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아미산의 아이들 (2)
기회를 엿보던 유진산은 은밀하게 아이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누구도 자신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아니, 입 한번 뻥긋하는 아이가 없었다.
그간 얼마나 억압을 받았으면 이렇게까지 길들여졌단 말인가.
가장 후미에서 이동 중인 그는 아이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어리게는 손녀 또래부터 많게는 십 대 중반까지. 한 가지 특이점은 한 명 한 명이 범상치 않은 근골을 타고났다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마다 은은히 풍기는 다양한 기세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대충 살펴보아도 무림에서 찾아보기 힘든 온갖 특이체질을 죄다 잡아다 놓은 듯했다.
‘정파천하가 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구나. 우리 설이만큼은 아니지만, 정말 대단한 아이들이다.’
특이체질 중 최고로 쳐주는 것은, 신선의 오감을 타고나 높은 경지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선음지체(仙音之體)다. 이것은 천축으로 떠난 검후(劍后) 소소와 자신의 손녀인 유설이 유일했다.
잠시 후 행렬의 선두가 걸음을 멈추었다.
침묵 속에서 걸어간 곳에는 식사를 배급하는 막사가 있었다.
후미에 있던 유진산도 다른 아이들을 따라 바가지 하나를 움켜쥐었다.
거대한 가마솥의 내용물을 보는 순간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이딴 걸 먹으라고?’
축사의 동물들에게나 먹일 법한 정체 모를 죽이 가득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받아들기 무섭게 미친 듯이 흡입하기 시작했다.
배급은 매우 빠르게 이루어졌다. 일각도 안 되어 자신의 차례까지 도착했을 정도로.
터업-!
바가지에 반쯤 담긴 걸쭉한 죽 한 그릇.
무심히 내용물을 바라보던 유진산은 심경이 착잡했다.
먹기 싫어서가 아니다. 이곳의 환경이 갑갑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나무에 등을 기대어 묵묵히 한 입을 들어 보았다.
예상대로 맛은 별로였지만, 그런대로 먹을 수 있을 정도는 되는 듯했다.
‘입맛은 없지만, 그래도 먹어 둬야겠지.’
그렇지 않아도 손녀와 키 차이가 벌어지고 있었기에 어지간하면 끼니를 거르지 않는 중이었다.
그가 두세 입을 먹었을 때쯤 어디선가 호각이 울렸다.
삐이익-!!
설마 또 소집이란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밥을 먹다 말고 아이들이 동시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동작들 봐라! 가장 늦게 모인 열 놈은 각오해!!”
밥 먹을 시간조차 제대로 주지 않다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꿈틀거렸지만, 지금은 참을 수밖에.
유진산도 식기를 반납하고 대열에 합류했다.
그때 짙은 흑의를 입은 야생마같이 생긴 교관이 눈알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지금부터 십인 일조로 돌파훈련을 시작할 것이다!!”
아이들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허겁지겁 열 명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한 가지 특이점을 찾을 수 있었다.
서로가 강해 보이는 아이들로만 짝을 이루려는 것이 아닌가.
무공이 고강해 보이는 아이들은 순식간에 조를 찾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그러지 못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다쳐서 몸이 불편하거나,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거나.
체구가 가장 작은 편에 속한 유진산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처음으로 말을 걸어왔다.
“……일삼칠번. 우리랑 같이할래?”
삐쩍 꼴은 체구에 흐리멍덩한 눈동자를 가진 아이. 주변에 있는 녀석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명실상부 가장 약해 보이는 조에서 초대받은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관계가 없었다. 훈련의 성과 따위는 목적과 상관이 없었으니까.
“수락한다.”
이미 다른 조는 모두 편성이 끝난 상태였다.
수십 개의 조로 나뉘길 무섭게 어딘가로 행군이 시작되었다.
유진산은 묵묵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가장 궁금한 것은 역시나 교관들의 전력이었다. 그래야 자신이 아이들을 구출할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절대 불가였다.
‘이거 쉽지 않겠구나.’
지금까지 그가 육안으로 확인한 교관들의 숫자는 열여섯 명.
한 명 한 명이 모두 절정을 넘어선 고수들로 짐작되었다.
일대일로 붙는다면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세 명 이상이 동시에 덤벼든다면 위험할 수가 있었다.
더군다나 아직 확인하지 못한 자들도 있는 상황이었다.
