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타락한 비구니 (3)
사선으로 치켜세워진 단도가 전광석화처럼 내리꽂혔다.
푸우욱-!!
“크악!”
암습을 가한 유진산은 재빨리 도혜사태의 등에서 내려와 물러났다.
그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 완벽한 공격이었음에도 절반의 성공만 거두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살기를 갈무리했거늘, 그걸 눈치챘단 말인가?’
그 짧은 순간에 급소를 피해내다니, 역시나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푸욱-!
도혜사태가 등 뒤에 틀어박힌 단도를 뽑아내는 소리였다.
“너 이 새끼…….”
고개를 치켜든 그녀의 얼굴이 마치 악귀처럼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모습에 유진산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금이라도 목숨을 끊어놔야 했지만 다가갈 수가 없었다. 도저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시간을 끌면서 그녀의 부상 상태를 살펴봐야 했다.
“죄, 죄송합니다. 소장님이 시켜서…….”
다급한 나머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 말이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몸을 일으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를 죽이라 했다고? 왜지?”
“그,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너는 특별히 예뻐해 주었거늘, 은혜도 모르고 감히 내 등에 칼을 꽂아?”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소장님께서 저를 죽인다고 해서…….”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보니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이리 가까이 와서 사실대로 고하거라. 사지를 찢어놓기 전에.”
엄청난 살기가 온몸을 옥죄여와서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유진산은 도혜사태의 몸 상태를 살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달려와서 자신의 멱을 낚아챘을 상황이다. 그런데 가만히 서서 다가오라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부상이 심한 모양이었다.
역시나 그녀는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심하게 비틀거렸다.
그것을 확인한 유진산은 움츠리고 있던 어깨를 꼿꼿이 세웠다. 이제는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대로 고하라고?”
갑자기 돌변한 태도에, 도혜사태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하지만 유진산의 도발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네년이 이런 미친 짓거리를 즐기니까, 소장이 바람난 것이 아니냐!?”
유진산의 호통에 도혜사태의 신형이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너, 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녀는 말까지 더듬거리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마치 주화입마라도 찾아온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때다 싶었던 유진산은 그녀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쩌엉-!!!
밝은 빛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유진산의 신형이 뒤로 튕겨 나갔다.
“아악!”
상처 입은 호랑이가 더욱 사납다고 했던가.
일합을 교환한 그는 확신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이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아무리 다쳤어도 차원이 다른 고수였다.
“지금 뭐라고 했는지 다시 한 번 지껄여 보거라.”
이길 수 없다면 피하면 그뿐.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자세를 가다듬은 유진산은 호흡을 들이켜 마지막 일갈을 터트렸다.
“미친 변태 할멈이라 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콰앙-!!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할망구였다.
유진산이 달리기 시작하기 무섭게 전각이 있는 방향에서 분노에 사무친 고함이 들려왔다.
“너 이 새끼 죽여버리겠다!!”
뒤를 돌아보니 왼손으로 등을 움켜쥔 도혜사태가 비틀거리며 쫓아오고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악을 쓰며 다가오는 모습에 전신의 소름이 쫙 돋았다.
다행히도 부상 때문인지 속도는 무척 느릿했다. 손쉽게 따돌릴 수 있을 정도로.
유진산은 그녀를 무시한 채 아이들이 있을 방향으로 달렸다.
* * *
검을 움켜쥔 삼십여 명의 아이들이 원을 이뤄 교관 셋을 포위하고 있었다.
다들 몹시 지친 듯 이마에서는 비질 땀이 흘러내렸다.
“허억! 허억!”
“후우.”
안쪽에서 포위당한 교관들도 지친 몰골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지금의 상황을 어이없어하면서도, 눈을 부라리며 호통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너네 전부 미쳤어?”
“죽고 싶어?”
무기고를 탈취한 것이 시작이었다.
십수 명의 아이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교관 중 절반을 각개격파했다.
