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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15화 (115/238)

115화 아미산의 아이들 (4)

오늘은 운기조식으로 훈련을 대신하는 듯했다.

정상적인 훈련이 진행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교관 중 다섯이 죽었고, 나머지도 소장에게 맞아 상태가 좋지를 않았으니.

기회가 생긴 유진산은 청풍과의 대화를 통해 정보부터 수집했다.

이곳의 구조와 교관들에 대한 정보. 그리고 각종 훈련 방식과 규칙 등이었다. 그중에는 충격적인 내용도 있었다.

- 창룡대원이 될 수 있는 인원은 백 명뿐이라고?

옆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청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 네, 할아버지. 그리고 별도로 오십 명이 차출되는데, 거기에 포함되면 예비 대원이 될 수 있다고 들었어요.

정황상 예비 대원들은 다음 기수를 위해 중원 각지에서 아이들을 납치하고, 훈련시키는 임무를 수행할 인원이리라. 자신의 손녀를 납치하기 위해 유가장을 기습했던 놈들처럼.

‘어쨌거나 백오십 명에 들지 못한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이로군.’

이곳의 아이들 중 칠 할은 죽을 운명이라는 얘기였다. 게다가 창룡대가 된다고 한들 어찌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아직 순수함을 잃지 않은 아이들이었다. 결코,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유진산은 잠시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곳의 아이들은 모두 검기(劍氣)를 사용할 수 있다. 먼저 무기고를 탈취한다면, 교관 놈들과는 한번 해볼 만하겠지.’

물론 아이들이 단합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지금은 불가능하겠지만, 자신을 따르는 녀석들이 많아진다면 시도해 볼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것은 소장을 어떻게 따돌리느냐는 것이었다. 그놈은 단체로 덤벼든다고 한들 어찌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 네 친구는 어떻게 탈출시켰어? 소장 놈을 따돌릴 수가 없었을 텐데.

- 가끔 자리를 비울 때가 있어요.

- 얼마나?

- 언제나 다음 날이 되면 돌아왔어요.

만약 청풍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날이 바로 기회였다.

- 네가 이런 것들을 어떻게 알아냈어?

- 소장이 없는 날은 훈련도 없고, 교관들끼리 모여서 무엇인가를 먹거든요.

유진산은 청풍을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환경에서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조사했다니. 보통 영악한 녀석이 아니었다.

- 무공만큼이나 머리도 명석하구나. 우리 손녀만큼은 아니지만 아주 훌륭해.

- 할아버지한테 손녀가 있어요?

- 응. 아마 너보다 세 살쯤 어릴 게다. 같이 왔으면 이런 고민은 하지도 않았을 텐데.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청풍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 강해요?

- 아마 너는 상상도 못 할 게다. 지금 폐관수련 중이라 함께 못 왔지만, 우리 손녀가 여기 오면 다 죽어.

- 와아…….

처음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일까? 만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청풍은 유진산에게 깊은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유진산도 그런 청풍이 싫지 않았다.

날이 좀 어두워지자 유진산이 조용히 일어섰다.

- 나는 잠시 좀 둘러보고 올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 어디 가시게요?

- 오늘 같은 기회가 언제 또 있을지도 모르는데, 한번 살펴봐야지.

교관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이곳의 구조를 익혀 두기 위함이었다.

소장이 머무는 곳만 피한다면 발각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미 대략적인 위치는 청풍을 통해 확인해 두었기에 걱정할 것이 없었다.

- 저도 같이 갈게요.

- 위험할 수도 있어.

- 걱정하지 마세요, 잠행술은 여기서 제가 제일이니까. 방해는 되지 않을 거예요.

유진산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아이들이 살수의 기술까지 훈련받고 있었음을.

이곳에서 실력이 가장 뛰어나고 영특한 청풍이라면, 도움이 될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조심하고,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먼저 도망치거라.

- 예.

아이들의 움직임이 허락된 곳은 막사와 뒷간 정도였다.

은밀히 밖으로 나온 둘은 주변부터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교관의 모습은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세 개의 막사가 품(品) 자 형태로 마주 보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 사방이 막힌 천막 하나가 설치되어 있었다.

안에서는 웅성거리는 어른들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 저 천막이 교관들이 머무르면서 감시하는 곳이에요. 근데 뭔가 좀 이상하네요.