‘고작 애들을 훈련시키는 교관들이 이 정도면, 일선에서 활동 중인 창룡대의 주력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무림맹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전투부대를 대를 이어서 양성하는 자세한 내막이 궁금해졌다. 물론 어떠한 이유가 있더라도 용서할 수가 없을 테지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 어느새 행렬이 어느 산속의 입구에서 멈추었다.
장소에 도착하기 무섭게 교관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일렬 출발!”
첫 열에서 대기 중인 열 명의 아이가 산속으로 달려 나갔다.
타타탓-!!
고작 열 살 전후로 보이는 작은 아이들이었지만, 그 움직임이 명문정파의 일대제자 못지않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 모습을 지켜보는 유진산의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예상대로라면 저 산속에는 교관들이 매복해 있을 터.
무기조차도 없는 상태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불길한 예상은 빗나가질 않았다. 반각도 지나지 않아 깊은 산속에서 비명이 하나둘씩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각이 지났을 때쯤 다음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 열 출발!!”
두 번째 조의 아이들이 기세 좋게 출발했지만,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이 미친 훈련을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다음 조가 출발을 준비하고 있을 때, 지켜보다 못한 유진산이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저희 조가 먼저 출발해도 되는지요?”
그 순간 모두가 유진산을 바라보았다. 마치 미친놈을 본다는 눈빛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교관의 발길질이었다.
“누가 입 열어도 된다고 했어!?”
퍼억-!!
복부를 움켜쥐며 뒷걸음질 치는 유진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옆에 있던 또 다른 교관이 따귀를 날렸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막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힘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철썩-!
‘……이 때려죽일 놈들이 노인의 뺨을 때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지금은 참아야 할 때였다.
입에서는 속마음과 다른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죄송합니다.”
“그래, 그렇게 먼저 죽고 싶다는 게 소원이면 들어주마.”
호각 소리와 함께 삐쩍 마른 열 명의 아이들이 앞으로 나섰다.
누구도 불평하는 기색은 없었다. 순서만 조금 앞당겨졌을 뿐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삼 열 출발!”
타타탓-!
유진산도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아이들의 뒤에 합류했다.
산길로 들어서자 나무가 빼곡한 숲이 나왔고, 매듭으로 방향이 표시되어 있었다.
살수들이 활동하기에 최적화된 장소나 다름없었다.
아이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무기가 될 만한 것부터 찾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나뭇가지와 돌멩이 따위들이 전부였다. 날이 선 검과 비교하면 기(氣)를 전달하는 효율이 떨어지지만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겠는가.
오직 유진산만이 가만히 선 채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았다.
“이대로 출발하면 너희들은 다 죽어. 그러니까 모두 잠시 모여봐.”
자신이 편성된 조보다 강한 아이들조차 무사하지 못했는데, 이런 약골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역시나 다들 하나같이 표정이 어두웠다. 아마도 자신들의 운명을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머뭇거릴 시간이 없어. 일각 안에 나가야 해.”
불안에 떠는 아이들과 달리 유진산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는 여유 넘치는 모습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앞서 교관이 말하길 돌파훈련이라고 했다. 정황상 곳곳에 숨어 있을 교관들을 피해 목적지까지 당도하는 것이리라.
그 과정에서 나약한 조원들이 먹잇감이 되어 희생될 터.
모두가 함께 살아남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우리는 교관들을 피해 도망치지 않고, 쓰러트리며 나아간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교관님들과 어떻게 싸워?”
“그건…… 불가능해.”
조원들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예상된 반응이었다. 이미 주눅이 든 아이들이 어찌 싸울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교관은 모두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각인되어 있을 터였다.
“시도해 본 적 있어?”
“…….”
“무엇이든 시도도 안 해 보고 포기해선 안 돼. 내 말 잘 들어봐. 일대일로는 절대 당해낼 수 없겠지만, 우리 열 명이 동시에 덮쳐서 한 명씩 쓰러트리는 건 어렵지 않아.”
“……그게 정말 가능할까? 그러다 잘못되면 우리 다 죽어.”
모두가 부정적인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산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럼 도망치면 살 수 있을 것 같아? 보아하니 나약한 조원들은 살려 두지 않는 것 같은데, 약골들만 모인 우리 조를 곤히 보내줄까?”
“그건 그렇지만…….”
유진산은 인자한 표정으로 겁에 질린 아이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내가 앞에서 먼저 선공을 하면 너희들이 같이 제압하는 거야. 여차하면 날 버리고 도망가도 괜찮아.”
