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사파의 주역들 (2)
유진산은 백규를 따라 바로 흑묘파의 문주를 만나러 갔다.
딱히 그자와 볼 일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무림맹과 악연이 계속되고 있었기에, 그들의 반대 세력들이라도 인맥을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라도 해둬야 숨통이 트일 테니까.
“자 들어갑시다, 형님.”
장원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전각으로 귀빈들이 머무르는 곳이었다.
백규가 문을 열자 흑의를 입은 한 사내가 탁상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다시 봐도 가슴이 시릴 정도로 서늘함이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또 뵙는군요.”
정파와는 달리 사파 무림에서는 명성과 무공이 곧 배분이다.
유진산이 먼저 포권을 건네자 흑묘파의 문주 백상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남에서의 활약은 익히 들었소. 그런데 음괴 대협은 함께 안 오셨소?”
말투를 보아하니 그는 자신보다 손녀를 더 높게 대우해주고 있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차마 내색할 수가 없었다. 패도문에서 함구하는 이상 자신과 음괴가 서로 어떤 관계인지 모를 테니까.
“음괴는 무력만 사용할 뿐, 대외적인 일은 모두 내가 맡고 있소.”
“역시 소문이 사실인가 보오.”
“……?”
유진산이 어리둥절 하자, 흑묘파의 문주가 내막을 설명해주었다.
“두 분이 태생적으로 신력을 타고난 쌍둥이라는 소문 말이오. 두뇌 능력은 양괴가 모두 가져간 대신, 음괴는 모든 능력이 무력에만 집중되어있다고 들었소.”
이게 무슨 괴상망측한 헛소문인가.
유진산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백규를 쓱 바라보자 그가 전음을 보내왔다.
- 내 형님과 설이에 대한 정보는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단속했소. 의리하면 바로 패도문 아니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강호의 신진고수들인 음양쌍괴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온갖 추측만 난무할 수밖에.
백규가 씩 웃으며 양손을 좌우로 벌렸다.
“자, 두 분 모두 일단 앉으시지요. 련주께서 도착하실 때까지 우리끼리 차나 한 잔씩 마십시다.”
셋은 머리를 맞대고 두런두런 무림의 정사에 관해 얘기했다.
대부분이 정파의 고수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중에서도 그들은 소림사에서 있었던 일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정말 숭산의 파계승이 혜광하고 맞수를 이루었단 말이오?”
백규의 질문에 유진산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둘의 대화를 엿듣다 보니 사제관계라더군.”
사도련의 간부인 백규가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혜광대사가 누구인가. 소림사의 제일 고수인 그와 맞수를 이뤘던 파계승이 존재한다니. 무척이나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만약 그 파계승을 포섭할 수만 있다면, 우리 사파에도 희망이 있겠소.”
“그것은 꿈도 꾸지 마시게. 제정신도 아니고, 어디로 튈지 몰라 너무 위험하네.”
백규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나저나 그에게서 어떻게 도망쳐 나온 것이오?”
유진산은 잠시 대답을 고민했다.
자신이 믿는 백규 아우라면 모를까. 외부인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기연까지 얘기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때 때마침 구원군이 나타났다.
문 앞에서 들려온 부하의 나직한 한마디.
“련주께서 당도하셨습니다.”
백규가 벌떡 일어서서는 직접 문을 열었다.
벌컥-!
문 앞에 죽립을 눌러쓴 한 여인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피처럼 붉은 무복(武服)에 검은 피풍의. 그리고 허리춤에는 황룡이 각인된 검이 채워져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무위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절대고수가 분명했다.
분위기로 말미암아 그녀는 정파의 눈을 피해 혼자서 은밀히 온 듯했다.
“련주님을 뵙습니다.”
백규가 한쪽 무릎을 꿇자, 유진산도 엉거주춤 일어나 예를 갖춰 포권을 했다.
이상한 점은 흑묘파의 문주가 여전히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뭘 믿는 거지? 아무리 전설적인 살수라도, 사도련주 앞에서 저리 당당하다니.’
유진산의 의문은 점차 더해져 갔다. 사도련주를 응시하던 그가 피식하고 웃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군.”
백규를 지나쳐 쓱 들어온 그녀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때 죽립 아래로 드러난 입술이 나직이 달싹였다.
“……코흘리개 백상.”
“울보 영영이.”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서로가 이름까지 부르며 반말을 하다니? 어지간한 친분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유진산은 물론 백규도 적잖게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절정에 달할 무렵. 돌연 둘이 동시에 웃음을 토해냈다.
“하하! 이게 얼마 만이야?”
“한 이십 년만인가. 잘 지냈어?”
어리둥절한 유진산과 백규만 엉거주춤하는 모습이었다.
그때 사도련주가 죽립을 벗자,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이 드러났다.
사파의 지존이라면 누구나 패도적이고 무서운 인상을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이리도 단아하고 고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니?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친근해 보일 정도였다.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소소와 함께 우리 셋은 어렸을 적 소꿉친구였으니.”
백규도 처음 들어보는 내용인 듯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강호에서 소소의 이름을 모르는 무림인은 없다. 금분세수식을 거행하고 천축으로 떠난 무림제일고수, 검후의 이름이었으니까.
“……검후와도 친분이 있으시다는 말씀입니까?”
영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맞습니다. 자, 일단 모두 앉으시지요.”
유진산도 검후를 만났던 일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고강한 무공이 있음에도 타인을 하대하지 않았던 그녀의 모습이 사도련주와 겹쳐 보였다.
그때 팔짱을 끼고 있던 흑묘파의 문주가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당시 셋 중에선 내가 대장이었지.”
