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너 이리와 (2)
백골마녀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선 어느새 다가온 유설이 양손의 쌍룡창으로 그녀를 후려치고 있었다.
어찌나 힘이 들어갔는지, 휘두르는 창 자루가 부러질 듯 꺾인 모습이었다.
쩌억-!!
용케도 양손을 뻗어 방어한 그녀였지만, 온전히 막아내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신발조차 신지 않은 까무잡잡한 맨발이 지면을 끌며 끝없이 미끄러져 갔다.
촤아아악-!
우선 그녀를 떨어트려 놓은 유설은 재빨리 쓰러진 할아버지를 살펴보았다.
퉁퉁 불어터진 입술과 살점이 터져 피투성이가 된 몰골.
그녀에게 얼마나 맞았는지 온몸이 성한 곳이 없어 보였다.
“……아가.”
죽어가던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게 된 아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슬픔은 곧이어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변해버렸다.
물기가 가득 찬 눈망울이 십 장 밖에서 비틀거리는 마녀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앵두 같은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분노의 외침이 뿜어져 나왔다.
“죽었어!!”
무슨 대화가 더 필요할까.
쌍창을 치켜든 유설이 그녀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몹시 화가 난 듯 손톱만 한 아이의 미간이 내 천(川)을 그리고 있었다.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는 빛살 뒤로 돌풍이 뿜어져 나왔다.
파앙-!
기세에 놀란 백발의 마녀는 움찔하더니, 재빨리 허리춤에 감긴 붉은 나무줄기를 뽑아냈다.
파르륵-!
채찍처럼 사용하는 나무줄기는 벼락처럼 빠르고, 일격에 바위를 분쇄할 정도로 강력하다.
이미 한번 당해본 유진산이 손녀에게 경고를 보내려 했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어느새 뱀처럼 뻗어 나간 나무줄기가 다가오는 아이를 휘감으려 했다.
하지만 유설은 다가오는 공격에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단지 보법을 밟았을 뿐.
작은 신형이 바람처럼 흐트러지며 기이한 각도로 꺾이기 시작했다.
스르르륵-!
유가장의 선풍보법(仙風步法). 그것도 극성의 수준이었다. 아이의 신형은 마치 바람결을 타고 노니는 신선처럼 미끄러졌다.
찰나의 순간 날카롭게 곡선을 그리던 채찍이 애꿎은 허공을 강타했다.
파앙-!
마녀가 채찍을 회수하기도 전에, 유설은 이미 그녀의 허리춤으로 쏜살같이 파고들고 있었다.
비진살강세(飛進殺强勢). 가문의 비전절학인 유가살풍창(劉家殺風槍)의 초식 중 가장 빠르고 매서운 돌진기술이었다.
더군다나 쌍창으로 펼치는 초식은 그 위력이 배가되는 법.
두 개의 창끝이 흔들리며 수없이 많은 분신을 만들어냈다. 마치 수백 개의 창을 동시에 내지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가문의 조상이자 무림 역사상 제일의 창잡이였던 창귀(槍鬼) 유정풍. 그의 기술이 완벽히 재현되고 있었다.
다급해진 백골마녀는 손에서 채찍을 놓으며, 정신없이 쌍장을 마주 내질렀다.
강기를 가득 머금은 창끝이 그녀의 손아귀와 부딪치며 굉음을 폭우처럼 토해냈다.
콰콰쾅-! 콰콰콰쾅-!!!
눈 깜짝할 사이 격돌의 횟수가 수십 회를 넘기고 있었다.
서로가 한 치의 밀림도 없어 보였으나, 그것은 오래 가지 않았다.
조금씩 꼬여가는 백골마녀의 양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유설이 다음 초식을 전개했다.
유가살풍창 구 초식 맹룡승천세(猛龍昇天勢).
무지막지한 내력을 머금은 용살창이 땅을 차고 솟구쳐 올랐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강기를 머금은 두 손이 다급히 하단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이번 공격은 유설의 십 성 공력이 담긴 강격(强擊)이었다.
콰앙-!!
“아악!”
마녀의 양손을 머리 위로 튕겨낸 용살창이 하늘 높이 용오름을 뿜어냈다.