그러나 계획은 오래가지 못하고 막혀버리고야 말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교관들도 머리를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몇 아이들이 용기를 내어 반란에 합류했지만, 도합 삼십 명으로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아직도 이백여 명이 넘는 아이들이 두려움에 젖어 주변에서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양측 모두 우세를 점하지 못하자, 대치만 계속해서 이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한 것은 아이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당장 무기들 내려놓지 못할까!!”
“이놈들이 감히!”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비구니 다섯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아미파의 장로들이 추가로 합류한다면 더는 기회가 없을 터.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검을 쥔 아이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주변을 향해 소리쳤다.
“얘들아, 도와줘!”
“제발…….”
한쪽에는 무기고에서 탈취한 검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마치 얼음이라도 된 듯 누구 하나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대로라면 반란에 가담한 삼십여 명의 아이들만이 모두 처형이 될 터.
절망이 최고조에 이를 때였다.
돌연 어딘가에서 화가 잔뜩 난 누군가의 호통이 뿜어져 나왔다.
“이 바보 같은 녀석들아! 친구들이 당하는 데도 계속 보고만 있을 거야!! 평생 노예로 살고 싶어!?”
모두의 고개가 한곳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선 어느새 달려온 유진산이 검 한 자루를 집어 들고 있었다.
“일삼칠번?”
“……일삼칠번도 같이 하는 거야?”
모두가 알기로 훈련장에서 가장 강한 아이였다.
검을 주어든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비구니들이 오는 방향을 가로막았다.
홀로 그녀들과 맞서려 하다니.
그 모습에 몇몇 아이들이 전율하며 용기를 얻었다.
“늦어서 미안하다 얘들아.”
“한번 해보자!”
척-! 처척-!!
몇몇 아이들이 검을 움켜쥔 것이 시작이었다.
마치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나머지 아이들이 검이 있는 곳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나도 같이 간다!”
“나도!!”
척-! 처처척-!!
수북이 쌓여 있던 검들이 순식간에 동나기 시작했다.
사태가 이쯤 되자 교관들이 당황하며 움찔거렸다. 아미파의 장로들도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고 슬슬 뒷걸음질 쳤다.
고작 쪼그만 아이들이 이렇게 조직적으로 반기를 들 줄 어찌 상상했겠는가.
비록 교관들의 무공 수준이 절정에 이르러 있었지만, 고작 여덟 명이었다.
그들만으로 검기를 다룰 줄 아는 수백 명을 상대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유진산이 선두에서 소리쳤다.
“얘들아 가자!! 이 괘씸한 것들에게, 지금까지 당한 것을 모두 갚아 주는 거다!!!”
말을 마친 유진산이 단신으로 비구니들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내달렸다.
타앗-!!
원래대로라면 시도하지 않을 무모한 행동이었다. 비록 자신의 무위가 초절정의 경지였지만, 혼자서는 세 명이 한계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아미파의 장로들은 이미 기가 꺾여 있었고, 자신의 등 뒤에는 삼백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와아아!!”
“와아아아!!”
유진산은 처음부터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으로 필살의 일격을 내질렀다. 한 명이라도 쓰러트려 기선을 제압할 요량이었다.
뒷걸음질 치던 비구니 한 명이 당황하며 검을 들어 막았지만, 유진산의 무공 수준을 얕본 실수가 있었다. 그녀는 단번에 검날이 부러지며 수급이 달아나고야 말았다.
써컥-!!
유진산이 교관을 일격에 베어버리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어졌다.
아이들의 사기는 하늘로 치솟았으며, 교관들은 공포에 질렸다.
급기야 비구니들이 먼저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유진산이 뒤를 돌아보자, 포위되어 있던 교관들도 이미 쓰러져 있었다. 몰골을 보니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한 채 순식간에 쓸려나간 듯 보였다.
이제 남은 것은 도망치는 비구니들을 잡는 일뿐.
아이들이 그녀들을 뒤쫓으려는 그때였다. 돌연 유진산의 입에서 내공이 실린 목소리가 거세게 토해져 나왔다.
“쫓지 말고 멈춰!!!”
“……?”
“……?”
