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타락한 비구니 (2)
날이 지날수록 유진산의 몰골은 초췌해져만 갔다. 도혜사태의 요구사항이 점점 늘어났기 때문이다.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으며, 그것도 모자라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세상에 이런 미친 비구니가 또 있을까? 마귀가 씐 게 확실해.’
처음에는 안마가 고작이었지만,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소장의 눈을 피해가며 상상하기조차 싫은 요상한 짓거리를 매일같이 해야만 했다.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어깨가 축 늘어진 그가 힘없이 양손을 모았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눈앞에는 그녀가 침상 위에서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요염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얼굴에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잠깐만.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
“……예?”
도혜사태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소장 없는 날. 아마 다음 날 아침까지 돌아오지 못할걸?”
그 순간 시체 같았던 유진산의 두 눈에 갑자기 생기가 감돌았다.
무슨 이유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모를 참아가며 얼마나 이 말을 기다려 왔던가. 미친 듯이 기뻤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표정을 관리했다.
“그런데 그걸 왜 제게…….”
도혜사태는 대답 대신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유진산이 쭈뼛쭈뼛 다가가자 그녀가 귀에다가 나직이 속삭였다.
“도화 사매에게 일러 둘 테니, 내일은 저녁에 찾아오너라.”
도대체 무슨 개수작을 부리려는 걸까? 시커먼 속내를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내일은 순순히 당해 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소장의 전각을 빠져나온 그는 교관의 안내를 받아 이동을 시작했다.
훈련장이 조용한 것을 보니 오늘은 야외 훈련이 일찍 종료되고, 내공 수련이 진행되는 듯했다.
막사에 들어서자 대다수의 아이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수련을 게을리하는 아이는 없었다. 뒤처지는 순간 죽임을 당할 테니.
최후까지 살아남을 아이들의 인원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 숫자는 고작 백오십 명. 현재까지 생존한 아이들의 수가 삼백여 명이었으니, 둘 중 하나는 더 죽게 될 상황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말이다.
“조용히 이쪽으로들 와봐.”
유진산은 그동안 이곳에서 포섭해놓은 아이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무공 실력이 특출나고, 용기 있는 녀석들로 고르고 고른 정예들.
하나같이 자신의 도움을 받은 믿을 만한 아이들이었다.
빙 둘러앉은 열두 명의 얼굴엔 비장함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야? 일삼칠번.”
유진산은 입가에 검지를 올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들 내가 했던 말들 기억나지?”
“……?”
그는 내용을 말하지 않았지만, 장내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이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밤에 내가 불려 나가면, 일식경 후 행동을 개시해. 잘 알겠지?”
자세한 얘기는 미리 해 놓았던 터였다.
“응.”
“알았어.”
유진산은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쭉 훑어보았다. 다행히도 겁을 먹은 아이는 없는 듯했다.
그는 흡족한 얼굴로 아이들을 독려했다.
“너희들은 충분히 강하니까 자신을 믿어. 모두 마지막 용기를 쥐어짜는 거야.”
이 막사에서 의기투합한 인원은 자신을 포함하여 열세 명.
고작 이 인원으로 교관들을 제압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유진산은 확신하고 있었다. 눈앞의 아이들이 작은 불씨가 되어, 절대로 끌 수 없는 큰불을 일으켜 줄 것임을.
이곳의 상황을 정리한 유진산은 뒷간을 가는 척 밖으로 나갔다.
기척을 죽이고 두리번거리던 그는 은밀히 다른 막사로 향했다. 그곳에도 포섭해 놓은 아이들이 몇 명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 벌어질 작전을 성공시키려면 작은 힘까지도 최대한 모아야 했다.
* * *
불문사자신공을 해독해준 인물이 사천성의 현자(賢者)인 사마현이었다.
그의 거처는 목책이 빙 두르고 있는 시골의 초가집이다.
