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16화 (116/238)

116화 타락한 비구니 (1)

유진산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귓방망이를 수십 대나 맞았으니 그럴 수밖에.

‘이 죽일 놈들이, 뒷간을 다녀왔다는 게 무슨 죄라고.’

이곳에 들어온 후 새파랗게 어린놈들한테 얼마나 맞았던가.

자괴감은 물론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분하게도 당장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지금부터 진법 훈련을 시작할 것이니, 조를 이루어 최선을 다해 방어해 보거라.”

열댓 명의 교관이 검집을 치켜들고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난데없이 한밤에 불러내어 진법 훈련이라니.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보복으로 아이들을 때리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그나마 진검을 뽑아 들지 않은 것이 다행이랄까?

그때 옷에 사팔칠(四八七)이라는 숫자가 각인된 소년이 앞으로 나섰다. 한쪽 눈을 다쳤는지 안대로 가리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저, 교관님……. 저희는 아직 진법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사팔칠번은 교관의 심기를 거스르고야 말았다.

역시나 돌아오는 것은 내공이 실린 발길질이었다.

“그래서 지금 가르쳐주려는 거잖아!”

콰직-!

“으윽!”

외마디 신음과 함께 사팔칠번의 신형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사팔칠번은 용케도 양팔을 교차하여 방어했다.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맞았다면 중상을 면치 못했을 정도로 위험한 발차기였으니.

“막아? 어디 이번에도 한번 방어해 보거라. 내 너의 하나 남은 눈을 공격해볼 테니.”

교관이 성큼성큼 다가가자 겁에 질린 사팔칠번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때 지켜보던 유진산이 재빨리 사팔칠번의 뒤로 다가가 뒷다리를 걸어버렸다.

콰당-!

“크윽!”

그는 곧이어 쓰러진 아이를 향해 주먹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어디 감히 하늘 같은 교관님의 명령에 토를 달아!? 미쳤어?”

“…….”

일순간 주변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팔칠번에게 다가가던 교관도 걸음을 멈추고는 유진산을 미친놈 보듯 쳐다봤다.

그러나 그를 나무랄 이유가 없었다. 자신을 치켜세워주는 한편, 할 일을 대신 해 주었으니까.

그리고 짧은 순간 분노가 좀 가라앉았는지 그는 이내 등을 돌렸다.

“십인일조로 헤쳐 모여!”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모여들며 대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때 사팔칠번이 유진산의 옆으로 다가와 전음을 보냈다.

- 정말 고마워 일삼칠번. 네 덕분에 살았어.

- 그렇게 고마우면 너도 나중에 날 좀 도와줘.

- 응. 뭐든지 말만 해.

기회가 올수록 자신을 따르는 아이들을 모아둬야만 했다. 그래야만 결정적인 순간에 뭐라도 해볼 수 있을 터였으니.

어느새 검집을 움켜쥔 교관들이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아이들은 그들에게 반격할 기색조차 보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무기도 쥐여 주지 않은 상태였으니.

이어진 것은 당연히 일방적인 매타작이었다.

쩍-! 퍼억-! 퍼퍽-!!

“윽!”

“아악!”

곳곳에서 아이들의 신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 순간만큼은 유진산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절망적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삐이이익-!!

다급한 호각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훈련장의 입구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곳에서 얼굴이 사색이 된 교관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시발, 큰일 났어!”

교관들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무슨 일인데?”

그는 달려오다 말고 다른 교관들을 향해 다급히 손짓했다.

“십사호하고 십육호가 당했어!”

훈련장의 입구를 지키던 자들이었다. 정황으로 보면 굳이 흉수를 물어볼 필요도 없을 터.

“도대체 어떤 새끼들이 탈출한 거야?”

단 한마디에 모든 교관이 행동을 멈추고 쏜살같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했다. 소장에게 징계를 당할 것이 두려운 것이리라.

교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유진산의 얼굴엔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이미 늦었다, 이 녀석들아.’