그 순간 유설의 시선이 무방비 상태에 빠진 그녀의 허리를 응시했다.
완벽히 드러난 하단의 허점.
기다렸다는 듯이 그곳을 용화창이 후리고 지나갔다.
쩌억-!!!
“크헉!”
제대로 들어간 일격이었다.
지면에서 붕 떠오른 그녀는 삼 장을 날아 볼품없이 고꾸라졌다.
허리가 베이지 않은 것은, 유설이 뭉툭한 창날의 내부로 창기(槍氣)를 갈무리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외상은 면한 듯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분쇄된 늑골과 그 안에서 뒤틀려버린 장기들.
속이 뒤집힌 백골마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푸욱-!
용살창을 지면에 꽂은 유설은 용화창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이 정도로 용서하기에는 그녀의 죄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이리 와. 우리 할배 왜 때렸어?”
성큼성큼 다가오는 아이의 모습에 시뻘건 두 눈이 흔들렸다.
조금 전 당한 일격의 고통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분노에 찬 응징이었다.
쩌억-!
뭉툭한 창날이 등짝을 내리찍자 그녀의 상체가 철퍼덕 넘어졌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쩌쩍-! 퍽-!! 퍼퍼퍽-!!!
“아악! 아아악!!”
무방비 상태에 빠진 그녀는 복날의 개처럼 정신없이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바닥에 쓰려져 있던 유진산은 입을 벌린 채 그 모습을 말없이 응시했다.
조금 전의 자신의 모습과 백골마녀가 겹쳐 보였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당한 것은 장난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누군가의 폭소가 들려왔다.
“하하! 하하하하!!”
조금 전까지 함께 갇혀 있었던 오른팔과 두 다리가 없는 노인.
그가 무너진 전각에서 한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비록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랜 세월 그녀에게 사육당하며, 쌓여온 서러움이 한 번에 분출된 것이리라.
널브러진 유진산의 옆으로 다가온 그가 감격에 찬 얼굴로 물었다.
“설마 저 아이가, 아까 말했던 그 손녀요?”
“그렇소. 하나밖에 없는 금싸라기 같은 내 손녀가 맞소. 틀림없이 장차 지존이 될 아이라오.”
노인은 유진산을 부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그의 등장으로 잠시 유설의 정신이 흐트러진 사이. 엎어져 있던 마녀가 돌연 벌떡 일어섰다.
맨발의 그녀는 골반 아래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을 휘날리며 사력을 다해 내달렸다.
타타탓-!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음산한 숲속을 메아리쳤다.
“아, 아파! 다가오지 마!!”
그러나 이대로 보내줄 유설이 아니었다.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입을 앙다물고 뒤쫓았다.
“거기 서!”
토끼 모자를 눌러쓴 아이가 창을 사선으로 치켜세운 채 마녀를 추격하는 모습이 기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체불명의 노인이 또다시 정신없이 웃었다.
“하하하! 내가 살아서 이런 광경을 보다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소.”
“죽긴 누가 죽는다는 말이오? 이제 다 끝났으니 같이 빠져나갑시다. 우리 아이가 저 미친 여자를 곧 잡아 올 것이니.”
노인은 웃음을 멈춘 채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이 꼴로 어딜 간단 말이오. 이 모습을 사문의 제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소이다.”
“그깟 껍데기가 뭐가 중요하오? 세상 그 누구도 당신에게 뭐라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오. 어서 나갈 준비나 하시오.”
유진산은 노인을 설득해보려 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무엇인가 확고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나는 곤륜파의 청허라 불리던 사람이었소. 당신이라도 내 이름을 기억해주면 고맙겠구려.”
“그게 무슨 말…….”
유진산은 말을 이어가다 말고 다급히 멈추었다. 자신을 청허라 말한 노인이 하나밖에 없는 손을 전광석화처럼 뻗어왔기 때문이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에 피할 방도가 없었다.
푹-! 푸푹-!
졸지에 점혈을 당한 유진산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덕분에 마지막으로 좋은 구경을 했소이다. 그래서 나도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보답으로 선물을 하나 줄 생각이오.”
