
휘이이잉-!
그 순간 등 뒤에서 떨고 있는 손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해, 할배. 방금 바람 불 때 옷자락이 안 움직였어.”
이 상황에서도 대단한 눈썰미였다.
어쨌거나 바람에도 옷깃이 흔들리지 않는 경우라면 둘 중 하나였다.
신체 주변으로 비바람이 침범하지 못할 정도의 내가고수이거나. 아니면, 정말로 실체가 없는 귀신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