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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14화 (114/238)

114화 아미산의 아이들 (3)

조원들의 힘을 빌려 유진산이 처치한 교관은 총 다섯 명.

그로 인해 다음 조부터는 한 명의 희생도 없이 모두가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이 사실이 알려지자 훈련장이 발칵 뒤집혔다.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한 거지?”

모여든 교관들의 앞에 열 명의 아이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유진산이 설명해주길 기다리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 또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교관들이 두 다리를 척 붙이고 기립했다. 누군가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교관들과는 달리 흑의 위에 피처럼 붉은 피풍의를 걸친 인물이었다.

‘저놈이 이 훈련장의 대장이로군.’

유진산은 단번에 확신했다.

절도 있는 걸음걸이와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 게다가 완벽히 갈무리된 기세는 그의 경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자는 교관들에게는 눈길조차도 주지 않은 채 아이들에게 물었다.

“설명해 보거라. 어찌 너희들이 교관을 다섯 명이나 죽일 수 있었는지.”

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유진산이 이제야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교관님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것보다는, 협공으로 한 명씩 쓰러트리는 게 생존율이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교관들의 대장은 묵묵히 아이들의 위아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유진산도 이 순간만큼은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용기를 냈다니 제법이군. 하지만 너희들이 동시에 덤벼도 이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비겁하더라도 방심을 유도했습니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가르침대로.”

유진산은 앞서 교관들이 훈련장에서 호통치던 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을 교묘히 포장하여 조합한 것이다.

다행히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옳은 판단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창룡대는 임무가 최우선이지. 그런데 교관들을 죽인 이유는 무엇이지?”

“모든 훈련은 실전입니다. 실전에서 상대를 살려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유진산의 예상대로 그는 자신들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기까지 했다.

“기대 이상으로 잘 성장하고 있구나. 오늘 너희들에게 포상이 있을 것이니, 이만 돌아들 가거라.”

아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터.

걸음을 돌리려던 유진산은 놀란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코앞에 있던 대장의 신형이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느새 그는 교관들의 틈새에 다시 나타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쩌억-!

“크윽!”

따귀를 맞은 교관은 일 장을 날아 볼품없이 고꾸라졌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동작을 제대로 본 사람은 이곳에서 유진산이 유일했다.

‘……화경?’

그렇지 않고서야 이 정도의 움직임을 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애들이나 훈련시키는 산속에 저 정도의 고수가 포함되어 있었다니.

이십여 명의 교관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는 손속에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콰직-! 퍽-! 쩌억-!

“큭!”

“커억!”

처절한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불똥이 튀기 전에 아이들은 재빨리 자리에서 물러섰다.

유진산도 조원들의 뒤를 따라 어딘지 모를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 등 뒤에서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들을 수 있었다.

“한심한 놈들. 고작 그 정도니까 창룡대에는 끼지도 못하고, 이곳에서 낙오자 신세를 면치 못하는 거다.”

하나하나가 절정의 무위를 지닌 교관들이 고작 낙오자들이었다니. 그 말을 듣게 된 유진산은 황당할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창룡대에서 정식으로 활동 중인 놈들은 얼마나 강하다는 말인가.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볼 문제였다.

지금은 이곳을 빠져나갈 궁리가 우선이었다.

‘……저놈을 어떻게든 해야 할 터인데.’

하지만 화경급의 고수를 어떻게 따돌린단 말인가.

이곳의 아이들을 어찌 구해줘야 할지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자신 혼자 빠져나가는 것조차 위험한 상황이었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자 어둠이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었다.

드디어 훈련이 끝난 것일까? 아이들과 함께 도착한 곳에는 열 개의 막사가 있었다.

언뜻 살펴보니 그중 절반가량은 내부가 텅 비어 있는 듯했다. 그만큼 훈련 중에 죽어간 가여운 아이들이 많았던 것이리라.

그때 옆에 있던 녀석이 어리둥절하며 말을 걸어왔다.