모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유진산을 바라보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지금 즉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니까, 모두 날 따라오너라!!”
도망치는 장로들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쯤이면 문제의 그 미친 비구니가 쫓아오고 있을 터.
도혜사태는 머릿수로 어찌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죽기 살기로 싸운다면 일말의 가능성은 있을 터였지만, 얼마나 많은 희생이 뒤따를지 계산조차 서질 않았다.
역시나 먼 곳을 바라보자 눈이 뒤집힌 그녀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일삼칠번! 너 이 새끼, 이리 안 와!!”
한 가지 다행이라면 부상 때문에 그녀의 속도가 빠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일 듯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녀의 걸음걸이는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저럴 수가……. 설마 불광신단이라도 처먹었단 말인가?’
불광신단은 아미파의 보물로 상처 회복에 탁월한 영단이었다. 문파의 핵심인물인 도혜사태가 하나쯤 소지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는 다른 아이들도 알고 있었다.
모두가 유진산의 등 뒤를 따라 도주하기 시작했다.
훈련장의 입구에도 교관 몇 명이 지키고 있을 테지만, 무서워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와아아아!!”
“와아아아아!!!”
동굴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세 명의 교관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거리가 십여 장 이내로 가까워지자, 그들은 싸울 생각도 않고 도망쳤다.
이제 더는 앞을 가로막는 자가 없었다.
동굴을 통과해서 빠져나오자 폭포수와 함께 계곡이 이어져 있었다.
유진산은 일단 입구 근처에 숨겨놓았던 용살창부터 회수했다.
‘이걸 어찌한다…….’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먼 곳에서 쫓아오는 도혜사태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곧 있으면 아이들의 속도를 따라잡을 터.
이대로 길을 따라 내려간다면 대참사가 일어날 우려가 있었다.
“모두 잠행술 배웠지? 흔적 남기지 말고 잘 따라와!”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그가 이 장소를 찾아내기 전까지, 이곳저곳을 조사하며 아미산의 지리를 익혀 놓았단 것이다.
유진산은 아이들을 이끌고 앞장서서 물길을 따라 내달렸다.
반 각이 지난 뒤.
폭포수 아래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아미파의 장로들과 살아남은 교관들이었다.
왼손으로 등을 움켜쥔 도혜사태가 그들의 뺨을 한 대씩 후려쳤다. 단 한 명도 예외가 없었다.
철썩-! 철썩-! 철썩-!
“이 병신 같은 것들. 그동안 애들을 어떻게 교육한 거야?”
“죄, 죄송합니다.”
도혜사태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도화 사매에게 명령했다.
“지금부터 아미산을 봉쇄한다. 나는 입구부터 막고 수색을 시작할 테니까, 사매는 올라가서 이대제자까지 모조리 다 데리고 내려와.”
이 위치는 아미파가 자리한 금정봉의 코앞이었다.
도혜사태의 말뜻은 아미파의 전력을 총동원하겠다는 의미였다.
무림맹주의 사문이자 구대문파의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명문정파가 아니던가. 이대제자까지 총동원된 경우는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전부 다 말입니까?”
사매가 머뭇거리자 도혜사태가 짜증이 난다는 듯 쌍심지를 치켜세웠다.
문주가 무림맹의 총타에 출타 중인 이상, 장로들의 수장인 그녀의 말 한마디는 곧 법이었다.
“말귀를 못 알아먹었어?”
“아, 아닙니다.”
“저놈들을 잡아 오지 못하면 정파의 미래는 없어! 원로원에도 협조를 요청해. 사정을 얘기하면 다들 도와주실 테니까.”
원로원은 이미 무림을 은퇴한 전대의 고수들이다.
문파의 뒷방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그들이었지만, 하나같이 대단한 무공을 소유한 무서운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문파의 존망이 걸린 일이 아니라면, 절대로 움직이는 경우가 없다.
도대체 창룡대가 무엇이라고 원로원에서까지 도와준다는 말인가.
아는 것이 한정적이었던 도화는 궁금한 게 많았지만, 더는 말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