그의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청풍은 아미산을 벗어나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을 터였다.

* * *

다음 날 아미파의 장로 여섯 명이 이곳으로 합류했다.

기존의 교관들보다는 폭력적이지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이었다.

어찌나 드센지 교관들도 그녀들에겐 찍소리조차 못 하고 눈치만 볼 정도였다.

“일각 안에 오르지 못하는 녀석들은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눈앞에는 까마득한 암벽이 치솟아 있었다.

맨손으로 기어오르라는 의미였다. 게다가 등에는 무거운 돌덩이까지 한 포대씩 둘러멘 상황이었다.

무공을 익힌 아이들에게는 그리 어려운 관문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어젯밤의 일로 팔을 다친 아이들이었다.

보다 못한 유진산이 나서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팔을 다친 동료들은 무게를 좀 덜어주면 안 되겠는지요?”

심술이 가득해 보이는 노년의 비구니가 팔짱을 낀 채 콧방귀를 꼈다.

“그따위 정신 상태로 어찌 무림을 수호하는 창룡대가 될 수 있겠느냐. 그렇게 안쓰러우면 네가 대신 들어주면 되겠구나.”

“……알겠습니다.”

유진산은 상태가 좋지 않은 아이들에게 다가가 포대를 빼앗아 들었다.

양쪽 어깨에 두 개씩. 그리고 허리춤에도 하나를 휘감았다.

온몸에 주렁주렁 자루를 매단 모습이 불안해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걸 어떻게 혼자 다 들려고?

“고마워, 일삼칠번…….”

“정말 괜찮겠어?”

이런 따듯함을 느껴보지 못했던 것일까? 자루를 맡긴 아이들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유진산은 대답 대신에 씩 한 번 웃어 보이고는 곧장 암벽에 매달렸다.

다섯 개의 자루를 매달고도 흔들림 없는 모습에 밑에서 지켜보던 모두가 놀라워했다.

그리고 그가 벽을 타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너 정말 대단하다. 난 세 개가 한계야.”

옆을 바라보니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사팔칠번이 히죽 웃고 있었다.

유진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선 놀라운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무공이 강한 아이들이 몸이 불편한 친구들의 짐을 하나씩 건네받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장면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뿌듯해졌다.

‘그래, 바로 그거다. 너희들이 이렇게 한마음이 되어 힘을 모은다면, 반드시 시련을 이겨내고 이 지옥을 함께 빠져나갈 수 있을 게다.’

눈앞의 아이들이 손녀의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일까? 유진산의 두 눈에는 알 수 없는 측은함이 담겨 있었다.

* * *

참혹한 훈련은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을 상당수 포섭하고, 세력을 구축했지만, 기회는 쉽게 찾아오질 않았다.

지금까지는…….

“일삼칠번!”

대련 장소에서 기립하고 있던 유진산은 누군가의 부름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말입니까?”

얼굴에 팔자주름이 가득하고 성질이 불같은 비구니였다.

“그래, 너. 사저께서 좀 뵙자니까, 따라오너라.”

“저를 왜…….”

그가 조사하기로 눈앞의 비구니는 여섯 명의 장로 중 서열이 두 번째였다.

그렇다면 자신을 부른 인물은 서열이 가장 높은 도혜사태일 터. 소장과 눈이 맞은 타락한 비구니였다.

그녀가 왜 자신을 부른단 말인가.

무엇인가 일이 잘못된 것일까?

유진산은 불길한 마음을 품고 눈앞의 비구니를 따라 어딘가로 이동했다.

예상대로 도착한 곳에는 소장이 머무는 작은 전각이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다른 곳과는 다르게 관리가 잘된 모습이었다.

“들어가 봐.”

“저 혼자 말입니까?”

자신을 끌고 왔던 비구니는 대답도 없이 바로 등을 돌렸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유진산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보았다.

끼이익-!

내부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가관이었다.