사도련주가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얘 말은 믿지 마십시오. 아미파의 화령에게 두들겨 맞고 울던 걸 소소가 복수해줬으니까.”
화령사태는 무림맹의 맹주가 아니던가. 놀라움이 끝이 없었다.
도대체 이들이 과거 무슨 인연으로,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자존심이 상한 흑묘파의 문주가 잠시 그녀를 노려보았다.
“너는 그년한테 맞고 기절했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그런 기억이 없는데.”
무림의 절대자들이 어린아이들처럼 농을 주고받는 모습이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격식을 중시하는 정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장내의 분위기는 시작부터 밝았다.
“그나저나 이 어르신이 바로 그분이시지요?”
강호의 배분으로 사도련주와 유진산의 차이는 비교조차 될 수 없었다.
하대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어르신이라 높여주다니? 유진산은 몹시 의아한 심정이었다.
우선 그녀의 속내를 알기 전까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백규가 먼저 나서서 그를 소개해 주었다.
“예, 련주님. 이분이 바로 제가 형님으로 모시는 양괴 대협이십니다.”
“정말 큰일을 해내셨더군요. 꼭 한번 뵙고 싶었답니다.”
사도련주가 대뜸 포권을 건네자, 유진산도 다급히 읍을 마주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헌데 어떠한 일로 우리를 찾으셨는지요?”
“저는 돌려 말하는 성격이 되지 못하니, 바로 말씀드리지요. 음양쌍괴와 공식적인 조약을 맺고 싶었습니다.”
짐작되는 내용이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뜬구름 잡는 소리였으니까.
“조약이라니 어떤……?”
“음양쌍괴가 우리 사도련에 포섭될 것 같지는 않고, 대신 공식적으로 불가침의 관계라도 맺고자 합니다. 마침 이곳에 증인이 되어줄 흑묘파의 문주님도 있군요.”
비록 음양쌍괴의 명성이 급격히 퍼져 나가고는 있으나, 강호는 넓고 고수는 많은 법.
사도련에서 이렇게까지 자신들에게 아쉬워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련주가 직접 나서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먼저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불가침 정도라면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할 상황이었으나 무턱대고 수락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공식적으로 관계가 공표되면 그 효력은 매우 강력하다. 강호에서 신뢰를 잃으면, 무림공적으로 몰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음괴 대협이 검후와 같은 체질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오면서 잠시 마주쳤는데, 사실인 것 같더군요.”
그녀는 손녀가 선음지체의 체질인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입이 무거운 백규가 그것까진 얘기해준 것인지, 아니면 직접 알아낸 정보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무래도 관계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손녀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미리 친분을 쌓아두려는 사도련주의 속내였다.
충분히 이해는 되는 일이었다. 검후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본 그녀였으니까.
어쨌거나 상황이 이렇다면 자신이 굳이 숙이고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제 아우도 사도련의 소속이니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전에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는지요.”
“말씀해보십시오. 가능한 일이면 모두 수락하겠습니다.”
잠시 호흡을 고른 유진산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꺼냈다.
“사도련이 뒤에서 흑야방을 키워주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련주는 짐짓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유진산이 그러한 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한 것이리라.
“무림맹에서도 눈치채지 못한 정보를 알고 있다니 놀랍군요. 계속 말씀해보시지요.”
“혹여……. 그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된다면, 흡수할 생각이 아니신지요?”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거대한 정보망이 있는 무림맹에 비해 우리가 가진 것은 너무 열약하니까요.”
유진산은 길게 얘기하지 않았다.
의미심장한 한마디만을 내뱉었을 뿐.
“우리는 그들과의 인연을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 말뜻을 눈치채지 못할 영영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흑야방과 친분이 있으니, 그들을 건든다면 함께할 수 없다는 의미이리라.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흑야방과는 지금처럼 좋은 거래 관계를 유지하되, 우리 쪽에서 먼저 배신하는 일은 없도록 약조하지요.”
이 정도면 그녀가 많이 양보한 셈이었다.
더 이상의 요구조건을 내미는 것은 위험했기에, 유진산도 이쯤에서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우리 음양쌍괴 또한 사도련을 먼저 적대시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거래가 성립되자 백규가 환한 미소로 분위기를 돋웠다.
“정말 잘 생각하셨소, 형님.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사도련은 그렇게 무자비한 집단이 아니라오.”
“내 어찌 아우의 말을 모르겠나. 련주님의 성품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네.”
간접적인 유진산의 칭찬에 영영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앞으로 우리는 음양쌍괴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의 말은 곧 사파를 대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림맹에 쫓기는 지금 상황에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몇 마디의 대화가 더 오간 후 유진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는 일어설 테니, 마저 담화들 나누시지요.”
“반가웠습니다, 그럼 또 뵙지요.”
밖으로 빠져나온 유진산은 깊은숨을 토해냈다.
안에서는 애써 괜찮은 척을 했지만, 내심 그들의 기세에 눌려 숨이 막혔던 터였다.
서늘한 기운을 풍기는 전설적인 살수 백상. 그리고 사파의 지존인 사도련주 앞에서 어찌 멀쩡할 수가 있겠는가.
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결심을 굳혔다.
‘어서 빨리 떠날 채비를 해야겠군.’
이곳으로 고수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무림맹의 섬서분타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패도문에 오래 남아 있다가는 그들의 전쟁에 말려들 우려가 있었다.
그는 손녀가 있을 만한 곳으로 곧장 향했다.
패도문의 대 연무장.
역시나 용화창을 움켜쥔 손녀가 그곳에서 자세를 잡고 있었다.
“할배도 빨리 올라와.”
이미 손녀의 주변으로 널브러진 패도문의 무사들이 수십 명이었다.
그동안 참아왔던 비무 놀이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