짧은 시간 정이라도 들었던 것일까? 청허의 두 눈엔 미묘한 감정이 가득했다.
그는 곧이어 하나밖에 없는 손바닥으로 유진산의 등을 완전히 감쌌다.
“……?”
“사실 말이오. 나도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다오.”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는 유진산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몸속으로 거센 진기가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으니까.
‘일면식조차 없었던 나에게 내공을 넘겨준다고? 목숨이 위험할 터인데…….’
기쁨보다는 청허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내공 전이는 전달하는 과정에서 소실되는 양이 절반 이상이며, 시전자가 죽을 수도 있기에 어지간해선 잘 사용하지 않는 수법이다.
하물며 몸도 정상이 아닌 그가 온전히 이 일을 마칠 수 있는 확률은 높지 않았다.
하지만 말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점혈을 당해 입조차 뻥긋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어서 나의 진기를 단전으로 유도하시오. 조금이라도 더 온전히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수 없이 유진산도 그의 뜻을 받아들여 진기의 흐름에 정신을 집중했다.
살아온 세월이 길었던 때문인지 청허의 내공은 어마어마했다.
무려 이 갑자가 넘어서는 내공이 몸속에서 요동치는 듯했다.
그중에서 절반 정도가 자신의 단전에 차츰차츰 축적되어 갔다.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의식은 계속되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정적을 깨고 청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비록 당신의 이름도 모르지만, 덕분에 마지막 가는 길이 외롭지 않소이다. 부디 내 몫까지 잘 살아주시오…….”
그의 마지막 한마디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찡해졌다.
‘그동안 외롭게 혼자서 얼마나 모진 고통을 겪어왔을까. 이제야 족쇄가 풀렸거늘, 이렇게 가버리려 하다니…….’
그가 얼마나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왔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마치 오랜 친구를 보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순간 유진산은 자신이 당했던 점혈이 풀린 것을 깨달았다. 막대한 진기가 전신의 혈도를 일주천하며 발생한 현상 때문이리라.
뒤를 돌아보자 청허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왼팔을 축 늘어트린 채 숨을 헐떡이는 모습이 더없이 처량해 보였다.
“내 이름은 유진산이오. 나 또한 당신을 만나 기뻤소.”
“…….”
유진산은 청허의 얼굴이 희미한 미소를 그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고개를 푹 떨군 그는 그렇게 세상과의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야 말았다.
“모진 삶을 그렇게 버텨와 놓고, 어찌 이리도 쉽게 간단 말이오…….”
말과는 달리 그의 선택을 존중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진산은 경건한 마음으로 그에게 잠시 묵념을 해 보였다.
다시 눈을 뜬 그의 안광에는 전에 없던 맑은 정기가 흘러넘쳤다.
청허에게서 온전히 받아낸 내공이 무려 일 갑자.
이제는 강호에서 이름난 내가고수들의 반열에 낄 정도의 수준이었다.
목표는 화경(化境). 그러나 깨달음이 없이는 도달할 수 없는 이 경지는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졌다.
태생적으로 신선의 오감을 타고나 기연까지 얻은 손녀와는 경우가 달랐으니까.
‘나도 보답을 해주어야 수지타산이 맞겠지.’
그는 조심스럽게 청허의 몸을 수색했다. 유품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오랜 기간 팔 한 짝으로 버텨온 그가 가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청허의 품속에서 나온 것은 작은 목각인형 하나가 전부였다.
진득하게 묻은 손때를 보니, 지금껏 이것을 의지 삼아 버텨온 듯했다.
뒤집어보니 주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진호?’
강호의 경험이 많은 유진산은 어렴풋이 곤륜파의 배분을 기억했다.
진자 배는 청자 배의 바로 다음 세대였다.
‘제자인가? 그 녀석 참으로 복도 많구나. 이렇게나 다정한 사부를 두었으니.’
유진산은 작은 목각인형을 자신의 품속에 갈무리했다.
기회가 닿는 대로 주인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비록 곤륜파 또한 치가 떨리는 무림맹의 문파 중 하나였지만, 그들과의 악연은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씩씩대는 손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배! 망둥이 잡아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