소장의 침상으로 보이는 곳에 한 여인이 요염하게 옆으로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도혜사태는 나이가 가장 많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노년의 비구니들과는 달리 젊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머리카락만 있다면 절세미녀라 해도 될 정도로.

“귀엽게 생겼네. 이리 가까이 와 봐.”

그녀의 손짓에 유진산은 쭈뼛쭈뼛 다가갔다.

“…….”

“너 무공을 숨기고 있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녀는 대답 대신 오른손을 전광석화처럼 내뻗었다.

순간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유진산은 반사적으로 상체를 비틀었다.

하지만 완벽히 피해내지는 못했다.

뱀처럼 휘어지는 그녀의 손아귀는 정확히 옷깃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힘으로 확 잡아당겼다.

코앞에서 마주하게 된 도혜사태의 얼굴에는 잡티 하나 없었으며, 중후하면서도 도도한 매력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속에 감춰진 타락한 비구니의 본모습을 어찌 모르겠는가.

“내 훈련장에서 너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일단 근골부터 좀 확인해 보자꾸나.”

설마 정체를 눈치챈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의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예?”

도혜사태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다짜고짜 유진산의 신체를 더듬거렸다.

그에 따라 유진산의 마음도 점차 불안해졌다. 농밀한 손길이 환골탈태한 몸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각지의 특출한 애들은 다 모아놨다더니, 한 명쯤은 있을 줄 알았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 모를 줄 알았더냐. 천아지체라 그런지 피부가 곱고 탄탄한 게 다른 아이들이랑 다르구나.”

천아지체(天兒之體). 선천적으로 환골탈태를 한 것처럼 하늘이 내린 신체를 타고난 무골이었다. 다행히도 오해가 있는 모양이었다.

유진산은 시치미를 뚝 떼고 두 눈만 연신 끔뻑거렸다.

“……?”

그때 도혜사태가 침상에 다시 몸을 눕히고는 등을 돌렸다.

“어깨부터 주물러 보거라. 요즘 거기가 좀 뻐근하니까.”

어이없게도 자신에게 안마를 지시한 것이다. 이게 무슨 황당한 경우란 말인가.

그야말로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이 할망구가 지금 뭘 하자는 거야?’

명성이 드높은 아미파의 고수가 이렇게까지 방탕할 줄이야.

이 순간 유진산은 확신했다. 무림에서 참된 불도의 길을 걷는 선승(禪僧)은 사라진 지 오래라는 것을.

지금은 어딜 가나 무승(武僧)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속으로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그의 양손은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삶의 관록에서 묻어나는 능숙한 그의 지압법에 도혜사태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아…… 좋아. 그래, 그렇게 계속하거라.”

도혜사태는 완벽히 방심하고 있었다.

가냘프고 얇은 목덜미를 보니 툭 치면 부러질 듯했다.

하지만 작은 살기(殺氣)까지 감지할 화경의 고수가 순순히 당해 줄 턱이 없지 않은가.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아직은 준비가 덜 끝났으니.

그리고 그의 고민은 또 한 가지가 있었다.

‘이 모습을 소장 놈이 본다면 나를 죽이려 들 텐데. 이 할망구가 과연 보호해 줄까?

유진산은 가시방석 위에 앉은 기분이었다.

도혜사태와 연인관계인 그가 이 모습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의 상황은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가 없었다.

아미파의 문주인 화령사태가 무림맹의 총타에 있는 이상, 이곳에서 도혜사태의 권력은 무소불위일 터.

어떻게든 구워삶을 수만 있다면 무엇인가 기회를 만들어 볼 수도 있을 듯했다.

한참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 시원함을 느끼고 있던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어린 것이 기술이 대단하구나. 어디서 배웠느냐.”

“훈련이 끝난 후 가끔 동료들의 몸을 풀어주었습니다.”

“흐음. 나는 네가 마음에 드는구나. 교관에게 얘기해 둘 테니, 내일부터 이 시각에 날 찾아오너라.”

“……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