모두가 못 미더운 표정을 지었지만, 더는 아무도 거부하지 않았다. 밑져야 본전이었으니까.
“네가 실패하면 우린 정말 도망칠 거야.”
“그래, 그렇게들 해. 근데 출발하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혹시 교관을 죽이면 어떻게 되지?”
가냘픈 나뭇가지를 움켜쥔 아이가 답을 알고 있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꾀죄죄하고 삐쩍 마른 얼굴이 보기만 해도 안쓰러운 몰골이었다.
“포상을 받는다고 들었어. 지금까지는 한 명도 없었지만.”
오히려 교관을 죽이는 아이에게 상을 내린다니. 그야말로 웃기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모든 훈련을 실전처럼 한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그렇단 말이지? 지금부터 모두 내 뒤만 따라와.”
이 나무숲에 얼마나 많은 교관들이 매복해 있을지는 모른다.
유진산은 그들을 모두 처치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다음 조의 아이들이 무사할 테니까.
탈출을 위해서라도 기회가 올수록 놈들의 머릿수를 줄여둘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앞장서서 달리길 잠시 후.
머지않아 첫 번째 기습이 시작되었다.
왼쪽 나무의 그림자에서 뭉툭한 곤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눈치채고 있던 유진산은 여유로운 몸짓으로 상체를 비틀었다.
파앙-!
앞가슴을 스쳐 지나가는 곤봉이 거센 바람을 뿜어냈다.
일말의 자비도 없는 손속에 유진산의 두 눈이 꿈틀거렸다.
‘네놈들은 도저히 용서해줄 수가 없겠구나.’
고사리 같은 손아귀가 상대의 옷깃을 낚아채고는 확 잡아당겼다.
무지막지한 힘에 놀란 교관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그의 안면으로 유진산의 주먹이 전광석화처럼 날아들었다.
방심하고 있던 교관이 피해낼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쩌억-!
단방에 코뼈가 주저앉은 교관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때 유진산의 손아귀가 그의 목젖을 움켜쥐고선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콰앙-!!
바닥에 쓰러진 교관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자신이 이렇게 쉽게 제압당한다는 말인가. 그는 직감적으로 눈앞의 아이가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크윽. 네, 네놈은 누구냐.”
“옷에 쓰여 있잖아. 일삼칠번.”
유진산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조원들을 바라보았다.
“…….”
자신이 너무 쉽게 제압했기 때문일까? 아이들은 움직일 생각도 못 한 채 붕어처럼 입만 뻥긋거렸다.
“빨리 덮치지 않고 뭣들 해!?”
정신이 번쩍 든 아이들이 그때서야 교관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서러움이 분출되듯 사방에서 내지르는 발길질에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쩌억-! 퍽-!! 퍼퍼퍽-!!
순식간에 곤죽으로 변해가는 교관은 이미 두 눈이 풀려 있었다.
그리고 적당한 시점에서 유진산이 그의 목을 비틀어버렸다.
우드득-!
자신이 혼자 쓰러트려도 되었지만, 조원들의 도움을 받은 이유는 최대한 정체를 숨기기 위함이었다.
“거 봐. 같이 힘을 모으니까 되잖아.”
조원들은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와…….”
“우리가 교관을 쓰러트렸어.”
“일삼칠번 너 정말 대단해.”
유진산이 손을 털며 다시 앞장서자 아이들이 상기된 얼굴로 뒤따랐다.
그리고 얼마 가지 못해 두 번째 공격이 날아들었다.
일 장 거리 앞의 나뭇가지 위.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뱀이 먹이를 낚아채듯 다가왔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유진산은 고개를 슬쩍 왼쪽으로 틀었다.
휘리리릭-!
한 치 차이로 눈앞을 비껴 나가는 것은 다름 아닌 채찍이었다.
유진산은 그것을 냉큼 움켜쥐고,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사 갑자의 내공이 담긴 힘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다른 건 몰라도 내공만큼은 화경급인 유진산이었다.
“으윽!”
나무에서 떨어지는 교관의 등 뒤로 유진산이 쏜살같이 올라탔다.
덥석-!
뒤에서 상대의 어깨를 부여잡은 가냘픈 양손이 조금 어색해 보였지만, 교관은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얘들아, 지금이다!”
한번 자신감이 붙은 조원들의 움직임에는 이제 거침이 없었다.
“나쁜 놈!!”
“죽어!”
흥분이 극에 달한 아이들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양팔을 제압당한 교관은 참담하다는 표정으로 이를 악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