- 뭐가?

- 보통은 교대로 순찰을 돌아다녀요. 근데 저 안에 다들 모여 있는 걸 보니, 오늘이 그날인 것 같아요.

- 소장이 없는 날? 이틀 전에 나갔다 왔다며?

- 저도 모르겠어요. 이런 적은 없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다가가서 알아봐야 했다.

기척을 갈무리한 둘은 막사의 그림자로 스며들어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교관들의 무공 또한 무시할 수 없었기에 너무 가까이 갈 수는 없었다.

대화를 엿들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둘의 걸음이 멈추었다.

“어제부터 십팔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아무도 못 봤어?”

“어디 소장의 심부름이라도 갔나 보지. 신경 쓰지 말고 마시자고.”

유진산은 자신이 산속에서 죽였던 흑의인의 옷에 십팔(十八)이라 쓰여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창룡대에 들어가지 못한 예비대원들은 번호로 불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눈치챈 사실이 있었다. 그가 소장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목소리가 불만이 가득했음을.

‘윗사람이 자리를 비웠으니, 이렇게 동료끼리 모여 뒷담화도 할 수 있는 게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겁도 없이 이렇게 떠들어대겠는가.

게다가 술까지 마시고 있다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대화의 분위기는 별로 좋지 않았다. 먼 곳까지 살기가 느껴질 정도로.

“모든 게 다 그 빌어먹을 애새끼들 때문이야. 이걸 어떻게 갚아 주지?”

“내일 훈련이 시작되면 아주 잘근잘근 밟아 주자고.”

이들은 동료들이 죽은 것과 소장에게 맞은 것을 몹시 분해하고 있었다.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할 수밖에.

“내일부터는 기회가 없을걸? 소장이 새로운 교관으로 아미파에서 고수들을 초빙해 온다고 했으니까.”

“확실해?”

“내가 직접 들었어. 오히려 지금 상황을 좋아하는 눈치던데? 이제 몰래 나가서 그년하고 뜨거운 시간을 보내도 되지 않으니까.”

“여기서 소장하고 비구니하고 뒹군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속이 거북하군.”

“아무튼, 조심해야 해. 무공은 물론 성격까지 소장 못지않게 지독한 년이라니까.”

무림맹주는 아미파의 문주인 화령사태였고, 창룡대는 오직 그녀의 명령으로 활동한다고 했다.

이들과 아미파가 협력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문제는 내일이면 고수들이 추가로 합류한다는 정보였다. 게다가 그중 한 명은 소장과 비슷한 수준의 무공을 지녔다니.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소장이 그동안 자리를 비웠던 이유가 눈이 맞은 그 비구니를 만나기 위해서인 듯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자리를 비울 이유 또한 없어질 터.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자신이 홀로 상대할 수 있는 교관의 숫자는 세 명. 나머지는 아이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하지만 누가 자신을 믿고 함께 싸우려고 하겠는가.

설득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이 상태로는 우왕좌왕하며 개죽음을 당할 게 불 보듯 뻔했으니까.

그때 더욱 암울한 한마디가 들려왔다.

“내일 비구니들이 오기 전에 미리 한번 굴려 놓자고.”

“소장한테 보고도 없이?”

“어차피 오늘은 없잖아. 일단 모두 집합부터 시켜.”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유진산은 청풍의 옷깃을 잡아끌며 어딘가로 이동했다.

막사 근처의 나무 뒤에 몸을 숨기자 청풍이 겁먹은 표정으로 물어왔다.

“막사로 안 돌아가요? 바로 소집된다는데, 지금 안 가면 위험해요.”

유진산은 청풍의 어깨를 붙잡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부터 할아버지 말을 잘 듣거라.”

“예?”

“내일부터는 기회가 없을 듯하구나. 내가 도와줄 테니,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거라.”

“…….”

“할아버지가 알려주는 장소로 찾아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우리 손녀가 폐관수련을 마치는 대로 찾아올 게다. 어쩌면 지금쯤 나왔을지도 모르고.”

사마현의 말에 따르면 불문사자신공은 구결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무공이다.