앞에는 연무를 할 수 있는 작은 마당이 있었으며, 주변엔 작은 밭도 있었다.
한적하고 적막이 가득했던 곳이었지만, 최근 이곳에도 변화가 생겼다. 뜻밖의 식객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굉장하구나. 세상이 바뀐 것인지, 내가 뒤처진 것인지, 요즘 아이들은 왜 이렇게 강한지 모르겠어. 정말 대단해.”
마당에서 검을 내뻗고 있는 자는 사마현의 호위무사인 왕충이었다.
그자 앞에는 한 소년이 마주 서서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훈련장에서 뵌 일삼칠번 할아버지는 저보다 훨씬 강했어요.”
소년의 정체는 유진산의 부탁으로 이곳을 찾아온 청풍이었다.
사건의 내막을 듣게 된 왕충은 사마현에게 보고했고, 유가장과의 인연 덕분에 이곳에 잠시 머무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청풍은 훈련장에서 가장 강한 아이였다. 한때 사천의 무림에서 한가락 했던 왕충과 호각을 이룰 정도로. 그래서인지 둘은 서로 무예를 겨뤄 보며 부쩍 가까워지고 있었다.
“너를 이곳으로 보냈던 요만한 할아버지 말이더냐.”
“예. 교관을 기습해서 단숨에 제압하는 것을 봤어요.”
“네 말대로 무척이나 강한 분이시지. 하지만 그런 그분을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아이도 있단다.”
“할아버지의 손녀요?”
왕충은 먼 산을 지그시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야말로 무림사에 다시없을 무신(武神)의 재능을 지닌 아이였지. 아마도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온다면 세상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것 같구나.”
유설의 얘기가 나오자 청풍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
“……예. 빨리 나와야 하는데.”
“또 그곳이 걱정되는가 보구나.”
“너무 오래 지났어요. 할아버지는 어떻게 되셨을지……. 부디 무사하셔야 할 텐데.”
“저 안에 계신 어르신께서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더냐.”
어르신은 현자인 사마현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왕충은 그의 말이라면 조금의 의심도 없이 철석같이 믿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청풍은 달랐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너무 불안해요. 기다리지 말고,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는 건 안 되나요?”
“그건 절대 안 돼. 우리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길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에서 방해를 당하면, 자칫 주화입마에 빠져 광인이 될 수도 있다는구나. 세상에 종말을 가져오고 싶어?”
“……아니요.”
왕충은 인자한 미소로 청풍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틀림없이 무사하실 거니까 차분히 기다려 보자꾸나. 지혜로운 분이시니,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내셨을 거야.”
“예.”
“아직 시간이 이르니 한 번 더 겨뤄 보고, 함께 식사 준비부터 하자꾸나.”
무인(武人)의 삶에서 실력이 비슷한 맞수를 만나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다.
그렇기에 왕충과 청풍은 하루에도 몇 번씩 대련하며 친분을 쌓아 가고 있었다.
카앙-!
두 자루의 검이 맞물리며 청량한 금속음이 토해져 나왔다.
그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대련이 시작되었다.
비록 진검이었지만, 날에 내기(內氣)를 담지 않는다면 서로가 상할 일은 없었다. 단순히 초식을 교환하는 것이었으니.
함께 뒤섞여 검무(劍舞)를 추는 둘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카앙-! 카앙-! 카카캉-!!
서로가 한 치의 밀림도 없는 팽팽한 대련은 일각 동안 계속됐다.
마지막 합을 교환한 둘은 다시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마주 선 채 서로 포권을 하고 있을 때였다.
“왕 아저씨! 우리 할배 어디 갔는지, 못 봤어요?”
“……?”
어디선가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왕충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위치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의아해하는 것은 청풍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바로 옆에서 들렸는데…….”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둘의 시선이 곧이어 초가집의 지붕 위에 고정되었다.