“일삼칠번. 너는 저쪽 막사잖아?”

첫 번째 숫자에 따라 막사가 정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유진산은 자신과 비슷한 숫자를 가진 애들을 따라 한 막사의 내부로 들어갔다.

내부는 마치 축사를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중앙의 통로를 기점으로 좌우에 모포만이 길게 깔려 있었다.

안에는 백 명이 훌쩍 넘었지만, 고요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하루의 지친 훈련 때문이었는지 대부분 곯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유진산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드러누웠다.

머리 뒤로 팔짱을 끼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누군가의 얼굴이 그려졌다.

‘우리 설이는 잘하고 있겠지?’

손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얼굴을 못 본 지도 보름이 넘은 상황이었으니, 그리울 수밖에.

어린 것이 스스로 폐관수련을 하는 것이 기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머지않아 깨달음을 얻어 절세신공을 익히고 나올 터. 유진산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세상 누구보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아이였으니까.

두런두런 생각에 잠겨있길 한 시진이 지났을 때였다.

“모두 기상!!”

얼굴이 불어터진 교관이 막사의 입구에서 뒷짐을 지고 있었다.

설마 또다시 훈련이란 말인가? 자다 깬 아이들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지만, 누구도 감히 불평 한마디 하지 못했다.

오직 유진산만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장님께서 내려주신 훈련 결과의 포상이니 실컷 처먹거라.”

아까 보았던 교관들의 대장을 이곳에서는 소장이라 부르는 모양이었다.

입구에서 다른 교관 두 명이 무엇인가를 양쪽에서 들고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노릇하게 익은 거대한 멧돼지 한 마리였다.

그들은 중앙의 통로에 그것을 툭 내려놓고 사라져 갔다.

“……뭐, 뭐야 이게.”

“고, 고기?”

“먹어도 되는 거야?”

아이들은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서로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고기를 먹어 본 경험이 별로 없는 듯 보였다.

그러길 잠시 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가 동시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멧돼지를 도축하고 손질하면, 무게에 따라 이백 명에서 삼백 명이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양이 나온다.

막사의 아이들이 먹기엔 충분하고도 남을 양이었다.

다른 막사에서도 소란스러움이 감지되는 것을 보니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듯했다.

아이들은 얼굴이 기름 범벅이 되는 것도 모르고 허겁지겁 고기를 뜯어 먹고 있었다.

“너무 맛있어.”

“히히.”

“매일 고기 먹었으면 좋겠다.”

유진산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보았다.

길든 짐승들처럼 어두운 그림자만 가득했던 아이들이었다. 저토록 순수한 미소를 지금까지 감추고 있었다니.

‘조금만 기다려라. 지금은 힘들겠지만, 할아버지가 어떻게든 이곳에서 구해주마.’

지켜보는 마음이 흐뭇했지만, 한편으로는 근심도 같이 떠오르고 있었다.

교관들의 희생을 대가로 얻어낸 보상이었다.

그들이 독기를 품을 것이 당연할 터. 내일부터는 얼마나 더 아이들을 혹독하게 대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일단 교관들의 숫자부터 최대한 줄여 놓아야겠지.’

그렇게 해야 훈련과 가혹한 행위가 줄어들고, 탈출이 수월해질 터였다.

나름대로 계획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배가 어느 정도 부르자 아이들의 말문이 조금씩 트이기 시작했다.

“돌파훈련 때문인 것 같아.”

“아까 그 조에 우리 막사 애들도 있어?”

“한 명 있어.”

“일삼칠번!”

모두의 시선이 유진산을 향해 집중되었다.

멧돼지에는 손도 대질 않고 홀로 멀찍이 누워 있었으니 눈에 띌 수밖에.

“고마워, 일삼칠번.”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왠지 쑥스러워진 유진산은 대답하지 않고 반대로 몸을 돌려 누웠다.