그렇기에 터득하기까지 단 며칠이 걸릴 수도, 상상 이상으로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선음지체라는 특이체질과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유설이라면 필시 단시일에 해낼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비록 검후의 도움이 있었지만, 이미 두 살 때 우주(宇宙)를 이해하고 화경의 깨달음을 얻은 무림 역사상 최고의 기재였으니까.

“같이 가요, 할아버지.”

유진산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일면식도 없는 아이들이었지만, 손녀 생각이 나서 무시하고 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가문의 은원과도 연관이 있는 곳이지 않은가.

“누군가는 남아서 저 가여운 것들을 지켜줘야 하지 않겠느냐. 고집부릴 때가 아니니 어서 이동하자꾸나.”

유진산은 청풍을 잡아끌고 훈련장의 입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자신이 들어왔던 폭포로 이어지는 동굴 앞.

교관 두 명이 뒷짐을 진 채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몸을 숨긴 유진산은 우선 청풍에게 사마현의 거처까지 찾아가는 길을 설명해 주었다.

- 너라면 할 수 있다. 잘 알아들었지?

- 예…….

고개를 끄덕인 유진산은 호흡을 골랐다.

그때 마침 어디선가 소집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나마 소란스러워진 지금이 바로 절호의 기회였다.

타앗-!

쏜살처럼 튀어 나간 그는 곧바로 왼쪽에 있는 교관부터 노렸다. 그가 완벽히 방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건 뭐…….”

화들짝 놀란 교관이 입을 떡 벌렸지만, 방어하기에는 너무나도 늦은 상황이었다.

이미 유진산이 그의 허리춤에서 손바닥을 내지르고 있었으니까.

유가건곤장의 일초식 일파무흔(一破無痕).

쩌엉-!!

“크억!”

강(强)의 성질만을 극대화해 높은 파괴력을 지닌 초식이었다.

무지막지한 내공을 머금은 일격은 그를 삼 장이나 날려버렸다.

그때 옆에 있던 또 다른 교관이 검을 움켜쥐고 재빨리 공격해왔다.

“이 미친놈이!”

사정없이 치고 들어오는 검기는 맨손으로 막기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무기가 없는 유진산은 상체를 흔들어가며, 그의 공격을 피해내기 시작했다.

굳이 자신이 반격을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때맞춰 상대의 등 뒤로 작은 그림자 하나가 은밀하게 접근하고 있었으니까.

콰앙-!!

청풍의 주먹이 교관의 등 뒤에서 요추를 가격하는 소리였다.

“……끄아.”

순간적으로 교관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칠 유진산이 아니었다.

날카롭게 세워진 손날이 상대의 인후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빠각-!!

순식간에 교관 둘을 해치운 둘은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금정봉 아래에 비구니 몇 명이 지키고 있지만, 너라면 돌파할 수 있을 게다.”

청풍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할아버지.”

유진산은 바닥에 떨어진 교관의 검을 줍고는 다시 청풍의 손에 쥐여주었다.

“사내 녀석이 우는 거 아니다. 어서 출발하거라. 나도 빨리 돌아가 봐야 하니까.”

혹시라도 이곳의 상황을 다른 교관들이 눈치챈다면 유진산도 무사할 수 없을 터.

청풍도 잘 알고 있었기에 더는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꼭 다시 돌아올게요.”

유진산은 인자한 웃음으로 손을 휘어 내저었다.

“이곳은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봐.”

멀어져 가는 청풍의 뒷모습이 비장해 보였다.

잠시 후 아이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진산도 이내 등을 돌렸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봐야겠지.’

청풍을 보낸 것은 만일을 대비해서였다.

유설이 불문사자신공을 금세 터득하고 나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장담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 전에 다른 방도가 있다면 찾아서 시도해 볼 요량이었다.

다시 막사 근처로 돌아오니 아이들이 모두 대열을 갖추고 기립해 있었다.

하나같이 피곤해 보이는 몰골 속에 긴장한 모습들.

그리고 그 앞에 뒷짐을 지고 있던 교관 한 명이 유진산을 발견하고는 노려봤다.

“너 어디 갔다 왔어?”

유진산은 능청스럽게 바지춤을 추켜대며 대꾸했다.

“잠시 배가 아파서 뒷간에 좀 다녀왔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교관이 양팔을 걷어붙이며 다가왔다.

“너 이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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