또렷한 이목구비에 눈처럼 흰 피부. 큼지막한 눈동자는 분명 유설의 얼굴이 분명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라면, 허리까지 내려오는 고운 머릿결이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짧은 시간 저렇게 긴 머리카락이 새로 돋아났다면, 깨달음을 통해 다시 한 번 환골탈태가 진행되었다는 뜻일 터.
드디어 불문사자신공을 익히고 현경(玄境)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리라.
“……설아?”
지붕 위에 있던 유설이 앙증맞은 발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런데 허공에서 내려오는 모습이 기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치 깃털처럼 중력의 법칙을 무시한 채 살랑거리며 내려앉는 것이 아닌가.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던 청풍은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유설에게 다가갔다.
“네가 설이 맞지? 할아버지가 보내서 기다리고 있었어.”
유설의 나이 아홉 살.
청풍보다는 세 살이 어렸지만, 성장 속도의 차이 때문인지 키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응, 내가 설이야. 우리 할배 지금 어디에 있어?”
“아미산에 있어. 네가 나오는 대로 빨리 와서 도와달라고 했어. 위험할지도 몰라.”
할아버지가 위험하다는 말에 유설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위험하다고!? 아미산이 어디야?”
그렇지 않아도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청풍이었다. 머뭇거릴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내가 안내해 줄게. 빨리 가자!”
* * *
날이 저물자 유진산은 예정대로 소장의 전각으로 이동했다.
간편한 잠옷만 걸친 도혜사태는 부끄러움 따위는 전혀 모르는 비구니였다.
그녀는 침상에 다리를 꼬고 누운 채 발가락을 까닥거리며 물었다.
“왔어?”
“……예.”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서 어깨부터 좀 주무르거라.”
언제나 시작은 안마였다. 그 뒤에는 하나둘씩 다른 요구사항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이 구렁이 같은 할망구야. 그동안 나를 잘도 가지고 놀았겠다.’
유진산은 그 어느 때보다 성심성의껏 양손을 움직여가며 근육을 풀어 주었다. 몸과 정신이 나른해지도록…….
“아아……. 기분이 좋아. 오늘은 마치 극락으로 가는 마차에 올라탄 것만 같구나.”
“모두 풀어 드리겠습니다. 두 눈을 감고 시원함을 느껴 보세요.”
“……그래.”
도혜사태의 등에 올라탄 유진산은 무릎과 왼손으로 지압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른손은 은밀히 자신의 허리춤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미리 가져온 무기를 꺼내기 위해서.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그에게 지금처럼 긴장된 순간이 없었다.
‘후. 이렇게 떨릴 줄이야.’
기회는 단 한 번뿐.
무시무시한 무공을 지닌 타락한 비구니였다.
이번에 그녀를 처치하지 못한다면, 당하는 것은 역으로 자신이 될 터.
호흡을 멈춘 그는 은밀히 단도를 꺼내 들었다. 비도술(飛刀術)을 훈련받을 때 미리 챙겨둔 물품이었다.
유진산의 시선이 그녀의 목 뒤에 고정되었을 때였다.
“일삼칠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 순간 유진산은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당황함을 보여 줄 수가 없었기에 그는 최대한 심호흡을 하며 시치미를 뗐다.
“예……?”
들려온 대답은 다행히도 예상 밖이었다.
“언제까지 위에만 주무를 거냐고?”
“죄, 죄송합니다.”
크게 숨을 들이켠 유진산은 다른 급소를 찾아보았다.
화경의 신체가 아니던가. 어지간한 곳은 공격당해도 쉽게 목숨이 끊어질 리가 없었다.
심사숙고 끝에 내린 곳은 왼쪽 등이었다.
‘찰나의 순간 강기를 발출하여 심장까지 꿰뚫는다.’
더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곧 있으면 아이들이 행동을 개시할 시점이었으니.
무기고를 탈취하고 경보가 울리면 그때는 이미 늦을 터.
목표지점을 정한 유진산은 서서히 단도를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