‘어린 녀석들이 할아버지한테 반말이나 해대고 말이야.’

속마음과는 달리 그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애들과 뒤섞여 친구처럼 놀 수는 없는 노릇.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홀로 잠을 청했다. 물론 잠이 올 리는 없었지만.

성대한 저녁 식사가 끝나고 점차 소란스러움이 잦아졌다.

다음 날의 훈련을 위해서라면 체력을 보충하는 것이 필수. 아이들도 운기조식을 하거나 수면으로 스스로의 몸을 돌보기 시작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나 지났을까? 깊은 정적이 감돌며, 숨이 막힐 정도의 고요함이 흐를 때쯤이었다.

- 너 누구야?

바로 옆에서 들려온 전음이었다. 설마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것일까?

유진산은 침착하게 어둠을 뚫고 옆을 살펴보았다.

대략 열두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 사선으로 자리한 검상과 유난히 강인해 보이는 인상.

자세히 살펴보니 은은히 느껴지는 기세도 보통이 아니었다.

‘실력을 감추고 있는 녀석이 있었군. 이 정도면 교관을 이길 수도 있겠는데?’

뛰어난 영재들을 한곳에 모아놔도 그들을 압도하는 천재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확실히 이곳에서 본 아이들 중에서 가장 강해 보이는 녀석이었다.

- 일삼칠번.

- 거짓말하지 마. 일삼칠번은 내 친구였어. 분명히 어제 이곳을 탈출했는데, 왜 네가 그 옷을 입고 있는 거야?

유진산은 자신이 묻어주었던 가여운 아이를 떠올렸다. 죽어가기 전에 이곳에 친구가 남아 있다고 했던 말도.

- 대답하기 전에 나도 하나만 물어보자. 너는 왜 같이 탈출하지 않았지?

만약 둘이 같이 빠져나왔다면, 이 녀석만큼은 탈출에 성공했을 것이다. 어제 보았던 아이보다 월등히 강했으니까.

그렇기에 그 이유를 먼저 확인해야 했다.

- 나는 같이 갈 수 없었어. 입구를 지키는 교관님을 따돌려야 했으니까.

친구의 탈출을 위해 자신이 시간을 벌어줬다는 의미이리라. 생각보다 의리는 있는 아이인 듯했다.

‘잘되었구나. 이 녀석의 도움을 받는다면, 뭔가 해볼 수 있겠어.’

잠시 생각을 정리한 유진산이 근엄한 표정으로 전음을 보냈다.

- 너는 지금부터 나를 할아버지라 부르거라. 내 모습이 이런 것은 반로환동을 했기 때문이니까.

- 그게 무슨…….

그 순간 유진산이 갈무리하고 있던 기(氣)를 아이에게 쏘아 보냈다.

교관들을 뛰어넘는 초절정고수의 기세를 느꼈기 때문일까? 아이는 놀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 지나가다가 네 친구를 우연히 만났는데, 내게 도움을 청하더구나. 인연이 닿아 도와주려고 온 것이니 그렇게만 알아.

- 그, 그럼 제 친구는 무사히 탈출한 겁니까?

- 그래.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잘 빠져나갔으니 걱정 말거라. 지금쯤이면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겠구나.

굳이 사실대로 말해 슬픔을 전달할 필요는 없었다.

눈앞의 아이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 정말 다행이에요. 정말…….

- 그래, 이제는 너희들도 빠져나가야지. 그전에 통성명부터 좀 하자꾸나.

- 저는 일팔오번이예요.

- 아니, 이름이 뭐냐고.

일팔오번은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후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 이름은 창룡대원이 되어야 부여받을 수 있대요. 그때까진 번호로만 불러야 해요.

- 세상에 그딴 법이 어디에 있느냐.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나는 지금부터 너를 청풍(淸風)이라 부르겠다. 내일부터 내 옆에만 잘 따라다니거라.

- 예, 할아버지. 이름이 마음에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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